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3
그는 당군이 성에 당도하기도 전에 미리 심복 사자를 요동성으로 보내 항복할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당군이 도착하면 성안에서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삼을 것이나 아직 성중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 이유가 노략질을 겁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사자로부터 손대음의 뜻을 전해들은 이세민은 유쾌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말라.
천하 만물을 다스려 옳은 길로 교화하는 것이 천자의 직분이거늘
어찌 가련한 백성들을 해친단 말이냐?
관수가 이미 서찰에서 말한 바대로 짐은 군주를 시해한 번국의 강신(强臣:연개소문)을 치죄하고
엄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을 뿐이다.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패역한 자를 처단하여 신례(臣禮)를 닦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려고 나선
군사들이 백성들을 위로했으면 했지 해칠 까닭이 있겠느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니 짐의 약조를 믿어라!”
그리고 검은색 당기(唐旗)를 사자에게 내어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가서 의논을 해보고 항복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거든 이 깃발을 성루에 세워라.
그럼 우리도 맹졸을 앞세우지 않고 평화롭게 입성할 것이다.”
손대음이 항복할 의사를 밝힌 일은 이세민의 전술과 전략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백암성의 사자를 돌려보낸 뒤 즉각 군령을 내려 스스로 항복한 적성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재산이나 부녀자를 강탈하는 행위는 일체 하지 말 것을 긴급히 지시했다.
그러자 이적이 휘하의 장수 몇 명과 함께 이세민을 찾아와 말했다.
“백암성에서 사자가 다녀갔다던데 혹시 항복을 청하러 온 것입니까?”
“그렇다네.”
“하면 항복을 받아들일 것인지요?”
“굳이 싸울 까닭이야 없지 않은가?”
“아뢰기 송구하오나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은 황제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군사들이 날아오는 시석을 무릅쓰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노획을 탐내는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은 잇달아 적성을 공취하여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허약한 적성의 항복을 받아서 사졸들의 마음을 외롭게 하십니까?
이는 한창 들끓기 시작한 아군의 사기를 여지없이 꺾어버리는 일입니다.”
이적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다.
“무공(懋功:이적의 자)의 말도 옳다.
하지만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내가 장안으로 돌아가면 황궁의 고물(庫物)로써 상을 내릴 것이니
적어도 백암성 하나만은 양보하기 바란다.”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는지,
대답을 듣고도 이적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황제의 뜻이 분명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수들과 함께 물러나려고 하자 이세민은 따로 가만히 이적을 불렀다.
좀 전과는 달리 그는 표정과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명분은 개소문의 악행을 문죄하고 징벌하는 데 있고,
한편으론 또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의 불쌍한 백성들을 구출하는 데 있거니와,
그러자면 우리 스스로 비행이 없어야 고구려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겠소?
내가 요동에 와서 보니 수나라가 왜 번번이 동정에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가히 알 만하오.
요동의 지세와 성곽은 생각보다 너무 험하고 견고하여 속전이 어려운 데다,
대군을 거느리고 오면 항상 양도(糧道)를 걱정해야 하니 이중고외다.
출병이 늦었지. 내가 장안을 떠난 것이 작년 10월이고 정주를 출발한 것은 금년 3월인데,
벌써 여름이 다 지나고 7월이 되지 않았소?
더구나 요동엔 겨울이 빨리 찾아온다니 언제 제성(諸城)들을 모두 평정하고
남평양의 장안성까지 진격할 수 있겠소?
요동에서 겨울을 맞는다면 여러 모로 낭패가 아니오?”
그는 출정 이후 처음으로 난색을 드러냈다.
이적도 요동의 저항과 반격이 예상보다 강해 내심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이세민이 다시 끊어진 말허리를 이었다.
“관수와 백성들의 저항이 심한 것은 모두 재산과 처자식을 걱정하기 때문이오.
그것만 아니면 성을 들어 항복하려는 곳이 어찌 백암 하나뿐이겠소?
병법에도 적의 성을 치는 것은 하책이요
꾀로 치는 것은 상책이라고 하였으나 그보다 더한 상책은 치지 않고 적을 평정하는 것이오.
우리가 군사를 일으킨 목적을 연개소문 한 사람에게 국한시키고,
항복한 백암성을 본보기로 삼아 백성들을 온전히 보호해주면 다른 성에서도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호응이 있으리라 믿소.
싸우지 않고 성을 얻는다면 시일이 촉박한 우리로선 일거양득이 아니겠소?”
비로소 이세민의 계책을 알게 된 이적은 공손히 허리를 굽혀 말했다.
“연작(燕雀)이 어찌 봉황의 뜻을 짐작이나 하겠나이까.
신은 전적으로 폐하의 고견에 따를 뿐이올시다.”
이때부터 요동을 침략한 당군의 전략에 괄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출병을 결심할 때부터 동정의 명분으로 삼은 것은 연개소문 한 사람이었다.
만물을 주관하여 야산의 나뭇잎 하나에까지 교화를 펴고 덕화를 실천하겠노라던 천자로서
군주를 시해한 역신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게 이세민의 처지이긴 했다.
더구나 고구려의 건무왕으로 말하면 당조의 기반이 아직 허약하던 시기부터
이상스러울 만치 몸을 낮춰 스스로 번국의 신하라 칭하고,
한 해도 조공을 거르지 않았던 갸륵하고 기특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인물이 처참하게 죽었으니 당조를 섬기는 다른 나라의 군주들을 봐서라도
한 번쯤 위엄과 본때를 보여줄 필요는 있었다.
그것이 사해의 중심이요 천하의 근본이라는 중국(中國),
자만으로 가득 찬 정관치세의 주인 이세민이 친히 요동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요하를 건너고 개모성과 요동성을 칠 때까지만 해도 당군들의 태도는
정복욕에 사로잡힌 침략군의 행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신성에서도, 건안성과 비사성, 개모성과 요동성에서도 눈에 띄는 고구려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히 학살했으며,
성을 얻고 나면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부녀자를 함부로 겁탈하였다.
말로는 역신의 학정에 시달리는 가엾은 화외지맹(化外之氓)을 구원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수천, 수만의 양민을 학살하고 야수 같은 군사들을 풀어 온갖 만행을 저지른 꼴이었다.
이 점을 시정하지 않는 한 점점 더 고구려 백성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닥칠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손대음의 일을 통해 이런 사실을 간파한 이세민은 그때부터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장수와 군사들을 단속하고 덕치와 교화를 내세운 너그러운 회유책을 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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