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9
이세민은 크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손뼉을 쳤다.
“됐다. 이제 고연수를 사로잡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는 도종 이하 제군들에게 북과 나팔이 울리거든 일제히 분격하도록 지시한 뒤
스스로 고각과 기치(旗幟)를 들고 4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채 동령의 높은 봉우리로 올라갔다.
이세민이 막 산의 정상에 도착해 땀을 식히려 할 때 갑자기 하늘에서 유성이 빛을 발하더니
흰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고연수의 군영으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천문의 이치가 새삼 묘하구나! 군영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니
이는 고연수가 망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세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그는 승리를 확신한 듯 패강에서와 마찬가지로 조당 옆에 수항막까지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이튿날이 되자 육산의 서령을 점거한 이적의 군사들이 연기를 피우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더구나 그날은 아침부터 하늘이 우중충하게 찌푸려서 서령에서 피운 연기가 바람을 타고 내려와
고연수의 군영에까지 자욱하게 깔렸다. 연수는 오리무중이던 당군의 소재가 서령에서 발견되자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 분명히 육산을 떠나라 했거늘 저것들이 서령에 올라가 소란을 피우는 것은 어제의 약속을
스스로 뒤집겠다는 것이다!”
그는 혜진과 더불어 한동안 서령에서 날뛰는 당군을 유심히 관찰했다.
수목과 연기에 가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닌 듯했다.
“우리를 저쪽으로 유인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어떻게 하시겠소?”
혜진이 묻자 고연수는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간밤에 화공을 쓰지 않은 것은 이세민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오.
그런데 그는 내 말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를 용납한다면 공연히 나만 만인의 조롱거리가 될 뿐이오.”
그는 미심쩍어하는 고혜진을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거든 장군은 여기 있으시오. 나 혼자 가서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겠소.”
그러자 혜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우리는 이미 안시성을 떠나올 때부터 한배를 탔소.
장군이 간다면 나도 가리다.
서령의 적군이 얼마 되지 않으니 어쩌면 이는 당주가 우리의 위용을
마지막으로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소.
딴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혼을 내준다면 어제 장군의 말씀을 따를 수도 있지 않겠소?”
“고맙소. 과연 경은 나와 일생을 같이할 사람이구려.”
연수는 혜진의 태도에 감동해 손을 와락 붙잡았다.
두 장수는 곧 휘하의 정예 6만여 명을 추려 육산의 서쪽으로 향했다.
사태는 이세민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가파른 육산을 기어올라 서령과 북령 사이의 협곡에 이른 것은 점심나절이었다.
동편 산정에서 북령 쪽을 살피던 이세민의 눈에 장손무기의 군사들에게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가 재빨리 북과 나팔을 불고 기치를 들자 이를 신호로 당군들이 사방에서 고함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서령의 군사들만 보고 협곡에 이른 고연수와 고혜진은 뜻밖의 상황을 만나자 몹시 당황했다.
두 장수는 군사를 두 패로 나눠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려 했지만 놀란 군사들이
대오를 이탈하는 바람에 진중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공교롭게도 하늘에선 때마침 우레가 울고 번개가 쳤다.
싸움터에서 만나는 우레와 번개는 공세에 나선 군사들에겐 힘을,
수세에 몰린 군사들에겐 더한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법이었다.
협곡에 포위된 고구려 군사들은 싸울 의욕마저 잃고 갈팡질팡 쫓겨 다니기 시작했다.
승패는 처음부터 뻔한 싸움이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서령을 포기하고 후미에서 퇴로를 찾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용문(龍門)의 용병 설인귀(薛仁貴)가 드디어 입신의 기회와 출세의 때를 만났다!
동이(東夷)의 졸개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갑자기 기이한 옷을 입은 적군 하나가 홀로 말을 타고 나타나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당황하여 도망갈 길을 찾던 형편일지언정 장수도 아닌 일개 사졸의 위엄에 눌려
항복할 고구려 군사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무당 같은 놈이 나타나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별 미친놈을 다 보겠구나. 어서 비켜라, 이놈!”
앞장선 군사 몇 명이 칼을 뽑아 달려들자 상대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생각했던 고구려 군사들은 이내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가서 싸우는 자들마다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것이 마치 추풍낙엽과 같았다.
“대항하는 자들에겐 죽음이 있을 뿐이다!”
설인귀라는 그 용병은 신기에 가까운 칼 솜씨를 자랑하며 고구려 군사들을 무참히 베어 넘겼다.
그 바람에 퇴로를 향해 몰려가던 고연수의 군대가 양쪽으로 물살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밀리는 군사들을 보고 영문을 몰라하며 앞쪽을 살피던 고연수의 눈에
마침내 설인귀의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저 자가 누구냐?”
연수가 묻자 쫓겨오던 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설인귀라고 하는 희한한 놈입니다!
장수도 아닌 것이 칼 다루는 솜씨가 신출귀몰하여 아무도 당할 수가 없나이다!”
연수가 보니 현란하고 치렁치렁한 옷차림도 전장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으나 무엇보다 대군의 앞을 단기로 막아서는 것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대뜸 칼을 뽑아 들고 말을 달려 나가며 무섭게 눈알을 부라렸다.
“근본도 없는 벽지 촌놈이 감히 어디서 꼴사납게 행패를 부리느냐!
당장 비켜서지 못하겠느냐, 이놈아!”
쉽게 보고 달려든 연수였지만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설인귀는 날렵한 솜씨로 고연수의 칼을 맞받아치더니
이어 무서운 완력과 노련한 기예를 뽐내며 역공을 취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6장 요동(遙東)정벌 21 (0) | 2014.11.05 |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20 (0) | 2014.11.05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8 (0) | 2014.11.05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7 (0) | 2014.11.05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6 (0) | 2014.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