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8
바위가 날아가 안시성의 성벽과 보루를 파괴하자
성안에서는 미리 만들어둔 목책을 들고 나와 급히 허물어진 곳을 막았다.
동시에 보루에서도 흙산 정상으로 바위들이 날아들었다.
저쪽에는 목책이라도 있었지만 급조한 도종의 군영은 돌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성벽을 부수지 않는 한 안시성은 공략할 방법이 없었다.
성 밑에서는 황제까지 나서서 기세를 올리며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씩 교전했지만
날아오는 시석을 피하기에만 급급할 뿐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은 안시성 사람들이
어딘지 모르게 전력을 기울여 싸우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이적이나 장손무기가 군사들을 이끌고 성문 가까이 진격했을 때도 위에서 날아오는
시석은 엄포용에 불과할 뿐 사람을 겨냥하지 않았고,
바위를 굴려 접근을 막을 때도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 의외로 사상자가 적었다.
그렇다고 재주가 없거나 능력이 부족해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성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자들에겐 표창이나 화살이 가차없이 날아와 숨통을 정확히 끊어버리곤 했다.
며칠간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나자 이세민은 심각한 의문에 휩싸였다.
“이상하구나. 저들은 마치 한쪽 수족을 접고 우리와 싸우는 것 같아서 과히 기분이 좋지 않다.”
황제의 말에 이적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이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추위와 배고픔에 못 이겨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안시성 성주는 과연 고도의 지략가다.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한데 이튿날 전장에서 실로 섬뜩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세민이 몸소 한 패의 군사를 이끌고 남문 앞에 파놓은 해자를 막 건너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성루에서 화살 한 개가 날아왔다.
화살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말에 탄 이세민의 왼쪽 눈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목교에 박혔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눈을 감싸쥔 손가락 사이에서 피가 그칠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놀란 군사들은 황급히 황제를 조당으로 이송하고 의원을 불렀다.
살촉은 눈두덩을 예리하게 스쳤을 뿐이어서 당장에 실명(失明)은 면했으나 돌이켜보면
참으로 섬뜩한 일이었다.
의원은 상처에 약을 발라 피를 멎게 하고 약초로 안대를 만들어 붙여주면서
당분간 움직이지 말 것을 권고했다.
소문을 들은 장수들이 서둘러 조당으로 달려오자
이세민은 퉁퉁 부어오른 눈을 고통스럽게 매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게 화살을 쏜 자는 관복을 보건대 틀림없이 안시성 성주다.
내가 화살에 맞아 쓰러진 뒤 그는 성루에서 나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의 의도는 이제 명확해졌다.”
황제가 화살에 눈을 다친 뒤로 당군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도종은 황제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병영의 일을 과의 부복애에게 맡긴 뒤
잠시 조당으로 내려와 있었는데,
그사이에 복애는 배고픔에 못 이긴 부하들의 요청으로 군마 한 마리를 잡아먹느라
사사로이 병영을 떠났다.
그는 도종이 오기 전에 일을 마무리짓느라 말을 잡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들 실컷 먹어라. 먹어야 기운을 쓸 게 아니냐!”
잠시 휴전한 사이를 틈타 딴에는 휘하의 부하들을 위한답시고 한 짓이었으나
재수가 없으려면 일은 하필 그럴 때 생기는 법이었다.
복애와 편장 몇 명이 후미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오랜만에 보는 말고기 몇 점을
정신없이 뜯어먹고 났을 때였다.
“큰일났습니다, 장군! 적이 우리 성첩(城堞)을 파괴하고 흙산 위에까지 올라왔습니다!”
사졸들이 도망가며 소리치는 말에 복애는 먹던 말고기를 토해낼 만큼 크게 놀랐다.
“적이 어떻게 흙산 위에까지 올라왔단 말이냐?”
그는 달아나는 군사를 붙잡고 물었다.
“성토한 흙산 한쪽이 무너져 적성을 덮쳤는데,
적이 그 무너진 곳으로 쏜살같이 군사를 내어 산마루를 빼앗고
불을 지른 짚더미를 공처럼 말아 굴리고 있습니다!”
혼비백산한 부복애가 달아나는 군사들을 헤치고 산마루 병영으로 달려갔으나
과연 적군은 사람 키만큼 짚을 말고 불을 붙여 사방으로 굴려대는 바람에 접근조차 어려웠다.
수백 개의 군막이 불에 타고 미처 불덩이를 피하지 못한 군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흙벽으로 굴러 떨어졌다.
흙산의 사면 비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승패를 떠나 수십만이 한철 내내 뼈를 깎는 공역으로 이룩한 진지가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렸으니 그 허탈함과 치욕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병석에 누웠다가 비보를 접한 이세민은 격분한 나머지 우레 같은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다.
의원과 종관들이 다리를 붙잡으며 고정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머리 끝까지 치민 분노로 치를 떨었다.
“부복애를 참형하고 군마를 잡아먹은 놈들도 모조리 잡아죽여라!”
격노한 황제가 조당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그 서슬에 상처가 다시 터지고 안대 밑으론 피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 장수들은 죽을 각오로 싸워 토산을 되찾아라!
토산을 찾지 않는 한 짐은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에 장수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사를 동원해 흙산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으며 분전했지만 산을 점거한 적은 석공과 화공을 번갈아 쓰며
얄미울 정도로 방비를 잘해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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