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4
한편 9월이 되자 연개소문은 마침내 몇 가지 계략을 내놓았다.
그는 압록수에 정박하고 있던 수군에게 명하여 비사성을 공략하되,
성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당나라 관선들을 만나면 무조건 불을 질러 태우도록 지시했다.
“등주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해역의 뱃길엔 지난 봄부터 하루에도 수십 척의 양곡을 실은 배가
꼬리를 물고 오가는데, 내가 이를 알고도 그대로 둔 것은 바로 오늘과 같은 날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이제 당군들은 근 반년이나 해온 일이라서 틀림없이 경계와 방비가 처음과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 수군들은 배 위를 거적으로 덮어 고기잡이배처럼 꾸몄다가 적선에 접근하면
곧바로 거적을 치우고 공격하되,
기름을 먹인 불화살을 강노에 실어 날리면 당나라 선박을 태우기란 과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선박이 불에 타면 수군을 두 패로 나눠 양쪽으로 흩어졌다가 매일 교대로 번갈아 교전하라.
한 가지 명심할 일은 오로지 양곡만 태울 뿐 인명은 가능한 한 해치지 말라.
지금부터는 당나라 군사 하나하나가 모두 우리편이다.”
그런 다음 백암성에서 패하고 돌아온 중부 욕살 고선을 불렀다.
“그대는 목저성과 남소성으로 우회하여 신성으로 가서 연보에게 내 말을 전하라.
내달 하순에는 당나라 군사들이 필경 요수를 건너 통정진으로 가려고 신성 근처에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성의 서쪽에는 전날 수나라 양광이 백만군을 동원해 가시덤불로 만들어놓은 용도(甬道)가 있다. 이것을 미리 끊어놓고 기다리면 당군들은 돌아갈 길이 막혀 우왕좌왕할 게 틀림없다.
그럴 때 불시에 군사를 내어 공격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대도 연보와 힘을 합해 싸우되 잔적들은 모조리 강의 하류로 내몰아라.”
고선은 개소문이 다시 자신에게 임무를 맡기자 크게 감격했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고선이 물러난 뒤 개소문은 오골성 성주를 찾아갔다.
“전조의 피폐한 나라 사정을 감안할 때 우리가 천하무적의 당나라 대군과 싸운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사직의 존망을 걱정할 때 저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습니다.
이번에 요동을 침략한 당군을 물리치기만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을지 장군이
양광의 무리를 궤멸시켰을 때의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고,
장안에 조공이나 바치면서 시들어가던 국운 또한 다시금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로
하늘 높이 치솟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우리 몇 사람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성주께서는 저에게 아들 둘을 맡겨 나라에 큰 공을 세우도록 해보시지 않겠는지요?”
개소문이 정중하게 묻자 고불란은 오히려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용렬한 제 자식놈들이 쓸모가 있겠습니까?
큰놈은 그런대로 칼자루나 만지는 편이지만 작은놈은 그마저도 되지 못합니다.
어려서 병명도 알 수 없는 괴질을 앓은 뒤에 말소리까지 어눌해져서
아직 혼처도 구하지 못한 형편이올시다.”
그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은 고문(高文), 차남의 이름은 고죽리(高竹離)였다.
장남 고문은 사위 추정국을 따라다니며 함께 성사(城事)를 돌보았지만
차남 죽리는 성주의 말대로 사람이 조금 모자란 듯이 보였다.
눈빛과 표정도 정상이 아닌 데다 입 속에 넣고 웅얼거리는 말도 자세히 듣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 만큼 맥이 없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속은 누구보다 멀쩡한 청년이었다.
개소문은 오골성에 머무는 동안 그런 죽리에게 이상한 애정을 느꼈다.
그가 놀란 소처럼 눈을 끔벅거리며 분명하지 않은 말을 웅얼거릴 때마다
개소문은 죽은 자신의 형을 떠올렸다.
개소문의 형 역시 어려서 영문 모를 괴질을 앓은 뒤로 일생을 모자란 사람으로 살았지만
심성은 비단처럼 착했고 속에 든 생각도 누구보다 멀쩡했던 인물이었다.
성주의 허락을 얻은 개소문은 먼저 죽리를 불렀다.
“네가 중요한 심부름을 하나 해주어야겠다.”
죽리는 입에 말을 머금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리 얘기하지만 몹시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못을 박고 개소문은 죽리가 할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당군이 포위한 안시성으로 가서 장수들에게 군령을 전달하고
그 곳의 전황을 다시 내게 전해줄 첩자가 필요한데 아무도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너에게 특별히 이런 부탁을 하는 까닭은 너의 외양이 매우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현우(賢愚)를 판단하는 자들은 결코 너의 진면목을 알아차릴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없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다.
붙잡히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네가 싫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마.
내 눈치를 보지 말고 솔직한 네 의사를 말해라.”
개소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죽리는 곧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에게 그와 같은 일을 시킨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숨 따위가 무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장부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할 뿐입니다.”
흥분한 나머지 침까지 흘려대며 한참을 어눌하게 웅얼거린 말이었지만
기백만은 누구와 견주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개소문의 표정도 환히 밝아졌다.
그는 몇 가지 임무를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당군에게 붙잡히거든 네가 나의 첩자인데 건안성에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안시성에 있는 형의 안부가 궁금해 잠깐 들렀다고 해라.
그럼 당주는 틀림없이 너를 그대로 놓아줄 것이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과하마를 타고 오골성을 떠난 죽리는 이튿날 저녁 안시성 근처에 당도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이었지만 성 주변은 격전장답게 자욱한 흙먼지와 요란한 함성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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