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5
당군이 안시에 이른 것은 음력 8월 중순, 들에 나락이 누렇게 익어갈 때였다.
다행히도 그들이 처음부터 가장 걱정했던 식량 수급에 이때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
양도는 크게 두 갈래, 하나는 요하를 건너 육로로 운반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군들이 동래(東萊)에서 배로 실어 나르는 해로였다.
육로에서는 대리경 위정이 하북에서 징수한 곡물을 유주와 유성을 거쳐 매일 수십 수레씩 보내왔고,
바다에선 소경 소예가 하서와 하남의 양식을 4백 척에 달하는 배로 끊임없이 실어 날랐다.
거기다 개모성과 백암성, 요동성을 쳐서 다시 수십만 석의 양곡을 얻은 터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세민은 고구려 백성을 상대로 인심까지
후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안시 지역은 원활한 양도를 확보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었다.
안시성을 쳐서 얻으면 유성에서 통정진으로 돌아가지 않고 회원진을 통해 해안으로
물자를 수송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래에서도 비사성을 거쳐 곧바로 안시성 서쪽에
짐을 부릴 수 있으니 노역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양도가 끊어질 것에 대한 걱정만 하지 않는다면 날짜가 촉박할 이유도 없었다.
이세민의 만 가지 근심은 모두 겨울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요동벌을 떠나야 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안시성을 얻고 연하여 건안성까지 치고 나면 사정은 달랐다.
신성을 제외하면 요동벌 전체를 장악한 것이니 최악의 경우엔 국경을 옮기고 몇 해를 주둔하면서
기회를 보아 평양을 쳐도 아쉬울 것이 없는 셈이었다.
좌우에 범 같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안시성 동남쪽에 당도한 이세민이 주변의 지형지세를 관찰하고
막 계략을 짜려 할 때였다.
갑자기 안시성으로부터 문이 열리더니 숫자를 헤아릴 길 없는 대군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먼 길을 오느라 미처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당군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그것은 기껏해야 요동성이나 백암성에서처럼 성문을 걸어 닫고 방어만 할 거라는
이세민과 당나라 장수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은 불시의 기습이었다.
“도대체 저 많은 군사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일껏 쳐놓은 군막을 걷고 왔던 길로 허둥지둥 쫓겨가면서 이세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종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멈춰라! 쥐새끼 같은 당나라 놈들이 감히 어디까지 기어들어와서 얼쩡대는가?”
마군 일패를 거느리고 선두에서 당군들을 뒤쫓던 장수가 눈에 불을 켜고 호통을 쳐댔다.
이세민은 황제의 어가에 납작 엎드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거리는 있었지만 적장의 우렁찬 호통 소리가 귀에 또렷이 들렸다.
사정이 점점 급박해지자 근위병들이 나서서 쫓아오는 장수를 따돌리려 했으나
적장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날렵한 솜씨로 칼을 휘둘러 단숨에 몇 명을 베어 눕혔다.
이세민이 가슴을 졸이며 근 4, 5리를 달아나고 났을 때야 다행히 이적이 나타났다.
그는 벌써 격전을 치른 듯 갑옷에 피가 낭자했다.
“네 이놈!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이적은 마상에 늠름히 앉은 채로 쫓아오는 적장을 상대했다.
“비켜라, 가로막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고구려 장수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이윽고 두 장수간에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졌다.
“너희는 계속 수레를 쫓아가 어가에 탄 자를 생포하라!”
고구려 장수는 이적을 상대하면서 한편으론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 바람에 이적은 장수 하나만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는 몇 차례 적장과 싸우고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황제를 뒤쫓는 군사들을 처리한 뒤
다시 몸을 돌려 장수를 상대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이적은 투구를 쓴 적장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가 연개소문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막리지가 아니시오?”
잠시 말머리가 떨어졌을 때 이적이 물었다.
그는 옛날 진왕의 사가에서 연개소문을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적의 질문에 장수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나는 절나부 욕살 고연수다.
요동을 지키는 일에 어찌 막리지한테까지 수고로움을 끼치겠는가?”
말을 마치자 고연수는 다시 칼을 고쳐 잡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합이나 계속된 이날 싸움에서 두 장수는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적의 등뒤에선 겨우 정신을 차린 강하왕 도종이 정병을 이끌고 나타났고,
고구려에서도 남부 욕살 고혜진이 가세해 서로 엎치락뒤치락 난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치열한 교전 끝에 당군은 안시성에서 족히 3, 40리를 물러나 고산(高山)을 의지해
새로 군영을 설치했다.
시작부터가 만만찮은 안시성이었다.
첫날 교전에서 한껏 기세를 올린 고연수와 고혜진은 이튿날 날이 밝자
15만이나 되는 원군을 모두 동원해 다시 적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대로 고정의가 급히 고연수를 만류했다.
“진왕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제거하고 밖으로 융적(戎狄)을 굴복시켜 황제가 된 사람일세.
결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네.
더구나 그는 전국을 돌며 30만이나 되는 무리를 이끌고 왔으니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일세.
어제 본때를 보여준 것만으로 만족하고 손쉬운 방법을 찾음세.”
“손쉬운 방법이라니요?”
“시일을 끌면 가만히 앉아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네.”
고정의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어제 15만이 넘는 우리 군사의 위용을 보여주었으니
당군들도 함부로 성을 들이치지는 못할 걸세.
이럴 때 한편에선 장부들로 하여금 당군이 주둔한 고산 입구까지 보루를 만들어 연결하고,
다른 한편으론 기병(奇兵:기습하는 군사)을 보내 불시에 양도를 끊는다면 적은 양식이 떨어져서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므로 반드시 이길 수가 있네.”
그러자 고연수는 갑자기 소리를 높여 웃었다.
“대로께선 연세가 들어 겁이 많아지셨구려.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감은 올라가서 따기만 하면 되는데
굳이 떨어질 때를 기다릴 이유가 어디 있소?
저들이 비록 30만 군대라곤 하나 짐을 나르고 군막과 교량을 설치하는
인부를 빼면 무기를 들고 제대로 싸울 줄 아는 군사는 절반에 불과하오.
어제 우리 군사의 기습에 혼비백산하여 개처럼 쫓겨가는 꼴을 보고도 그러시오?”
연수의 말에 고혜진도 덩달아 교전을 주장했다.
“내가 얻어온 말갈병 10만은 하나같이 맹졸들입니다.
군량이나 축내는 당나라 졸개들과는 격이 다르니 대로께선 과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 장수가 우기자 고정의는 성주 만춘의 뜻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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