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0
험한 욕설로 며칠 밤을 잠 못 이루게 괴롭혔던 안시성 사람들,
하물며 안대로 가린 왼쪽 눈은 아직도 흉할 정도로 퉁퉁 부어 가라앉지 않은 상태가 아니던가.
“신하로서 제 나라의 임금과 백성을 충성을 다해 섬기는 것은 언제 보아도 장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안시성 성주는 성을 견고하게 수비하여 끝까지 신하된 자의 지조를 지켰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으랴.
이제 싸움이 끝나고 돌아가는 마당이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어루만지는 것은 천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너는 안시성을 방문하여 성주를 포상하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임금을 잘 섬기라는 짐의 뜻을 전하라.”
패전의 수모를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었으나 퇴각하는 당나라 군사들은
황제의 대범함과 영웅다운 풍모에서 그나마 크게 위안을 얻었다.
“요수를 건너는 데는 상중하(上中下)의 세 길이 있습니다.
어디로 건너시려는지요?”
요동성에 당도한 이세민에게 이적이 물었다.
길은 요동성에서 마수산을 거쳐 도강하는 중류 쪽이 제일 가까웠지만
이세민은 요택의 진창에서 고생한 일이 떠올라 상을 찌푸렸다.
필승의 배수진을 치기 위해 건너온 다리마저 스스로 철거한 일이 비로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황제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자 이적이 말했다.
“제가 건너온 신성 앞의 상류는 강폭도 좁을뿐더러 가시덤불과 목책으로
위장한 용도(甬道)가 있어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는 무사히 요서의 통정진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쪽으로 건너가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러나 이적이 말한 길로 가자면 우선은 요동성에서 신성까지의 거리가 만만찮았고,
요수를 건넌 다음에도 갑절이나 되는 길을 돌아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허기와 추위에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굳이 그 먼 길을 가야 한단 말인가……”
이세민은 탐탁찮은 기색으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하류로 갈수록 강폭이 넓어져 도강이 어렵고,
다시 다리를 놓는다 해도 어차피 날짜와 공역은 그만큼 들어야 하니
차라리 돌아서라도 가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하왕 도종도 이적의 의견을 좇아 북쪽으로 갈 것을 권했다.
“요동에서 시일을 끄는 것은 그만큼 불리합니다.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었지만 만일 적이 후미를 들이친다면 사정이 더 어려워지지 않겠나이까?”
이세민은 이적과 도종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그들 두 장수에게 보기(步騎) 4만을 거느리게 하여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선두엔 조삼량이 고구려 포로를 앞세우고 갔으니 걱정할 게 없다.
그대들은 맨 뒤에서 아군의 후미를 엄중히 보호하라.”
고구려 주민 7만여 명을 앞세우고 요동성을 출발한 당군은 사흘 뒤에야
신성 근처의 요수 상류에 당도했다.
날씨는 하루하루가 달랐다.
발톱을 세우고 맹호같이 달려드는 요동의 사나운 북풍을 헤치고 천근이나 되는 발걸음을 옮기느라
패군들의 피로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이세민은 어의를 세 벌이나 껴입고 백제로부터 받은 금휴개까지 걸치고서도 추위를 견디지 못해
수시로 아래턱을 덜덜 떨어댔다.
아물지 않은 눈의 상처도 찬바람을 맞자 더욱 욱신거렸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은 고구려 군사가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고행 끝에 마침내 탕탕하게 흐르는 요수를 대하는 순간,
이세민은 갑자기 사지에 맥이 풀렸다.
이제 저것만 건너가면 자신이 다스리는 땅.
장안을 떠난 지난 1년간의 숱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는 거가를 호위하는 종관들을 내려다보고 말했다.
“내가 막리지를 잘못 본 게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그는 비록 군주를 시해하고 대신들을 죽였지만 민심을 잃지는 않았다.
만일 민심을 잃었다면 어찌 휘하에 양만춘과 같은 인물이 있을 것이며,
이르는 곳마다 관수와 성민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우리와 싸우려 하겠는가?
민심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충신이다.
둘째로 그는 소문만큼 매정한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고요한 요수 강변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아라. 만일 저런 곳에 복병을 숨기고 기다렸다가 우리를 친다면 얼마나 크게 낭패를 보겠느냐?
그가 우리를 고이 보내주는 것은 나와 맺은 옛정 때문임이 틀림없다.
옛정을 기억하는 자를 어찌 매정하다 할 수 있겠느냐?”
이세민은 무사히 요수에 다다르자 안도감이 지나쳐 미리 맥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럴 때였다.
갑자기 행차의 앞쪽에서 자욱하게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한패의 군마가 나타났다.
“이세민은 어디 있느냐?
고구려 장수 고선이 요동성의 치욕을 갚아주려고 칼을 갈며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앞장선 장수가 큰 소리로 외치자
뒤따르던 군사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르며 먹이를 본 야수 떼처럼 거가를 향해 돌진해왔다.
이세민은 혼비백산하여 종관들에게 지시했다.
“어서 거가를 돌리고 고구려 주민들을 동원해 앞을 가로막아라!”
그는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 한참을 달아났다.
그 바람에 거가를 뒤따르던 패군의 행렬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쪽을 기웃거리는 자들 틈에서 영문도 모르고
황제를 따라 달아나는 자들이 저희끼리 발에 걸려 넘어지고 쓰러지느라
강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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