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7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리며 15년간 신라를 다스려온 여주 덕만은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사촌 아우의 손에 그만 유명을 달리하니 이때가 정미년 정월 초파일,
백정 진평왕(眞平王)에 이어 부녀(父女)의 마지막이 다 같이 골육상잔에 희생된 기구한 참변이었다.
임금을 살해한 비담은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내관까지 닥치는 대로 찔러 죽이고 대궐을 장악했지만
소문이 금방 나지는 않았다.
정사를 보지 않는 정초의 휴가철인 데다 여왕이 들어선 뒤로는 후궁들의 거처마저 휑하니 비어서
밤이나 명절같이 인적이 드문 때에는 궐에 적요함의 도를 넘어 괴괴함마저 감돌 정도였다.
일부에서는 국운이 시들고 사직이 쇠락하는 조짐 가운데 하나로 바로 이 점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여주와 내신을 살해한 비담은 곧바로 염종을 비롯한 자신의 추종자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병부를 장악할 계책을 세웠다.
그는 백반의 실패를 거울삼아 사가의 사병들을 동원해 대궁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병부령 알천은 여주의 신망이 두터웠던 자입니다.
그러나 병부대감 여운(如芸)과 천존(天存)은 여주의 정사를 불만하던 자들이라
잘 구슬리면 능히 나리를 섬길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병부는 하나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염종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비담의 충복 염종은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물러났다가 비담이
상대등에 오른 뒤 관직에 복귀하여 조부(調府)의 일을 맡고 있었다.
비담은 밤중에 은밀히 사람을 보내 여운과 천존을 급히 대궐로 불러들였다.
전조의 난신 칠숙을 도와 반역을 도모했던 석품의 맏이 여운은 처음에
이를 한탄하여 절에 들어가 중이 되고자 했으나
그의 남다른 재주와 뛰어난 무인의 자질을 아까워한 김유신이 병부에 강력히 천거하여
10정(十停)의 맹졸들만 뽑아서 가르치게 하였다.
“죄인의 아들로 이만하면 감지덕지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여운이 시초에는 벼슬도 없고 관직도 없이 다만 말 타고 창칼 쓰는 법을
제군들에게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만 그 세월이 10년에 가까운 데다
옛날 상수관에서 동고동락하던 진춘(陳春)과 수승(守勝),
심지어 나이 어린 진주(眞珠)와 품일(品日)마저도 벼슬을 얻어 지위가 높아지자
어느 때부터인가 여주는 군국사무를 잘 보살피지 못한다고 힐난하기 시작했다.
알천이 병부령이 된 뒤 여운의 불만하는 소리를 듣고 김유신과 상의하여 병부제감을 맡겼다가
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떠날 때 임금의 윤허를 얻어 내마 벼슬에 대감직을 잇게 함으로써
여운의 불만을 다스렸다.
여운이 비담의 밀사를 따라 대궐에 이르러 여주가 살해된 소식을 듣자
소스라치게 놀라 안색이 변하였는데, 비담이 그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으며,
“그대는 누가 뭐래도 충신의 아들이지만 천하에 이를 아는 사람은 오직 내가 있을 뿐이다.
이제 여주는 죽고 보위를 이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그대는 마땅히 나를 도와 세상을 바로잡고 동시에 역적으로 몰린 그대 선친의 명예도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회유하니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았던 여운은 홀연 눈물을 뚝뚝 떨구며,
“충효의 길이 둘이 아님을 이제야 알겠나이다.
신이 비록 용렬하오나 사력을 다해 거사를 돕겠습니다.”
하고 충성을 맹세한 뒤 자신의 절도에 놓인 병부 군사들을 소집하러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명활성 성문 밖에 집이 있던 천존은 여운이 떠나고 나서야 궐에 도착했다.
그 역시 여운과 마찬가지로 내전에 이르러 여주 대신 비담을 만나고서야 변고가 났음을 알았다.
“보시게, 천존!”
비담은 놀란 천존을 덥석 끌어안았다.
같은 병부의 대감이었지만 여운과 천존의 명성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김유신과 함께 가야인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던 천존을 비담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지켜줄 천하 제일의 장수로 점찍고 호시탐탐 눈독을 들여오고 있던 터였다.
“나는 일찍이 자네의 무예가 알천이나 김유신보다도 오히려 한 수 위라고 들었네.
그런데 여주는 장수를 보는 눈이 어둡고 군사(軍事)를 잘 알지 못해 그들보다 아래에 두었으니
이는 여주가 천하의 명장을 대접하는 법을 몰랐거나 혹은 그대가 가야인이라고 멸시했기 때문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늙은 여자가 규방을 나와 국사를 마음대로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계림에만 있는 일로, 가히 난세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사직의 근본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비조즉석(非朝則夕)의 일일세.
하니 나를 좀 도와주시게. 계림의 만년 사직이 그대의 손끝에 달렸네.”
비담이 통사정을 하자 천존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염종이 다가와 그런 천존의 어깨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나리께서 보위에 오르시면 자네는 물론 모든 가야 출신들에게 신라인과 차별 없이
벼슬길을 열어줄 생각일세.
국법을 고쳐 골품제를 손질하고 재주가 뛰어난 자는 비록 범골이라도 고을을 맡겨 다스리게 한다면
쇠잔한 국력이 되살아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그 선봉이 되어주시게.
자네가 우리와 생사를 같이한다면 가야인 모두가 대문을 박차고 거리로 달려나와 기뻐할 것일세.”
그러자 천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저도 서경(書經)에 나오는 빈계지신(牝鷄之晨:암탉이 새벽을 알린다)의 경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저의 지위는 고작해야 병부의 한 대감일 뿐이요,
그조차도 휘하의 군사를 움직이려면 알천공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먼저 알천공과 상의하심이 옳지 않겠는지요?”
“알천은 우리와 뜻이 다를 걸세.”
비담이 단언했다.
“알천과 춘추, 김유신, 이렇게 세 사람은 여주의 근신일세.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우리편에 가담하지 않을 게 틀림없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천존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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