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1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을까.
이세민은 약간 한갓진 곳에 이르자 거가에서 내려 말로 바꿔 탔다.
그가 숨을 헐떡이며 요수 강물로 막 목을 축이고 났을 때였다.
“황제께서는 어느 길로 돌아가시려고 예까지 오셨소?”
어디선가 점잖게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세민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강변의 숲속에서 칼과 방패를 든 장수 하나가
웃음까지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측의 거리는 불과 30여 보, 장수의 등뒤에는 나뭇가지로 위장한 복병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는데 그 숫자가 정확히 얼마쯤 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일순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억누르고 느긋하게 반문하자 적장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나는 신성을 맡아 다스리는 고구려 장수로 이름은 양연보외다.
안시성 성주가 내 형님이오.”
이세민은 그가 양만춘의 아우라는 말에 더욱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종관들이 지켜보는 앞이었다.
“양공의 아우라면 우리가 요수를 건너가는 딱한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을 터,
어찌하여 앞을 가로막는가?
싸움은 끝났으니 궁한 적을 쫓는 것과 스스로 물러가는 적을 치는 것은 병가의 도리가 아닐세.”
그러자 장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나는 싸움이 끝났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소.
다만 우리 막리지로부터 요수 강변을 지키고 있다가 당주의 행차가 도착하면
안전한 곳으로 안내하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오.”
“그렇다면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하류로 내려가시오.”
“그것이 막리지의 뜻인가?”
“그렇소.”
“만일 내가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할 셈인가?”
“나는 군령을 따르는 장수일 뿐이오.
복종하지 않으면 칠 수밖에 더 있겠소?”
“이보게, 양공!”
이세민은 간곡한 음성으로 연보를 불렀다.
“우리는 안시성에서 이곳까지 오느라 참으로 혹독한 고생을 했다네.
다시 그 먼길을 돌아가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신성 앞의 용도를 내어주시게나. 부탁이네.”
체면을 벗어던진 황제의 간청에도 연보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소.
하류로 내려보내지 않으면 군령을 어긴 죄로 내가 목숨을 잃게 되오.
더구나 신성 앞의 용도는 끊어진 지 오래외다.
우리 막리지께서 요수 하류에서 요동의 장정들을 동원해 친히 다리를 놓고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그쪽으로 내려가시오.
그것이 피차를 위해 좋은 일이오.”
이세민은 무엇보다도 용도가 이미 끊어졌다는 말에 크게 낙담했다.
“막리지가 다리를 놓고 기다린다니 그게 정말인가?”
“그렇소.”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연보를 향해 공격하지 말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한 뒤 강의 하류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서 가자! 후군들에게도 기별하여 내가 도착할 때까지 제자리에서 기다리라고 일러라!”
연보에게 쫓긴 이세민은 서둘러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이적과 도종의 후군을 만나자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행렬을 정비한 뒤
스스로 앞에 나가 죽을 고생을 하며 처음 출발했던 요동성까지 행군했다.
그들이 요동성 앞에 당도할 무렵엔 설상가상 눈까지 흩날렸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린 군사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는 장수들의 호령도 무시하고
멋대로 가다 쉬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돌아올 때는 무려 닷새나 걸렸다.
길에서 병을 얻어 쓰러지거나 죽는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요동성 앞에 이르자 이세민은 염립덕을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올 때처럼 여기에 다리를 놓아야겠다.
연보는 하류로 가라고 했지만 그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만일 저들의 말을 듣고 하류로 갔다가 다시 계책에 휘말린다면 살아남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염립덕은 황제의 말을 옳다고 여겼지만 다 죽어가는 패잔병들을 동원해 다리를 건설할 일이
대걱정이었다.
“여기에 다시 다리를 놓자면 앞으로 한 달이 걸릴지 두 달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강변의 얕은 곳은 걸어서 건너고, 진흙이 쌓여 거마(車馬)가 통할 수 없는 곳은
길가의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와 충차를 동원해 다리로 삼는다면
늦어도 사흘이면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았다.”
이세민은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강변의 풀을 베어 진창을
메우도록 지시한 뒤 스스로도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역사(役事)를 도왔다.
포구에 말을 늘여 세우고 길을 메우는 동안 강풍이 불고 폭설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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