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1
한편 오골성에 머물며 각 성의 형세를 일일이 챙기던 개소문은 백암성이 떨어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항복했다는 비보를 잇달아 접하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수군의 책임자를 불러 해역의 사정을 점검한 뒤 도성의 을지유자에게
서신을 보내 방비를 강화해달라고 부탁한 것뿐이었다.
개소문의 태연자약함은 도를 지나쳐 곁에서 지켜보기에 사뭇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군령을 받고 떠난 장수들이 일을 그르치고 돌아왔을 때도 알려진 바와는 달리
너그럽게 대했다.
먼저 백암성에서 패한 중부 욕살 고선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오라에 묶어 나타나자
개소문은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웃으며 말하기를,
“손대음은 덕으로 성을 다스리는 사람이지 무장이 아니다.
선비가 창칼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느냐?
관수가 영토를 지키지 않고 항복한 일은 괘씸하지만
이는 필경 손대음이 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키려고 선택한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성과 백성들이 온전하다면 그 또한 성주의 덕치가 아니겠느냐?
고선은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
내가 이미 손대음을 용서하였는데 어찌 너를 나무라겠는가?”
하고 오라를 직접 풀어주며 다정한 손길로 등을 어루만지니
고선이 감격하여 한동안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르 떨구고 나서,
“저를 안시성으로 다시 보내주십시오!
반드시 이세민의 목을 취하여 막리지께 바치겠나이다!”
하며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안시성에서 고정의가 보낸 사자가 와서
고연수와 고혜진이 함부로 성문을 열고 나가 당군과 교전한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도
개소문은 두어 번 혀를 차며,
“진왕이 비록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지만 고연수 따위가 상대할 인물은 아니다.
어찌 승전보를 바라겠는가!”
하였는데,
며칠 뒤에 육산에서 풀려난 사졸들이 초라한 몰골로 나타나 그간의 경위를 자세히 전하자
개소문은 손가락으로 가만히 날짜를 꼽아보다가,
“애석하구나, 연수와 혜진이 산에서 보름만 더 버텨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고 말했을 뿐이었다.
승패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이에 막리지를 보좌하던 오골성 성주 고불란(高弗蘭)의 사위 추정국(鄒定國)이 사뭇 의아해하며,
“막리지께서는 우리 군사의 잇단 패보를 접하고도 왜 계책을 세우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개소문이 웃으며,
“세울 만한 계책은 이미 다 세워두었고 나머지 계책은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느긋하게 대답했다.
연로한 장인을 도와 성군들을 이끌던 정국은 막리지에게 따로 생각이 있는 줄 알았지만
그 내용이 몹시 궁금했다.
“이제 안시성과 건안성이 패한다면 요동 전역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셈입니다.
어찌 그토록 태평하신지요?”
그러자 개소문은 잠시 대답을 미루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혹시 사냥을 나가본 적이 있느냐?”
“네.”
“사냥을 나가서 큰곰이나 멧돼지를 만나면 어떻게 잡는가?”
“저는 미리 그물을 옭아매고 그곳으로 몰아가서 화살을 쏘아 잡습니다.”
“옳거니.”
개소문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더 묻지. 만일 화살이 다 떨어져갈 때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 뒤를 쫓아온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느냐?”
“예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매부리를 데리고 갈석에 꿩 사냥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야말로 집채만한 곰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화살을 먹이려고 보니 살통에 화살이 꼭 하나가 남았는데
정말 눈앞이 다 캄캄했습니다.”
정국은 그때 일이 떠오르는지 새삼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럴 땐 우선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며 기운을 빼놓는 게 상책입니다.
그런 연후에 지친 기미가 보이면 멱통을 정확히 쏘아 맞혀야지요.
저는 그날 곰을 잡지 못했습니다.
겁이 나서 미리 화살을 쏘았는데 그게 빗나가고 말았지요.
덕분에 도망을 치느라고 아주 죽을 고생을 했지 뭡니까.”
그러자 개소문이 웃으며 덧붙였다.
“잘 생각해보라. 내게 질문한 일의 대답이 방금 너의 말 가운데 모두 들어 있다.”
한편 주필산을 떠나려 할 무렵 이세민은 왔던 길을 거슬러가서 굳이 안시성을 쳐야
하느냐는 문제로 한동안 갈등했다.
고연수를 상대하느라 군사들도 대부분 지쳐버린 데다 그사이 날짜도 훌쩍 지나 8월 하순,
요동에 사나운 풍설(風雪)이 일고 요수에 얼음이 언다는 10월은 겨우 한 달 남짓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살펴본 안시성은 성곽이 요동성에 버금갈 만큼 높은 데다 방비도 꽤나 삼엄하여
공략이 쉽잖을 듯했고, 성주 양만춘의 이름도 여러 차례 들은 바가 있어 이세민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 갈 길이 바쁜 그는 은밀히 이적을 불러 이렇게 상의했다.
“안시성은 성곽이 험하고 군사가 정예(精銳)하며 그 성주는 재주와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굴복하지 않았다고 하오.
그래서 막리지도 어쩔 수 없이 성을 그대로 맡겼다고 들었소.”
이세민은 고구려를 다녀온 사신들이 이구동성 양만춘을 높여 말했으므로
그를 안시성의 반란과 결부해 혼동하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도 적어 불시에 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오.
건안성을 얻으면 안시성은 저절로 우리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니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성을 치지 않고도 얻는 계책이 아니겠소?
한즉 무공(懋功)은 먼저 건안성을 치는 것이 어떻겠소?”
어려운 안시성을 포기하고 손쉬운 건안성을 쳐서 안시성을 요동에서 완전히 고립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이세민의 제의에 이적은 펄쩍 뛰며 반대했다.
“건안은 남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는데 우리 군량은 모조리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를 지나 건안을 치다가 적이 우리의 양도를 끊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안시성을 먼저 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건안성을 공취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적이 워낙 강경한 어조로 반대하자 이세민은 잠시 기분이 나빴다.
“공을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전략을 쓰지 않으랴.
그러나 시일이 촉박하고 여유가 없다.
공의 뜻대로 하되 일을 그르치지 말라!”
그는 이적에게 매섭게 다짐을 둔 뒤 군사들을 이끌고 안시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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