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장 안시성 2
그러나 일은 역시 쉽지 않았다.
안시성 사람들은 당군이 깃발을 앞세우고 나타나자
성문을 굳게 닫아건 채로 수비를 강화하고 성루에서 북을 울리며 위용을 자랑했다.
선군 장수 이적은 맹졸을 이끌고 성문으로 진격해 사흘 밤낮을 싸웠으나 별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사이에 어느덧 9월이 되었다.
조석으로 부는 바람에 한기(寒氣)가 올라붙고 밤에 불을 피우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날이 늘어갔다.
육로와 해로에서 군량과 마초를 실어나르던 군사들은 두꺼운 옷과 담요를 조달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종군한 장정들 중에서도 연일 땔감을 마련하는 부대가 따로 생겨났다.
“이번에도 회유책을 써보는 것이 어떤가?”
이세민은 장수들을 불러 말했다.
계책을 가릴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말을 거꾸로 잡아타고 투구에 똥오줌을 싸며 진군하라고 해도 그것이 계책이라면 따를 판이었다.
이세민은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성주의 됨됨이와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호걸다운 풍모로 보아 어쩌면 뜻이 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그는 양만춘에게 보낼 백지를 앞에 놓고 붓을 들어 단숨에 여백을 채워나갔다.
앞서 고연수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요동까지 거행한 이유를 설명하고 만일 성을 빌려주면
막리지의 패륜과 비행을 바로잡은 뒤 반드시 이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백암성과 요동성의 예를 장황하게 들어가면서 성민들은 털끝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
서찰을 보낸 다음날 안시성 성루엔 수많은 군사들이 나타나 당군을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세민은 들어라! 너의 그 더럽고 구린내 나는 주둥이로 우리 막리지를 함부로 헐뜯지 말라!
네가 패륜과 비행을 입에 담는다면 요동의 개도 웃을 일이다!”
“패륜과 비행을 논하면 고금에 너만한 놈이 또 있겠느냐?
권세에 눈이 멀어 형제를 죽이고 제위를 백주창탈한 천하의 개망나니가 감히 누구를 문죄하고
훈육한단 말인가!”
“부형을 죽인 양광이나 아비를 억누르고 형제를 살해한 이세민이 다를 게 무어냐?
요동에는 왜 하필 그런 오사리잡놈들만 들끓는지 모르겠구나!”
“당나라 졸개들은 들어라!
굶주린 범도 제 살은 뜯지 않고 개새끼도 피를 나눈 형제는 알아보는 법이다.
너희는 누구를 위해 처자식을 버리고 창칼을 들었느냐?
어서 무기를 버리고 부모와 식솔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금수보다 못한 놈을 따라와서 대관절 무슨 공을 세우겠단 말이냐?”
그밖에도 당군들이 듣기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온갖 비난과 욕설들이 흘러나왔다.
군영의 여기저기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나자
당군 장수들은 크게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허겁지겁 금고부대(金鼓部隊)를 동원해 요란하게 북을 치고 나팔을 불게 했지만
성루의 욕설은 마침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말았다.
현무문의 변(變), 그것은 당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거론조차 꺼리던 당조 제일의 금기이자
역린(逆鱗)이었다.
젊은 혈기로 형과 아우를 살해한 지 얼추 20년.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인이 찬탄하고 천하가 인정하는 강국으로 키워낸 데
한 가닥 위안을 삼고는 있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당시의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고
꿈에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이세민의 본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요동에까지 이르게 만든 개소문을 향한 분노도
그 근원이 현무문에서 출발하지 않았던가.
스스로 죄책감이 컸기에 이를 비난하는 자는 더욱 용서할 수 없었고,
스스로 후회가 되기에 남이 욕하는 것을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안시성의 군사와 백성들이 흡사 길거리의 개를 조롱하듯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퍼붓자
이세민은 당장 머리털이 곤두서고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격노했다.
“돌아가지 못해도 좋다!
요동에서 겨울을 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저것들을 사로잡아 남녀노소와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갈가리 찢어죽일 것이다!”
민망하고 당혹스럽기는 장수들이 더했다.
그 가운데서도 선봉장 이적은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고 군영을 뛰어다니다가
급기야 홀로 말을 타고 나가 성루를 올려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성을 함락시키는 날엔 남자는 모조리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옷을 벗겨 노리개로 삼아 반드시 병영에 조리돌림을 시킬 것이다!”
이적은 성루의 욕설을 막아보려고 궁여지책으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성중의 백성들을 더욱 단단히 결합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어차피 죽는다면 싸우다가 죽을 것이다!”
“안시성 성문에 우리 목숨이 걸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그런 꼴을 보겠는가?”
안시성 사람들은 이적의 협박을 듣자 눈에 불을 켜고 결의를 다지며 사생결단을 연호했다.
욕설은 계속되었지만 당군들은 쉽게 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이적이 남문을 치는 동안 장손무기가 한패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문으로 돌아가 기세를 올렸으나
비오듯 쏟아지는 화살과 성밖으로 날려대는 바위 때문에 접근조차 못했다.
보다 못한 강하왕 도종은 요동성에서 사용한 전략을 다시 써보자고 제안했다.
그는 염립덕을 데리고 황제의 군막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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