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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요동(遙東)정벌 14

오늘의 쉼터 2014. 11. 4. 11:21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4

 

 


그는 우선 가시성 출신의 고구려 군사 7백여 명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먼저 개모성이 함락될 때 이적에게 생포당한 자들이었는데,

목숨을 지키려고 종군할 것을 청하여 이적의 휘하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집이 다들 어디라고 했더냐?”

이세민은 부처같이 인자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모두 가시성에 집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너희가 우리에게 종군하여 싸우는 것을 막리지가 알면

너희 처자와 식솔들을 가만두지 않겠구나.”

“……무사할 리야 있겠나이까.”

“더구나 너희 막리지로 말하면 임금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몸을 아홉 동강으로 끊어

시궁창에 버린 자가 아니더냐?

그런 위인이 너희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처자식을 잡아죽일 것이다.

아아, 무섭도다! 나는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해 한 집안을 멸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구나!”

이세민은 사뭇 진저리를 쳤다.

그리곤 이적에게 말하여 이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지시했다.

“짐은 고구려 백성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저들이 그간 우리 군영에서 애쓴 공로가 있으니

돌려보낼 때 곡물을 넉넉히 챙겨주어 가솔들에게 크게 환영받도록 하라.”
상상조차 못했던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가시성 출신 군사들은 서로 얼굴을 비비고 살을 꼬집으며 기뻐했다.

돌려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읍할 일인데 거기다 곡식까지 챙겨주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7백 명의 고구려 군사들은 일제히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의 너그러운 처사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한편 손대음의 사자가 이세민을 만나러 떠난 직후 백암성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중부 욕살 고선과 요동성에서 패한 고하가 원군을 이끌고 백암성을 찾아온 것이었다.

고선은 중부에서 동원한 마군 3천 기와 보군 1만여 명으로 개모성 앞에서

여러 날 형세를 엿보며 성을 되찾을 궁리에 골몰했으나 여의치 않자

막리지의 명에 따라 손대음을 도우려고 백암성으로 왔고,

고하도 요동성에서 살아남은 신성의 장병 1만여 명을 이끌고 백암성에 당도했다.

원군이 오자 손대음은 갑자기 크게 당황했다.

“막리지는 무서운 사람이다.

 만일 항복하려고 사자를 보낸 것을 알면 나는 물론이고 성사를 돌보던

모든 관리들을 도륙낼 것이 뻔하다.”

그는 은밀히 휘하의 성군 장수들을 불러 입단속을 시켰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장수들이 묻자 손대음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원군이 왔으니 오지 않았을 때와 같을 수야 있겠는가? 싸우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러나 고하의 말을 들어보면 요동성에선 4만이나 되는 원군으로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니

기껏해야 2만이 조금 넘는 잔병들로 과연 우리 성을 지킬 수 있겠느냐?

우선 사자가 돌아오면 얘기를 들어보고 또 일이 진행되는 것도 살폈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백암성 서쪽에 당군이 나타났다.

고선과 고하는 원군을 남북으로 갈라 응전할 태세를 취했으나 어쩐 일인지

당군들은 고함만 질러댈 뿐 좀처럼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고 났을 때였다.

당군 장수 가운데 우위대장군 이사마17)가 마군 수십 기를 이끌고 사정을 알아보러

성문 근처에 갔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부하들에게 업혀오는 사건이 있었다.

이세민은 친히 이사마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고 입으로 피를 빨아 독을 제거했다.

수항막(受降幕:항복을 받는 천막)까지 준비하고 기다리던 이세민으로선

차츰 화가 치밀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하여 손대음은 도월도 던지지 않고 깃발도 세우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 장수를 향해

화살까지 쏘아댄단 말인가?

혹시 그사이에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성을 들이친 뒤엔 마땅히 성중의 백성과 물자로써 우리 전사들을 포상하리라!”
그날 밤 당의 사신이 고구려인처럼 꾸며 백암성을 방문했다.

사신은 다행히도 손대음과 성군 장수들이 지키던 서문으로 들어가서 성주를 만나볼 것을 청했다.

“황제께서 성주의 확답을 받아오라고 하였소.

만일 교전을 한다면 백성들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으니 그런 줄 아시오.”

사신이 험한 낯으로 으름장을 놓자 손대음은 하얗게 기가 질렸다.

“시일을 좀 주시오.

막리지가 원군을 보낸 탓에 내가 임의로 결정하기 어렵게 되었소.”

“그렇다고 날짜만 끌며 무한정 기다릴 수야 없는 일이 아니오?”

궁지에 몰린 손대음은 마침내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번거로운 청이지만 내일 그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성을 치는 시늉을 해주시오.

그러나 원군은 모두 성의 남북으로 갈라져 있으니

황제께서는 본진을 이끌고 방금 사신이 들어온 서문으로 오시라고 전해주오.

당기를 세우고 도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삼되 대군이 입성만 하면

원군들도 어쩔 수 없이 도망갈 것이 아니겠소?”

사신은 손대음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황제께서는 성주의 반복함을 이미 의심하고 계시오.

믿을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외다.”

“무엇으로 증거를 삼으면 믿겠소?”

“성주의 처자를 우리에게 맡기시오.”

사신의 요구에 손대음은 깊이 한숨을 쉬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세민은 백암성을 다녀온 사신으로부터 손대음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또 그가 데려온 성주의 처자를 눈으로 확인하자 밝은 표정으로 사신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튿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당군은 일제히 백암성을 공격했다.

원군 장수들은 당군의 거센 공격을 막느라고 좌우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군사들이 서문 성루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당기다! 서문이 무너졌다!”

고선과 고하가 보니 과연 당나라 흑기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요동성에서 이미 한 차례 뼈아픈 패배를 맛본 고하는 신성에서 빌려온 군사들을 이끌고

그대로 북문을 열고 달아났고, 고선도 급히 휘하의 군사들을 수습해 백암성을 떠나고 말았다.

성주의 항복 덕분으로 백암성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한 이세민은 패강 강가에 장막을 치고

손대음과 성군 장수, 성민 남녀 1만여 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곳에서 언필칭 천자의 교화와 덕치를 강조하던 이세민의 전략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그는 약속대로 성민들을 해치지 말 것을 전군에 명령한 뒤 모든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따로 포백(布帛)을 하사했다.

백암성에 원정을 나온 다른 성의 군사들에게도 무기를 돌려주고 양곡까지 선사한 뒤

모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놓아주었다.

민심을 얻으려는 선심 정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요동성에서 피살된 성주의 심복 모평이 죽은 상사의 식솔들을 이끌고

백암성에 피신해 있음을 우연한 기회에 들어 알게 되자

모평의 의리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군주를 시해한 자가 다스리는 나라에 모평과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이 실로 믿어지지 않는구나.

그가 윗사람을 섬기는 의리는 요동에서는 물론이고 우리 중국에서조차 귀감이 될 만한 것이다.

천하의 민심과 제도를 다스리는 천자로서 내 어찌 모평의 의로움에 상을 주지 않겠는가!

개망나니 연개소문도 모평의 충절을 알고 나면 가슴에 찔리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세민은 모평을 불러 크게 치하하고 비단 5필을 하사한 뒤 죽은 태사를 위해

화려한 상여를 만들어 그 식솔들과 더불어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얻은 뒤 대충 처리를 마친 이세민은 그곳을 암주(巖州)로 만들고

손대음을 암주자사(巖州刺史)로 삼아 그대로 성사를 돌보게 한 뒤

다음 목표인 안시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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