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3
“신에게 역부들을 내어주시면 밤낮 쉬지 않고 또 한 번 흙산(土山)을 쌓아보겠습니다.”
“마땅한 장소가 있던가?”
“안시성 동남쪽 한구석에 적당한 장소가 있는 것을 염립덕과 같이 가서 보고 오는 길입니다.”
흙산을 쌓으려면 여러 날이 걸려야 하므로 시일이 촉박한 이세민으로선
그리 흔쾌한 제안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묘책도 없었다.
방법이 있다면 모두 써보는 것만이 유일한 묘책이었다.
“하는 수 있나. 동원할 수 있는 장정들은 다 데리고 가서 한 달 안에 공역을 마치도록 애써보라.”
도종이 명을 받고 물러가자 이번엔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이 나란히 찾아와서 말했다.
“저희들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긴 처지로 폐하께 지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이루시면 저희도 하루빨리 처자를 상견할 수 있으니 감히 한말씀 아룁니다.”
이세민은 두 사람이 안시성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으로 여겨 반색하며 이들을 맞았다.
“그러잖아도 공들을 불러 의논할 참이었네. 어떻게 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연수가 먼저 대답했다.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께 지은 죄를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의 집과 식구들을 걱정해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을 함락시키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성주 양만춘은 제법 지략이 있고 용병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막리지와 사이가 굳어 항복할 리도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골성 성주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서 성을 잘 지키지 못할 게 틀림없습니다.
안시성을 포기하고 차라리 군사를 옮겨 오골성을 치는 게 어떻겠는지요?”
“사농경의 생각도 홍려경과 같은가?”
이세민은 고혜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습니다.”
고혜진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막리지의 비행을 바로잡고 그 막돼먹은 버릇을 고치려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나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요동에서 시일을 끌 까닭이 있겠나이까?
저희는 10만이 훨씬 넘는 군사를 데리고도 황군의 흑기만 바라보고 놀라 무너졌으니
그 소문을 들은 고구려 백성들은 필시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감히 누가 폐하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들겠나이까?
오골성에는 아침에 당도하면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밖에 길을 막는 소성(小城)과 자성(子城)들은
황군의 위풍만 보고도 스스로 궤멸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연후에 군량을 거둬 북을 울리며 진군한다면 평양은 반드시 폐하의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항복한 두 장수는 개소문이 자신의 식솔들을 해치기 전에 시급히 이세민이 도성을 쳐서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고향에 두고 온 처자와 권속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세민은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주필산 앞에서 일으킨 갈등이 또다시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는 내관을 불러 급히 근신과 장수들을 소집하라는 영을 내렸다.
물론 이적의 뜻은 이미 아는 터라 다시 부를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사정을 털어놓고 의향을 묻자 안시성에서 낭패를 본 대부분의 군신(群臣)들은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평양으로 향할 것을 주장했다.
“요동을 모조리 평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도성을 쳐서 무너뜨리면 요동은 저절로 우리 수중에 들어올 것이니
어찌 이 계책을 쓰지 않겠습니까?”
“장량의 군사들이 비사성에 있으니 이틀이면 달려올 것입니다.
30만 군사들을 모조리 동원해 고각과 기치를 앞세우고 진군한다면
감히 어떤 자가 우리를 대적하려 들겠나이까?”
“이번 싸움의 승패는 평양과 장안성의 공취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개모와 요동에서 이기고 백암과 주필에서 항복을 받은 소문이 퍼져
고구려는 전국이 놀라고, 석황성(石黃城), 은성(銀城) 따위의 소성들에선
성주와 성민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수백 리에 걸쳐 인적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이때를 틈타 오골성을 빼앗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장안성까지 입성한다면
겨울이 오기 전에 고구려의 사직을 땅에 묻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시성이 비록 괘씸했지만 이세민은 분기를 다스리며 신하들의 뜻을 따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뒤늦게 군막에 도착한 장수가 갑자기 목청을 높여 외쳤다.
“불가합니다! 당치않은 일이올시다!”
군신들이 소리나는 곳을 보니 황후의 오라버니 장손무기였다.
“오, 보기(輔機:장손무기의 字)가 아닌가!”
이세민은 애당초 위징과 더불어 요동 정벌을 만류했던 장손무기가 새삼 반가웠다.
칼을 든 장수였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경전과 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문무를 겸비한 그였다.
“천자께서 친정(親征)하시는 일은 장수들이 군사를 끌고 나설 때와는 모든 면에서 유와 격이 다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무기는 사나운 눈빛으로 군신들을 둘러보며 그들의 철없음을 꾸짖듯 소리쳤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를 합치면 족히 10만 명은 될 것인데,
만일 우리가 오골성으로 향할 때 그들이 세력을 합쳐 우리 뒤를 밟는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게다가 안시성에서도 우리가 물러간 줄 알면 군사를 내어 뒤쫓을 게 뻔합니다.
앞뒤에 적을 두고 무슨 수로 싸워 이기기를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더라도 일은 순서대로 해야 합니다.
먼저 안시를 격파하고 건안을 공취한 뒤에 전열을 갖춰 진군하는 것만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현무문에서부터 오로지 생사고락을 함께한 장손무기의 말이었다.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는 측근의 말 한 마디는 그간의 논의를 단번에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세민은 순순히 장손무기의 뜻을 받아들이고 안시성을 급공(急攻)하도록 명령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7장 안시성 5 (0) | 2014.11.08 |
---|---|
제27장 안시성 4 (0) | 2014.11.08 |
제27장 안시성 2 (0) | 2014.11.06 |
제27장 안시성 1 (0) | 2014.11.06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21 (0) | 201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