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20
“며칠 뒤에 밝힐 일을 오늘 말하지 못할 까닭이 있소?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하시오.
대감이 여긴 웬일이고 내 부하들은 모다 어디로 갔소?”
필탄의 언성이 높아지자 여운도 덩달아 말투가 곱지 않았다.
“사정이 있다지 않는가?
기다리면 될 일을 자꾸 꼬치꼬치 묻지 말게. 서로가 피곤할 뿐이니까!”
“좋소. 그럼 내 부하들만이라도 돌려주시오.”
사태가 험악해지자 필탄이 한발 물러서며 말했지만 여운은 그 부탁마저도 들어줄 형편이 아니었다.
시위부 당번 군사들은 비담이 여주를 살해하던 날 이미 태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몇 사람도 말이 퍼질 것을 우려해 모조리 궐옥에 가둬놓고 있던 터였다.
“그것도 며칠 뒤에는 다 명백해질 것이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오.”
여운이 다시 점잖게 권했지만 필탄은 왈칵 욱기가 치밀었다.
“보자보자 하니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어서 내 부하들을 데려오지 못하겠느냐?”
필탄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자 여운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놈이 어디서 행패를 부리느냐? 돌아가지 않으면 당장 목을 칠 것이다!”
여운은 칼까지 뽑아 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본 필탄은 이제 부하들의 안부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향 제사에 쓸 제물(祭物)까지 손수 챙겨주며 천천히 잘 다녀오라고 말하던
여주의 환히 웃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희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느냐? 주상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필탄도 말안장에 걸어놓았던 70근짜리 백련검(百練劍)을 뽑아 들었다.
시초만 해도 여주라고 무시했던 필탄이었지만 이때는 근신(近臣)의 정이 깊어져서
누구보다 충직한 신하가 되어 있었다.
“시끄럽다, 이놈!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라!”
여운의 맞고함과 함께 두 장수는 이내 칼과 칼을 휘두르며 한덩어리로 어울렸다.
푸른 찬간자를 타고 황종 장군 거칠부가 쓰던 전설의 백련검을 작대기처럼 가볍게 놀려대는
필탄의 무예는 이미 계림의 무인들 사이에 정평이 난 것이었으나 병부에서 오랫동안
맹졸들을 가르쳐온 여운의 무예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두 장수는 궐문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자랑하며 30여 합 이상을 겨루었다.
이 소식은 이내 염종의 귀에 들어갔고, 염종은 잘 익어가는 밥에 코가 빠질까 우려하여
궐내에 함께 있던 천존을 불렀다.
“삼도대감이 와서 여운과 박이 터지게 싸운다고 하니 대감이 한번 나가보는 게 어떻소?
가능하면 필탄을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지만 사정이 정 어려우면 죽여야지 별수 있겠소?
예상치 못한 괴변이 생길까 두렵소이다.”
천존은 필탄이 왔다는 말에 내심 크게 당황했다.
그는 쏜살같이 말을 타고 두 장수가 싸우는 궐문 앞으로 달려갔다.
“삼도대감은 잠시 내 말을 들으시오!”
천존이 소리치자 필탄은 노여움에 가득 찬 험상궂은 얼굴로 천존을 돌아보았다.
“오호라, 네놈도 한패로구나!
이놈아, 너는 미천한 가야인을 뽑아 병부의 대감직까지 맡겼거늘
하해 같은 성은도 모르고 반역에 가담했더란 말이냐?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이놈!”
이미 참변이 났음을 직감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있던 필탄은 천존을 보자마자 더욱 격분했다.
그는 천존이 더 이상 변명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칼날을 세워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보시오, 대감! 잠시만 기다리시오!”
천존이 말머리를 잡아채며 달아나면서 일변으론 양팔을 휘저으며 무슨 눈치를 주려고 애쓰는데
필탄의 명마 찬간자가 어느새 앞을 가로막았다.
“네 이놈!”
격노한 필탄의 칼날이 무서운 기세로 허공을 갈랐다.
그때까지 칼을 잡지 않았던 천존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공격을 피했지만
후려치는 칼끝에 그만 왼쪽 어깨를 베이고 말았다.
천존이 비명을 지르며 말등에서 굴러 떨어지자
여운이 칼을 고쳐 잡고 뒤에서 필탄을 공격했다.
그사이 천존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말을 붙잡았다.
그는 선불 맞은 범처럼 날뛰는 필탄을 진정시키려면 부득불 무기를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칼에 베인 어깻죽지에서는 피가 콸콸 쏟아져 금세 웃옷과 허리춤을 붉게 물들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칼을 찾아 들었다.
여운은 필탄의 백련검 공격을 막아내느라 허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가빴다.
그럴 때 천존이 칼을 쥐고 말을 달리며 여운에게서 필탄을 떼어놓았다.
땅을 박차고 솟아오른 두 마리의 말이 잠시 허공에서 스치는 순간,
천존은 칼을 쥔 필탄의 손목을 자신의 칼등으로 힘껏 내리쳤다.
일순 무게 70근짜리 백련검이 하늘로 높이 솟구쳤고 필탄은 놓친 칼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다
그만 중심을 잃고 찬간자에서 굴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굴러 떨어진 장소가 여운의 코앞이었다.
천존은 필탄이 말에서 떨어져 여운의 앞으로 굴러갈 때 이미 사태를 직감했다.
그는 벼락같이 고함을 지르며 여운을 만류했으나
그 소리는 여운의 고함소리와 뒤를 이은 필탄의 비명소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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