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21
“참으로 딱하고 불쌍하구나! 어쩌다가 고연수는 이 지경에 처하였더냐?
이제 너희는 남령과 더불어 참혹한 재로 화할 운명이지만 설혹 천길 불구덩이를 피하고
만길 낭떠러지를 굴러 내려와 요행히 목숨을 구한다고 한들 잔폭하기가 굶주린 범과 같은 막리지가
가만 놓아둘 성싶으냐?
피해도 죽고 피하지 않아도 죽을 것이니 세상에 이보다 더 답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도종이 개소문을 거론하며 조롱하는 소리를 듣자 고연수와 고혜진은 마침내 더럭 겁이 났다.
“과연 그렇소. 여기서 살아 돌아가도 우리는 이미 죽은 목숨이 아니오?”
혜진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연수를 바라보았다.
연수도 개소문의 노한 표정을 떠올리자 일순 사지에 맥이 탁 풀렸다.
말갈에까지 가서 얻어온 15만이나 되는 대군을 잃고 돌아간다면 어떤 처벌을 받을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때 이적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고연수는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이것이 그대에겐 마지막 기회다!”
“다리를 끊어버렸으니 어디로 가서 항복을 한단 말씀이오?”
이윽고 고연수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라. 항복할 의사만 있다면 우리가 다시 교량을 놓아주겠노라.”
다리를 끊은 장손무기가 대답했다.
고연수는 아쉬운 표정으로 혜진을 돌아보며 슬그머니 손을 붙잡았다.
“궁리가 막히고 계책이 다하였으니 어찌하오.
이 모두가 내 잘못이니 장군은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오.”
고혜진이 그런 고연수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말씀 마시오. 따지고 보면 전란의 근원은 막리지의 무도함과 패악함에 있소.
막리지가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겠소?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라리 당주를 도와 막리지를 칩시다.
막리지만 없어진다면 누가 관나와 절나의 수장인 우리를 문죄하겠소?”
연수는 혜진의 말에 다시 한 번 큰 위안을 얻었다.
“장군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구려! 풍랑에 배를 띄운 선주에게 잘못이 있지
어찌 고기를 잡지 못한 어부가 죄를 뒤집어쓰겠소!”
의견을 모은 두 장수는 마침내 남령을 포위한 당군들에게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이에 당군들은 다시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고 잔병들을 모두 건너오게 한 뒤
이들을 이끌고 이세민이 있는 동령의 조당으로 갔다.
포로로 붙잡힌 군사들의 숫자는 3만 6,800명, 고연수와 고혜진은
스스로 몸을 묶고 고개를 늘어뜨린 채로 조당 옆의 수항막 입구에 배복하고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세민은 장수들로부터 전황을 듣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포로 가운데 향후 당군에게 위협이 될 만한 남부와 북부의 관장(官長) 3,500명을 추려서
당나라 내지로 압송하고 말갈인 장수들은 모조리 구덩이를 파서 산 채로 묻어버렸는데,
그 숫자가 자그마치 3,300명이나 되었다.
고구려를 도운 말갈을 이세민으로선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지만 한편으론
너그러움과 인자함 속에 감춰진 그의 잔인한 일면을 여실히 드러낸 처사이기도 했다.
실컷 분을 풀고 위험 요소를 제거한 이세민은 그제야 다시금 선심책과 회유책을 써서
나머지 사졸들을 전부 자유롭게 풀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대군의 항복을 얻어냈는데 군문의 노획물이 없을 리 없었다.
말과 소가 각각 5만 필에 명광개(明光鎧:갑옷)가 1만 벌, 그밖에 각종 무기와 기계도 그쯤 되었다.
처리를 마친 이세민은 항복한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고,
그가 머물렀던 산의 이름을 기념해 주필산(遼東 海城東南 六山)으로 개명했다.
또한 주필산 승리를 논함에 용문 사람 설인귀를 빼놓을 수 없으므로
그를 유격 장군(遊擊將軍)에 임명한 뒤 승리의 여세를 몰아 군사들의 발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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