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20
처음부터 너무 얕잡아본 때문이었을까.
말머리를 어우르며 교전한 지 10여 합 만에 고연수는 그만 손에서 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안 되겠다고 판단한 고연수는 권위와 체면도 잊은 채로 급히 말머리를 돌리고 달아났다.
태산처럼 믿었던 장수가 달아나는 판에 군사들이라고 용기를 내어 싸울 리 없었다.
설상가상 산에서 내려온 이적의 군대가 궁지에 몰린 고연수의 군대를 후면에서 덮쳤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설인귀에게 쫓기고 이적에게 내몰린 고구려 군사들이 협곡의 동편 샛길로
막 빠져나오려고 했을 때였다.
“고연수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우리에게 투항하라!
항복하는 자에게는 황제 폐하의 대은(大恩)이 내릴 것이지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모조리 잡아 죽일 것이다!”
대군을 이끌고 동편을 막아선 장수는 강하왕 도종이었다.
고연수는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는 고혜진의 군대를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혼란 중에 헤어진
혜진의 모습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북령으로 달아나라! 북령만 넘어가면 안시성이다!”
군사들은 연수의 말에 기대를 걸고 힘을 얻었다.
정신없이 협곡을 돌아서 다시금 간신히 퇴로를 발견했을 때였다.
“고연수는 어디로 가는가?
대국의 장수 장손무기가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얼마나 놀랐으면 이번에도 연수는 말 한 마디 대꾸하지 못하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삼면이 모두 포위되었으니 달아날 곳은 이제 남령 한 군데였다.
그는 우왕좌왕하는 군사들에게 지시도 하지 않고 남쪽을 향해 말 배를 걷어찼다.
얼마만큼 달려왔을까.
연수의 눈에 협곡에서 남령으로 통하는 다리가 나타났다.
우마가 겨우 건너다닐 수 있게 만든
그 다리는 가파른 절벽과 절벽을 연결한 두어 장 넓이의 목교(木橋)였다.
연수는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눈에 뵈는 다리를 건너갔다.
다행히 다리를 다 건너도록 당군의 모습은 뵈지 않았다.
살아남은 고구려 군사들도 순번을 다투며 고연수를 따라 목교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오자 비로소 고혜진이 나타났다.
그 역시 이적의 군대와 장손무기의 군사들에게 협공을 당해 군사를 절반이나 잃고
남령으로 쫓겨 온 터였다.
“이제 살았소! 남령은 안전하오!”
고혜진은 고연수를 보자 저승에서 돌아온 사람을 대하듯 반가워했다.
서로 위안이 되기는 고연수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잠시 한숨을 돌렸다가 전열을 갖춰 기필코 놈들을 요절냅시다!”
두 장수는 그제야 난혼을 수습하고 남은 군사들을 끌어 모았다.
6만을 데리고 산을 올랐는데 살아남은 자는 4만이 채 못 되었다.
거의 절반이나 되는 군사들이 협곡에서 목숨을 잃거나 적군에게 사로잡힌 셈이었다.
“이세민의 간교한 술수에 내가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말았소. 진작에 화공을 썼어야 했거늘……”
연수가 땅을 치며 탄식하자 혜진도 덩달아 크게 한숨을 토했다.
“누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소. 지금이라도 안시성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데 두 장수가 막 한숨을 돌린 직후였다.
남령으로 통하는 다리 건너편에 자욱한 흙먼지가 일어나더니
당군 일패가 한껏 기세를 올리며 나타났다.
무리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앉은 장수는 협곡에서 만났던 이적이었다.
“고연수는 들어라!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예를 갖춰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연수는 이적을 보자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시끄럽다! 교활한 잔꾀에 휘말려 일시 어려움을 겪었지만 아직 내게는 10만의 군사가 있다.
어찌 불경스럽게도 항복을 운운하는가!”
연수가 목소리를 높여 응수하자 이적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가?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라.
너희가 그곳에서 무슨 수로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이냐?”
이적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건너편 계곡에서 먼지가 일어났다.
이번에는 북령 입구에서 만났던 장손무기의 군사들이었다.
“나는 남령으로 통하는 다리를 모조리 끊어버리라는 우리 황제의 명령을 받고 왔다!
미리 말해두지만 교각을 철거한 뒤엔 화공을 써서 너희를 전부 숯검정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니
그리 알라!”
말을 마치자 그는 부하들에게 명하여 방금 고구려 군사가 건너간 목교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말았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또렷이 깨달았다.
“큰일났소, 장군! 육산의 남령은 사면이 기험한 절벽이라 저 다리밖에는 길이 없소.
우리는 이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이 노릇을 어찌한단 말이오!”
다리가 끊어지는 것을 본 고혜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때였다.
장손무기의 뒤를 이어 또 한 패의 당군들이 북을 치고 기세를 올리며 나타났다.
그는 다름아닌 강하왕 도종이었다.
도종은 도착하자마자 군사들에게 명하여 기름에 적신 불화살을 준비하도록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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