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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요동(遙東)정벌 18

오늘의 쉼터 2014. 11. 5. 14:04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8

 

 

 

“당군들은 이제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 신세가 되어버렸소.

저들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아낸 뒤 인마가 건너올 수 없는 폭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돌아가며 파고

산에 불이라도 질러버린다면 당군 30만은 모조리 불고기가 되고 말 것이오.”

“훌륭한 계책이외다. 당장 그렇게 합시다!”

의견을 모은 두 장수는 뒤에 남겨두고 온 후군들을 전부 데려와 고산 입구에 새로 군영을 만들었다.

당군은 산에 있고 고구려와 말갈 군사들은 산 밖에서 북서쪽 입구를 포위한 형국이었다.

이들이 대치한 고산은 크고 작은 여섯 봉우리가 동서남북으로 사이좋게 격하고 있어 예로부터

육산(六山)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산을 봉쇄한 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당군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당군들은 숨을 죽인 채 산속에 숨어 있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이세민은 임시로 설치한 조당(朝堂)으로 모든 신하와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제일 먼저 황제의 군령을 받은 장수는 이적이었다.

“무공(懋功)은 용맹한 보졸 1만 5천을 거느리고 서령(西嶺)으로 건너가 진을 치고 기다리되

연기를 피워 밥을 지어 먹고 수시로 먼지를 일으키며 적을 산봉우리 밑의 협곡으로 유인하라.

그런 뒤에 북과 나팔소리가 울리거든 산을 내려와 정면에서 적을 쳐라.”
이적이 군령을 받고 물러나자 이세민은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을 불렀다.

“너희는 정병 1만 1천 명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을 만들어 북산(北山)에서 협곡으로 빠져나왔다가

역시 내가 고각(鼓角)을 울리거든 이를 신호로 삼아 적의 후미를 들이쳐라.”
군령은 의외로 간단했다.

이세민은 장수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대강 설명했다.

“우리가 산속에 갇힌 줄을 알고 적은 반드시 화공을 쓰려 할 것이지만

서령에 우리 군사들이 있는 줄을 알면 마음이 바뀔 것이다.

그런데 짐이 보니 서령과 북령 사이의 협곡은 지세가 대단히 험해

교량이 아니고선 건너다닐 수 없으니 만일 이곳에 적군을 몰아넣고 앞뒤에서 들이친다면

적이 달아날 퇴로는 남산(南山)밖에 없다.

나는 남산에 잔적들을 가두어놓고 교량을 모조리 철거한 뒤 최후엔 저들이 쓰지 않은 화공으로

산 하나를 통째 태워버릴 것이다.”

당나라 장수들은 이세민의 계략에 한결같이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도종만은 별이 총총 뜨기 시작한 육산의 밤하늘을 걱정스럽게 치바라본 뒤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요동엔 벌써 가을이 깊어진 데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맑습니다.

만일 고연수가 금일 밤에 화공을 쓴다면 우리로선 실로 속수무책이 아닐는지요?”

도종의 말에 모든 장수들의 안색도 갑자기 누렇게 변해갔다.

비록 소재를 숨기려고 숨을 죽인 채 하루를 기다렸으나 동령(東嶺)을 포위한 고구려 군사들은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세민은 느긋한 표정으로 웃음을 띤 채 말했다.

“적장 고연수란 자가 비록 용맹은 있을지 모르나 그가 군사를 부리고 진을 구축하는 것을 보니

과히 명석한 인물 같지는 않다.

금일 밤에 대한 대비책도 이미 짐의 수중에 있으니 승범(承范:도종의 字)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

이어 황제는 자신의 호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안에서부터 데려온 문관 시자(侍者) 한 사람을 불렀다.

“너는 말을 타고 적진으로 고연수를 찾아가서 이 글을 전하라.

그럼 금일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자는 황제가 미리 준비한 서신 한 통을 받아들자 곧 말을 타고 산을 내려갔다.

이때 고연수는 15만 군사를 모조리 동원해 육산 입구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으니 구덩이의 깊이와 넓이는 금세 잔재미가 붙도록 넓어졌다.

당군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 기험한 서령으로 넘어가지는 않았을 듯했다.

그는 고혜진과 함께 초저녁부터 군사들을 독려했다.

횃불을 밝히고 밤샘 공역을 한다면 내일 새벽녘엔 화공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세민이 보낸 사자가 당도한 것은 잠시 일손을 멈추고 한숨을 돌릴 때였다.

“당주의 시자가 무슨 일로 나를 만나러 왔는가?”

고연수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사자를 바라보았다.

“주군의 서찰을 받아왔으니 읽어보소서.”

그는 사자로부터 받은 글을 펴보았다.

짐은 그대 나라의 강신(强臣:연개소문)이 군주를 시해한 까닭으로 이를 문죄하러 왔을 뿐,

싸우러 온 것이 아니오.

다만 국경을 넘어오니 양식과 마초가 부족하여 부득이 몇몇 성곽을 취해 협조를 얻었는데

이 또한 따지고 보면 어찌 나의 본심이겠소?

그대 나라에서 신례(臣禮)를 닦는 것을 기다렸다가 곧 성을 되돌려줄 것이니

장군은 사정을 잘 헤아려 서로 피를 흘리며 다투는 일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오.

이세민이 보낸 글을 읽고 난 고연수는 잠시 깊은 궁리에 잠겼다.

그리곤 곧 고혜진을 찾아가 당주의 글을 보여주며 말했다.

“생각을 좀 해봅시다. 결국엔 우리가 하려는 것을 당주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겠소?”

연수의 은밀한 귀엣말에 혜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구려. 지금 막리지의 권세를 누를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당주뿐이지요.

우리가 이 고생을 하며 나라에 공을 세우려는 것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막리지의 세도를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겠소?”

“외적(外敵)을 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적(內賊)의 일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소.

외적을 이용해 내적을 다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병법에서 말하는 최상책이외다.”

“장군의 말씀이 한 치도 그른 데가 없소.”

끝까지 의기투합하는 두 사람이었다.

의논을 마치자 고연수는 자신의 병영으로 돌아와 사자를 돌려보내며 말했다.

“가서 너희 주군에게 전하라.

우리나라의 강신이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다.

강신을 문죄하러 왔다면 마땅히 도성으로 향할 것이지 어찌하여 요동의 성곽들을 괴롭힌단 말인가?

나로 하여금 그 말을 믿게 하려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시급히 육산을 떠나되 동남으로 내려가

건안성과 오골성의 사잇길로 순행하라 일러라.

만일 다른 곳으로 나온다면 우리도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자는 즉시 말을 타고 당군이 주둔한 산채로 돌아와 고연수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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