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4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는 동안 백제에서도 군사를 일으켜 신라 서쪽의 변방 7성을 공격했다.
당의 간섭만 없다면 언제든 신라를 쳐서 남역 전체를 아우르고 싶던 의자가 그런 호기를 놓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의자왕은 김유신에게 당한 일로 이를 갈고 있던 터였다.
그는 상좌평 성충을 불러 이 기회에 신라를 치라는 영을 내렸는데,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약간 묘한 데가 있었다.
“전에 선왕께서는 그대를 일컬어 동량재, 포기재라 찬하셨고,
개보공과 도인 백파를 비롯한 많은 이가 그대의 재주를 가리켜 침이 마르도록 극찬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과인이 즉위한 지 어언 다섯 해가 지나갔건만 내 기억이 희미해서 그런지 아직 그대의
특별한 재주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백제 17대 임금의 상좌평 여신(餘信)은 재상이 되자 왜국을 평정하여 사직에 공을 세웠고,
백제 19대 임금의 해수(解須:2대 상좌평)는 송(宋)나라에 통하고 동진(東晉)에 위엄을 떨쳐
국사를 편안히 보좌하였다.
과인은 그대가 여신이나 해수에 견주어 결코 뒤떨어지는 인물이라곤 믿고 싶지 않다.
만인이 극찬하는 그대의 재주라면 신라는 물론 고구려까지 토벌하여 짐의 당대에 삼한이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 당나라는 고구려와 싸우느라 다른 일에는 한눈을 팔 겨를이 없다.
하니 어떤가? 차제에 김유신이 날뛰는 신라를 쳐서 과인을 기쁘게 해주지 않겠는가?
짐은 이제쯤 입과 귀를 통해서만 들어온 그대의 재주를 눈으로 한번 구경해보고 싶구나.”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임금과 성충 사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의자왕 즉위 이후 암암리에 갈등과 마찰을 빚어온 두 사람의 관계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이후
차츰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당이 고구려를 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의자가 당주에게
금휴개와 문개를 바치려 하자 성충이 동맹국의 예(禮)를 들어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마침내 표면으로 불거지고 말았다.
성충은 비록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 일에 처음부터 반대를 했던 사람이지만
기왕 동맹을 맺은 마당이면 오히려 고구려에 원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당이 고구려를 멸할지도 모른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으므로 원조를 하려면
마땅히 당나라에 원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불가한 일이옵니다.
맹약문에 서명한 먹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터에 동맹국의 의리를 저버린다면
뉘라서 우리 백제의 외교를 믿겠나이까?
더구나 고구려의 막리지는 그 스스로가 병법에 해박하고 용병에도 뛰어난 인물일뿐더러
요동은 지세가 험하고 성곽이 우람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는 곳입니다.
기왕 고구려와 함께 가기로 맹세한 마당이라면 마땅히 막리지를 도와 당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충은 연일 의자를 찾아가 항소에 항소를 거듭했으나 오히려 임금으로부터 핀잔만 들었다.
“천하를 제압한 당나라다.
그대는 혹시 당나라를 수나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선왕께서도 당나라의 뜻을 거역하고 맞서다가 결국에는 후회하는 유조를 남기셨다.
정세를 읽는 눈이 그렇게도 어두워서야 어찌 일국의 재상이라고 하겠는가?”
심지어 의자는 성충을 향해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된 자가 사사건건 짐의 말에 거역만 하는가?
네가 임금이더냐?
어떻게든 제왕의 왕업을 보필하고 군주의 뜻을 받들 궁리는 하지 않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대뜸 치받기부터 하니 나는 고금동서에 너와 같은 신하가 있다는 말을 아직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물러가라!”
임금이 성충을 미워하는 기색이 분명해지자
의직(義直)과 임자(任子)를 비롯한 몇몇 신하들은 성충에게 대임을 맡겨 그를 시험해볼 것을
왕에게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성충으로 하여금 신라를 치라는 것이었다.
성충에게는 관직이 걸린 막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왕명이 떨어진 그날 밤, 흥수가 자못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성충의 집을 찾아왔다.
“자네를 죽이려는 것일세. 물론 자네도 알고는 있을 테지?”
흥수가 묻는 말에 성충은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를 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정사가 광명정대의 길로 나가지 아니하고
자꾸 얄팍하고 어두운 곳으로만 숨어들려 하니 그것이 걱정일세.
수(隋)가 망한 것은 세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군주가 용맹하지 못해서도 아니네.
어제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동맹을 맺고, 오늘엔 또 그렇게 맺은 동맹을 스스로 반복한다면
세상의 민심을 잃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자고로 군대의 힘은 군주의 대의(大義)와 정의로움에서 나오는 법이거늘,
계책을 쓰고 지략을 짜내어 변방의 몇 성을 얻어 온다 한들 그것이 천하대사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아직 때가 이르지 않나?
백제 조정에 자네마저 없다면 그것이 정작 낭패일세.
우선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세나.”
“자네는 이번에 당나라에 실어 보낸 수천 벌의 갑주 가운데
유독 금휴개가 한 벌 들어가 있는 뜻을 아는가?”
“글쎄…… 당주 몫의 선물이라고 들었네만.”
흥수가 고개를 젓자 성충이 다시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이 바로 양다리를 걸치려는 우리 외교의 치졸함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세.
당주가 그것을 입지 않으면 그저 진상품일 뿐이지만 만일 전장에서
그 번쩍거리는 금휴개를 입는다면 십중팔구 고구려 군사들의 집중 공격을 받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당주가 그 저의를 모를 까닭이 없다는 사실일세.
당주는 잔꾀로 상대할 사람이 결코 아닌데도 성상은 이를 알지 못하네.
두고 보게나만 이번에 갑옷을 실어 보낸 건 무용함을 지나 오히려 국사에 해가 될 것이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은 일이 잘못되면 양쪽으로부터 다 신망을 잃는 법이 아니던가.”
“허, 그것을 기한에 맞춰 만드느라 우리 대장장이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실로 허무하기 짝이 없네.”
흥수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7장 안시성 16 (0) | 2014.11.08 |
---|---|
제27장 안시성 15 (0) | 2014.11.08 |
제27장 안시성 13 (0) | 2014.11.08 |
제27장 안시성 12 (0) | 2014.11.08 |
제27장 안시성 11 (0) | 2014.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