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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안시성 12

오늘의 쉼터 2014. 11. 8. 13:12

제27장 안시성 12

 

 

 

공사를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강의 하류로부터 갑자기 수천 명의 군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당군들은 일제히 일손을 놓고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낙담을 하기로는 이세민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군사들에 섞여 수레 뒤로 몸을 숨겼다.

장손무기가 홀로 말을 타고 나가 달려오는 적 앞에 버티고 섰다.

“멈춰라!”

무기는 뽑아든 칼자루를 고쳐 잡고 제법 위용을 갖춘 채 소리쳤다.

그러자 앞선 장수가 팔을 높이 들어 군사들을 멈추게 한 뒤 무기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무기가 보니 적장은 키가 작고 당찬 모습에 몸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찼는데,

그 기상이며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결코 예삿사람 같지 않았다.

“나는 황제의 근신으로 이름은 장손무기라 하오.

혹시 막리지가 아니시오?”

무기가 예우하여 묻자 적장은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명령하듯 말했다.

“황제께 나를 안내하라.

요동까지 와서 나를 보지도 않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적장의 말투에서 무기는 그가 막리지임을 간파했다.

“예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무기는 곧 말을 돌려 황제를 찾아갔다.

얘기를 전해 들은 이세민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몇몇 근신들이 안위를 걱정하며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오히려 밝은 표정을 지으며 신하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말라.

개소문이 직접 예까지 나왔다면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몰고 적장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갔다.

장손무기와 조삼량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황제를 좌우에서 호위했다.

“이게 누구시오? 요동 아우님이 아니시오?”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세민이 특유의 친근한 말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적장은 황제의 시선을 피하며 좌우의 두 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대들은 잠깐 자리를 비켜라. 이미 싸움은 할 만치 하지 않았는가?”

크지 않은 소리로 점잖게 말했지만 거기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두 장수가 황제를 쳐다보자 황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날 것을 지시했다.

그들이 10여 보 걸음을 물리고서야 적장은 비로소

황제에게 눈길을 보내고 희미한 웃음과 가벼운 목례로 화답했다.

“형님께서는 천자의 귀하신 몸으로 이 무슨 고생이십니까?

요동의 강역이 그렇게도 궁금하시면 미리 저에게 기별을 주시지요.

그럼 만 대의 수레를 내어서라도 도성까지 모셔가서 좋은 구경과 산해진미를 대접했을 게 아닙니까?

옛정을 생각하면 실로 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개소문의 푸념에 이세민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또한 화려한 언사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던 인물이었다.

“나는 아우님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불시에 찾아왔더니

요동의 관수들이 이렇게까지 기를 쓰고 막아설 줄은 차마 몰랐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우님 말씀대로 기별을 하고 올 걸 그랬지. 다음부턴 꼭 그럼세.”

“하면 훗날에 다시 오시겠는지요?”

개소문이 웃음기를 거두며 묻자 이세민이 짐짓 소리를 높여 껄껄 웃었다.

“이런 대접을 받고 가서 다시 올 리 있겠소.

불시에 오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 아우님은 과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자 개소문은 말을 움직여 이세민의 앞으로 가깝게 다가왔다.

3, 4보를 격하고 있던 두 사람이 손을 내밀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호탕하게 웃던 이세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장손무기와 조삼량도 바짝 긴장해 자칫하면 달려나갈 태세를 취했다.

개소문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형님께 서운한 일이 꼭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별 없이 오신 것이고,

둘째는 우리 백성들을 많이 상하게 한 것이며,

셋째는 저의 호의를 끝까지 마다하신 것입니다.

저는 형님께서 가시는 길을 전송하려고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안시성 남쪽에 다리까지 놓게 하고 기다렸는데 형님께서는 이를 알고도

가시는 순간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이렇게 자청하여 고생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형님의 마음은 제 마음과 같지 않음이 틀림없습니다.

저 역시 형님 마음을 의심하기로 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창칼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저 지친 군사들을 원 없이 두들겨 모조리 요수에 수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형님을 말 아래 꿇어앉히고 평생 잊지 못할 대욕(大辱)과 수모를 준들

누가 감히 나서서 이를 말리겠습니까?

죽은 원길을 생각하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듭니다.”

개소문이 말을 멈추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세민을 바라보았다.

순간 오싹한 느낌에 사로잡힌 이세민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의 입에선 더 이상 농담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장안에 있을 때 형님 집의 양식을 축낸 옛정을 생각해 이번만은 그냥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일만 명심하십시오.

하늘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언제 오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만일 다음번에 다시 오시면

결코 이번처럼 대접하지는 않겠습니다.

바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나왔습니다.”

이세민의 굳은 표정에 그제야 다시 안도감이 스쳤다.

그는 마상에서 다짜고짜 개소문의 손을 덥석 거머쥐었다.

“알겠소. 내 아우님의 당부와 이번에 받은 호의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소.

비록 잘못된 일이 많았으나 아우님이 너그럽게 용서하오.”

그는 감격한 나머지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고 말안장에 옭아맨 활을 풀었다.

“이것을 정표로 받아주면 고맙겠소.

궁복(弓服)을 드리는 것은 아우님 앞에서 두 번 다시 갑옷을 입고 활을 드는 일이 없을 거라는

약조이기도 하오.

부디 거절하지 말고 받아주시오.”

이때 이세민이 선물한 갑옷은 백제에서 바친 황금빛 금휴개였다.

개소문은 잠자코 그것들을 받아 말등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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