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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안시성 22

오늘의 쉼터 2014. 11. 8. 21:39

제27장 안시성 22

 

 

 

“대감은 여기서 김유신을 막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거든 명활성으로 오시오.

명활성엔 이럴 때를 대비해 우리가 훈련시킨 군사들이 따로 있으니

압량주 향군쯤은 단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오.”

그것은 비담측의 기밀이었다.

비담이 모반을 계획한 것은 상대등이 된 직후다.

그는 1년간 여러 가지 치밀한 준비를 해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승부령 대인(大因)으로 하여금

군역을 마친 장부들을 매수하여 마초를 벤다는 핑계로 명활성에서 군사 훈련을 시켜오고 있었다.

비담이 사재를 털어 동원한 퇴역 맹졸들의 숫자가 무려 8천이나 되었다.

김유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당초 염종과 여운을 베려고 마음먹었던 천존은

염종의 그 말에 다시 본색을 감추기로 했다.

사정을 속속들이 더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활성에 군사가 얼마쯤 됩니까?”

천존이 짐짓 반색을 하며 묻자 염종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족히 1만은 되지? 하지만 그 1만은 삼도나 향군의 오합지졸과는 격이 다르지.

모다 군역을 마친 노련한 장정들인 데다 편장들만 모아놔도 기천일세.”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무엇을 걱정하신단 말입니까? 어서 상신을 명활성으로 피신시킵시다.

저도 휘하의 군사들을 소집해 곧 명활성으로 가겠습니다.”

천존은 그렇게 말하고 칼을 찾아들었다.

그가 한 필 말에 올라 격전장인 궐문 앞으로 나오자

마침 김유신이 훤히 밝힌 횃불 아래에서 신들린 듯한 솜씨로 보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천존은 시급히 알천에게 가서 명활성의 기밀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김유신을 피해 다른 쪽으로 달아나려고 슬그머니 몸을 돌렸을 때였다.

“거기 가는 이는 천존공이 아닌가?”

등뒤에서 김유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존은 하는 수 없이 김유신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구적(仇敵)과 난신이 들끓는 흉한 시절이라곤 하지만

그대와 내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또 몰랐네.”

눈을 부릅뜬 유신은 짐짓 점잖은 말로 천존을 나무랐지만

비담과 여운의 군사들이 에워싼 앞이라 천존은 드러내고 사정을 말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는 해가 하나요,

황세(黃洗) 장군과 여의(如意) 낭자의 마음이 어찌 다르겠소?

공이 황세라면 나는 여의외다.

만일 그 두 사람의 일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나를 보내주시오.”

천존이 난데없이 금관국에 전해내려오던 전설을 들먹이자

유신은 비로소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하면 하나만 물어보세. 알천공은 어찌하여 모반을 일으켰는가?”

천존에게 말못할 사정이 있음을 눈치챈 유신이 음성을 낮춰 물으니

천존이 깜짝 놀라는 시늉으로 오히려 반문했다.

“그렇다면 공은 누구한테서 소식을 듣고 달려왔소?

여기서는 다들 병부령을 의심하고 있소!”

천존은 말을 하면서 자꾸만 궐문 너머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유신은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확신했다.

더구나 두 사람은 한때 처남 매부가 될 뻔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가.

“나를 거쳐 내 앞으로 지나갈 수 있는가?”

유신이 묻자 천존은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오히려 내가 바라는 일이외다.”

이어 천존은 피묻은 칼을 꼬나 든 유신의 앞을 마상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태연히 지나갔는데

조금도 경계하는 기색이 없었다.

압량주 군사들이 대궁을 장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궁 뒷담을 넘어 달아난 염종은 비담의 사저를 찾아가 의논한 뒤 함께 명활성으로 도망가 진을 쳤다.

내란을 피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으나 백반과 칠숙이 역모를 꾀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때와 진영이 뒤바뀐 점이었다.

이튿날부터 양측 군사들 간엔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비담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의 군사는 월성을 점거한 뒤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연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천존을 통해 소식을 들은 알천도 급히 병부 군사를 동원해 월성에 합류했지만

명절을 쇠러 간 군사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데다

그나마 여운이 먼저 허전관령(虛傳官令)으로 태반의 군사들을 빼내간 터라 비담측을 압도할 수 없었다. 양측은 호각지세를 이루며 서로 치고 막기를 며칠간 계속했다.

그런데 정월 보름날 밤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반짝이며 월성으로 떨어졌다.

이를 본 비담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듣건대 별이 떨어지는 곳에는 반드시 유혈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김유신 일당이 패망할 징조다.

어찌 하늘이 정한 때를 놓치겠느냐?”

말을 마치자 곧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월성을 치도록 명령했다.

비담의 추종자들이 일제히 군사를 일으켜 월성으로 진격해 들어가자

월성의 군사들은 두려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싸움이야 며칠째 하던 것이었지만 월성 군사들이 두려워한 것

역시 자신들의 진중에 떨어진 유성이었다.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은 군주나 큰 장수가 해를 당할 조짐이다.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김유신 장군이 위험할 것이다.”

별이 떨어질 때부터 이런 소문이 횡행하자 월성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보름날 밤, 월성 군사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맞서는 곳마다 크게 무너졌다.

대인과 여운이 기세를 올리며 밤새 두들긴 양측의 격전지에서 맥없이 죽어나간

월성 군사는 무릇 수백 명, 김유신과 알천은 무기를 들고 싸움판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가장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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