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6
신성 성주로 있던 양만춘은 고준의 반란이 진압되고 나자
연개소문의 간곡한 부탁으로 신성을 자신의 아우 연보에게 맡긴 뒤 안시성을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요동성과 안시성은 요동의 요지 가운데 요집니다.
그래서 지난번 수나라가 쳐들어왔을 때도 을지 장군께서는 두 성의 방비를 가장 철저히 지시하시고
오직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시일을 끌어 적이 스스로 궁지에 몰리도록 유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요동성이 함락되고 말았으니 우리 안시성마저 무너진다면 요동 전역이
당나라 국토가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당군이 주둔한 고산은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나오기도 힘든 곳입니다.
제 소견엔 여러 모로 봐서 고대로의 말씀을 따르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고연수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직접 무기를 들고 싸워본 사람을 제쳐두고 어찌 성안에서 구경한 사람들이 전세를 판단하고
전략을 세운단 말씀이오?
적의 강약과 허실은 이미 우리가 경험한 바요.
게다가 우리 군사는 어제의 기습으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니
이때를 놓치면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 거외다!”
그는 고정의의 말을 따르라는 막리지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격다짐으로 나왔다.
“두고 보시오, 반드시 이세민을 생포해 개처럼 끌고 올 테니!”
연수가 주먹을 불끈 쥔 채 입찬말을 내뱉었다.
성중에는 고정의 말고도 여러 명의 장수가 있었으나 오골성 성주까지 지낸
북부 욕살 고연수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그가 주위의 만류를 무릅써가며 한사코 고집을 꺾지 않은 데는 막리지에 대한
미묘한 경쟁 심리가 작용한 일면도 있었다.
연수의 아버지인 고창개는 개소문의 아버지 연태조와 평생을 두고 막역지간으로 지낸 사이였다.
연태조보다 10여 년이 연하였던 고창개는 연태조를 늘 형님처럼 모시며 깍듯이 섬겼으나
연수와 개소문의 사이는 이와는 달랐다.
연수는 어려서부터 곧잘 개소문과 여러 면으로 비교가 되었는데 그것이 내심 죽기보다 싫었다.
개소문은 아홉 살에 조의에 들어갔다더라,
저보다 예닐곱 살씩 더 먹은 놈들을 데리고 다니며 걸핏하면 혼쭐을 내고 대장 노릇을 한다더라,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데다 글까지 읽어 모르는 것이 없다더라,
말을 선 채로 타고 칼을 쓰면 그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는다더라……
연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개소문에게 늘 끌려 다니는 신세인 게 무엇보다 못마땅했다.
그 역시 조의에도 들어갔고, 대장 노릇도 했으며, 글도 누구보다 열심히 읽었지만
모두가 어린 개소문을 쫓아가는 형국이었다.
이런 사정이 처음 뒤바뀐 게 연수가 오골성 성주로 부임한 뒤였다.
그때만 해도 개소문은 정처 없이 산천을 떠도는 백수 한량의 신세였으나
자신은 어엿한 장수가 되어 한 성곽을 맡아 다스리게 됐으니
비로소 지난날의 우열이 역전된 셈이었다.
한데 어릴 때 가슴에 맺힌 열등감을 잊을 만할 때쯤 이번에는
개소문이 연태조의 죽음으로 막리지를 이어받더니 불과 얼마 뒤,
자신으로선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참혹한 정변을 일으켜 임금까지 갈아 치우자
연수는 또다시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개소문은 내게 아들과 다름없는 사람이다.
어찌 너를 함부로 대하겠느냐?
막리지는 순번제이니 몸을 낮추고 덕을 쌓으며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네게도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정변이 성공한 뒤 고창개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연수는 그 말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개소문을 찾아가서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개소문은 다섯 살이나 많은 자신을 전혀 예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뒤에 진행되는 일련의 일을 보건대 막리지의 자리도 쉽게 내놓을 것 같지 않았다.
굳이 덕본 것을 대라면 북부 욕살의 지위를 계승하도록 만든 것 하나뿐이었으나
이는 예로부터 내려온 선례요 전통이었으니 연수로선 그리 고마움을 느낄 일도 아니었다.
비록 면전에서는 그 위엄에 짓눌려 불만을 표시하지 못했지만 연수는 이번에도
고정의의 절도를 받으라는 개소문의 당부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리지는 나를 경계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내가 자력으로 공을 세우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상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연수는 원군을 이끌고 오면서 그렇게 단정했다.
그런 고연수에게 남부 욕살 고혜진은 큰 힘이 되었다.
고혜진 역시 5부 욕살들이 돌아가며 맡기로 된 막리지 자리에 뜻이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는 개소문이 정변을 도모할 때부터 그 사실을 간파하고 군사를 내어 도우려고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자 그 뒤로 늘 이를 원통하게 여겼다.
“막리지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니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상대하기 어렵게 되었소.
하지만 공과 내가 힘을 합친다면 사정은 다르지 않겠소?”
말갈병을 얻어 안시성에 합류한 고혜진과 먼저 도착한 고연수는
군막에서 만나 밤늦도록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공의 뜻이 내 뜻과 같소.
그가 말갈병을 청하러 지리에 익숙한 나를 보내지 않고 굳이 남부 욕살인 공을 보낸 것이나,
또 내게 고 대로의 절도를 받도록 명령한 것이 알고 보면 다 우리를 경계하기 때문이오.
우리가 대공을 세우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겠소?”
“그의 속셈을 안 이상 어찌 우리라고 가만히 있겠소.
국법에 엄연히 막리지의 임기를 3년으로 못박아두었으니
어떻게든 이번 싸움에서 우리가 반드시 공을 세워 그를 서부로 돌려보내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우리 두 사람이 세력을 합치고 을지문덕과 같은 공을 세우기만 하면 그를 틀림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오.”
하긴 개소문은 서부의 욕살일 뿐이니 남부와 북부가 결탁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듯했다.
이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새파랗게 결전의 의지를 다지며 당군들이 눈앞에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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