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9
얘기를 듣고 난 알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도당들을 궤멸시키고 싶지만
그렇게 서두르다간 과거의 내란을 다시 겪을까 두렵네.
무리 없이 일을 진압하자면 시일을 두고 저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옳네.”
“우선 나리께서는 궐 밖에서 대책을 강구하십시오.
그런 다음 정무가 시작되는 열엿샛날까지 기다리셨다가 화백을 열어
비담을 추대하는 것처럼 꾸미고 따로 우지암에 복병을 숨겨 불시에 사로잡는다면
난은 수월히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 그때까지 대감이 저들과 행동을 같이해주시겠나?”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궐은 제가 맡겠습니다.
오히려 발을 빼면 의심을 살 수도 있거니와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그때그때 사람을 보내 기별을 하겠나이다.”
“고맙네. 계림의 사직이 그대에게 큰 신세를 지네.”
의논을 마친 두 사람은 헛간에서 헤어져 각자의 길로 갔다.
“알천은 만나보았소?”
천존이 돌아오자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염종이 물었다.
“일이 잘되었으니 안심하십시오.”
천존은 태연히 대답했다.
“여주가 죽은 것을 말했는데도 알천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단 게요?”
여운도 석연찮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임금을 시해한 사람은 그대라고 했네.”
천존이 여운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여운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얘기가 다르지 않소? 어찌하여 공은 나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거짓말을 한단 말씀이오?”
“어쩌다가 보니 얘기가 그렇게 됐네. 미안하이.”
“허, 이게 어디 미안하단 말로 해결될 일이오?
자칫하면 나 혼자 모든 걸 뒤집어쓸 판이오!
공이 평소 나한테 감정이 없었다면 왜 하필 나를 찍어 시해범으로 몬단 말이오?”
여운은 화를 불같이 내며 천존에게 대들었다.
“염종공과 공이 모든 일을 다 뒤집어쓰기로 하고 가지 않았소?”
“그랬지.”
“한데 왜 갑자기 얘기가 달라졌소?”
“딱도 하이.”
천존은 얼굴이 시뻘개서 달려드는 여운을 책망하듯 말했다.
“자네도 머리가 있거든 생각해보게.
저기 염종공은 화백이 열리면 참석할 조정의 어른일세.
그런 염종공이 임금을 시해했다면 무사히 우지암에 갈 수 있겠는가?
그럼 또 다른 누군가가 염종공을 대신해서 참석할 테고,
화백은 만장일치가 아니면 불가이니
어떻게든 상신을 추대해야 하는 우리로선 그만큼 손해가 아니겠나?”
“틀림없는 얘길세. 잘하셨네!”
염종은 천존의 설명을 듣자 기뻐서 소리쳤지만 당자인 여운은 형편이 달랐다.
“그렇다면 공은 왜 달아나는 게요?”
“낸들 달아나고 싶어 달아났겠는가?
알천공을 설득하려다 보니 내가 여주를 죽였다고 말하는 게 아무래도 면이 서지 않았네.
만일 자네가 알천공이라면 임금을 시해한 장본인이 나타나서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겠는가?”
“아무렴. 그게 어려운 얘기지.”
염종이 천존을 두둔하며 여운을 달랬다.
“공이 이해를 하게나. 내가 들어보니 천존공의 딱한 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아는 마당인데 무슨 걱정할 일이 있는가?
상신이 보위에 오르기만 하면 자네는 오히려 그 일로 문벌이 더 높아질 것일세.”
그래도 여운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한참을 씩씩거렸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알천공을 설득하러 갈 걸 그랬소.
분명히 말해두거니와 나중에 가서 딴말이 나온다면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테니 그리들 아시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신년 정초 조상 제사를 지내려고 거칠산군 본향에 내려갔던 삼도(三徒) 대감 필탄(弼呑)이
열흘날부터 소임을 보려고 아흐렛날 저녁에 금성에 돌아오니
시위부 당번 군사의 아내 몇 사람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리, 저희 남편이 엊그제서부터 집에를 오지 않습니다.”
“대궐에 가도 이상한 군사들이 가로막고 들여보내지 않으니 무슨 일이 났는지 궁금합니다.”
하고 다투어 말했다.
영문을 알지 못한 필탄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곧 찬간자를 타고 대궐로 향했다.
그가 궐문 앞에 당도하자 과연 낯선 군사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뉘시오?”
하고 물었다.
필탄이 기가 막혀,
“이놈들아, 내가 물을 소리를 어째 너희가 묻느냐? 너희들은 죄 뭣하는 자들이냐?”
버럭 고함을 치니 필탄을 알아본 군사 하나가 쪼르르 안으로 달려가
염종에게 사실을 알리고 처분을 구했다.
이때 대궐의 방비는 비담의 사병과 병부 소속 여운의 부하들이 맡고 있었는데,
염종이 여운에게 필탄이 왔음을 알리자 여운이 직접 칼을 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여운을 본 필탄이 깜짝 놀라며,
“대감이 어인 일이오?”
하니 여운이 웃으며,
“그럴 일이 좀 있어 내가 공의 수고로움을 대신하고 있소.”
하고서,
“며칠 뒤면 모든 것이 다 밝혀질 것이니 궁금하겠지만 공은 집으로 가서 푹 쉬기나 하시오.”
하고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순간 필탄은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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