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3
“장안까지는 길이 멉니다. 조심해 가십시오.”
“고맙소. 아우님도 잘 계시오.”
“가시는 동안 우리 군사들이 형님의 군대를 전력을 다해 두들기지 않은 까닭을
깊이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개소문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세민도 덩달아 마상에서 허리를 굽혔다.
“막리지께서는 어찌하여 저것들을 그냥 돌려보내려 하십니까?”
개소문이 돌아와 철군할 것을 명령하자
오골성에서부터 군사를 이끌고 따라온 성주의 아들 고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요동성에서 상한 우리 군사가 2만이나 됩니다.
만일 구연(舊緣) 때문에 앞에 나서기 어려우시면 제게 맡겨주십시오.
한 놈도 남김없이 토벌하고 오겠나이다!”
신성에서 당군을 쫓아 내려온 고하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양도를 끊고 합류한 뇌음신과 온사문은 당군이 데려간 3성의 주민들만이라도 되찾아오겠다며
목청을 높였다.
“구연은 당주를 살려주는 명분일 뿐이다.
한낱 필요와 이익을 좇아 사귄 시도지교(市道之交)에 무슨 살뜰한 옛정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가 데려간 우리 주민들도 대부분은 농사조차 짓기 힘든 병든 늙은이와
항복한 자들의 식솔들이라고 들었다.
이미 당나라에 가서 살기를 자청한 무리라면 굳이 데리고 온들 피차 무슨 소득이 있겠느냐?
나는 다만 명년의 일을 걱정할 따름이다.”
장수들의 한결같은 주장에도 개소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당주를 죽이고 저 허약한 패잔병들을 토벌한다고 망할 당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참혹하게 짓밟아놓으면 명년에도 그 후년에도 요동은 대를 이어 시끄러워질 것이다.
난들 어찌 침략한 적을 살려 보내고 싶겠느냐?
그러나 이제 저들이 돌아가면 요동에서 당한 수모를 사방에 떠들고 다닐 게 분명하므로
한동안 국경은 조용해질 것이다.
우리는 아직 전조의 쇠약한 국세를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시간을 벌려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옳다.
싸움을 피하려면 상대의 위신도 어느 정도는 세워주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는 강변에 흩어진 당나라 잔병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주는 아마 두 번 다시 요수를 건너오지 않을 것이다.”
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자 당군들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이세민은 먼지를 일으키며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고구려 군사들을 바라보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위수의 치욕 이후 최대의 수치로다.
아아, 위징이 그립구나. 그가 살아만 있었어도 어떻게든 이 원정을 말렸을 것이다.”
사흘을 예상하고 시작한 공사는 무려 열흘이나 걸렸다.
궂은 날씨와 지친 군사들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요수를 건너자마자 이번엔 또 요택에 눈이 쌓여 한 발짝도 더 나갈 수가 없었다.
더구나 맨몸으로 물을 건넌 군사들은 축축한 습기와 한기가 골수에까지 사무쳐 하룻밤에도
다시 수백 명이 저절로 죽어갔다.
이세민은 마들가리를 주워 길에 불을 피우도록 명하고 공성(攻城) 기계와 수레,
심지어 자신의 거가까지 땔감으로 쓰면서 오로지 폭풍강설(暴風降雪)이 멎기만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패전의 치욕도 치욕이려니와 회군의 참상(慘狀)만도 이토록 뼈아팠다.
숱한 어려움과 고초를 겪고 당군이 장안으로 귀환한 것은 이듬해인 병오년(646년) 2월이었다.
환궁한 이세민은 요동 정벌에 나선 것을 깊이 후회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을 더 맹렬히 막지 않은
신하들을 책망했다.
“만약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러한 걸음걸이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지고 돌아온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시종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노장 이정을 가만히 따로 불러 물었다.
“약사(藥師:이정의 字)가 생각하기에 내가 천하의 대군을 거느리고서도 소이(小夷)에게
수모와 괴롭힘을 당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미 요동 정벌에 나섰던 여러 장수들로부터 대강의 일을 들어 알고 있던 이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병법을 잘 알기 때문에 중국이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군사들은 예로부터 지형지세를 잘 활용하고 용맹과 기량이 뛰어나
쉽게 상대할 무리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이번에 기병술(奇兵術)을 썼으나 이는 돌궐족을 토벌할 때나 유효했던 것이지
고구려와 같은 강적을 상대할 때는 정병술(正兵術)을 쓰는 것이 유리합니다.
정병술은 정도이며 기병술은 편법입니다.
정병술은 인의(仁義)에 해당하지만 기병술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므로 황제(黃帝) 이래로 병법은 정병술을 앞세우고 기병술을 뒤로하였습니다.
옛날에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일곱 번씩이나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정병술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왕 기병술을 쓰셨다면 앞서 도종의 방법대로 하시는 것이 옳았을 것입니다.”
“도종의 방법이라니?”
황제가 얼른 그 뜻을 알지 못해 반문하자 이정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도종이 주필에 있을 때 고구려의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을 치자는 말씀을
자세히 아뢰었다고 들었나이다.
신이 생각하기엔 그렇게 했다면 아마 승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병가의 달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노장의 설명을 듣고 다시 한 번 크게 탄식했다.
“당시에는 사정이 워낙 급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다.”
한편 북부 욕살 고연수는 당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항복한 것을 후회하고 탄식하다가
근심이 깊어져서 병을 얻어 죽었고, 남부 욕살 고혜진만 패군을 따라 무사히 장안까지 건너갔다.
이세민은 환궁한 뒤에 눈의 상처가 덧나 몇 달을 극렬하게 앓았다.
종군한 어의가 환부를 완전하게 치료하지 못한 데다 요동에서 워낙 추위로 고생이 심해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었다.
그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어 급기야 태자(당고종 이치)가 정사를 돌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근신들은 황제의 병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국치(國恥)라고 여겨 지병인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된 것이라고 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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