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0
성주 형제를 단숨에 베어 죽인 초배는 두 사람의 목을 자루에 넣고 몰래 허물어진 남문을 빠져나가
당군에 투항했다.
이세민은 초배를 친견하고 투항한 사유를 듣자,
“길조로다! 짐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반드시 너희 부자를 장안으로 데려가 평생 먹고도
남을 식읍을 하사하리라.”
하고 약속하였다.
초배를 통해 성안의 사정을 샅샅이 알게 된 이세민은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화공(火攻)을
쓰도록 지시했다.
“적은 우리의 석공을 막으려고 목재를 잔뜩 실어다가 서남쪽 성루에 쌓아두었다고 한다.
이제 절기는 여름이라 남풍이 흔한 때이므로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날랜 군사들로 하여금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불화살을 쏘게 한다면 요동성은 금방 재가 될 것이다.”
초배가 투항한 뒤로 당군은 남풍을 기다리며 한동안 공격의 고삐를 늦췄다.
그러는 사이에 예기치 않은 일이 한 가지 일어났다.
백제 사신이 마수산 군영으로 이세민을 찾아온 것이었다.
사신으로 온 이는 전에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복신(扶餘福信)이었다.
“부여공이 이 험지에는 어인 일인가?”
이세민은 자신의 막사에서 복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황제께서 친히 예맥(濊貊)의 무리를 징벌하신다기에 신이 본국에 몇 자 글로 전황을 알렸사온데
신의 임금 의자가 황제 폐하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또 번국의 신하된 도리로 신성한 황군(皇軍)의
향도(嚮導)와 전도(前導)가 되지 못함을 애석해하면서 신으로 하여금 금휴개(황금색 갑주)와
현금(玄金:쇠)으로 만든 문개(文鎧:무늬 있는 갑주)를 바치도록 하였나이다.
금휴개는 천상의 옥황이 입는 갑주로 시석이 비켜가는 상서롭고 견고한 옷이며,
문개 또한 살촉 따위는 능히 막을 만합니다.
대방군(백제)의 이 진상품이 폐하의 이번 동정(東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복신은 아뢰기를 마치자 국궁 재배로 예를 표한 뒤 직접 자신이 가져온 선물을 펼쳐 보였다.
그가 상자에서 금휴개를 꺼내 펼쳐드는 순간 갑옷과 투구에서 발하는 찬란한 황금빛이
막사 안을 훤히 비추었다.
기껏해야 갑주 몇 벌로 생색만 낸다 싶어 시큰둥하던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호, 신물이로고!”
이세민도 시자(侍者)를 통해 금휴개를 받아들자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작년 겨울 낙양(洛陽)에 머물 때 사방 번국에 조서를 내려 동정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원조하라는
황명(皇命)을 전하긴 했지만 신라도 아닌 백제가 성의를 보이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물며 고구려와 백제는 동맹까지 맺은 마당이었고, 어쩌면 백제가 고구려를 원조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신하들마저 있었다.
이세민은 만일 백제가 고구려를 원조하면 장안성을 정복한 뒤 이를 빌미로 백제까지 치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였다.
“참으로 귀하고 값진 선물이오.
대방왕 의자에게 짐의 고마운 뜻을 전하시오.
우리가 평양에 입성하면 올 겨울쯤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정을 나눌 날도 있지 않으리.”
“여부가 있겠나이까. 대승을 거두시고 천하를 평정하소서.”
“고맙소.”
복신이 물러간 뒤 시립한 근신들이 이세민에게 물었다.
“여제(麗濟)는 작년에 공수 동맹을 맺었는데
백제는 이제 우리에게 진귀한 갑옷과 투구를 보내왔습니다.
그 상도를 벗어난 반복과 파약의 속사정을 사신에게 물어보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자 이세민은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짐작으로 족한 일을 굳이 물어볼 까닭이 있느냐?
선물까지 들고 온 사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천자의 도리가 아니다.”
군막 밖에는 수백 벌의 문개가 쌓여 있었다.
이세민은 시자를 보내 이적을 불렀다.
이적이 와서 보니 황제의 황금색 갑옷과 투구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이세민이 새 옷을 입고 나와 뽐내는 아이처럼 양손을 허리춤에 걸고,
“어떤가?”
하고 물으니 이적이 장단을 맞추느라 눈살을 찌푸리며,
“뉘시온지요?”
하고 일부러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하다가,
“영국공(이적의 작위)은 숱한 전장을 돌아다녔어도 이런 갑주는 처음 보았지?”
하는 말을 듣고야,
“폐하가 아니십니까?
원, 저는 하늘에서 신장이 내려온 줄 알았습니다.”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백제에서 방금 당도한 옷일세. 빛깔이 좀 죽어서 그렇지 자네 것도 있어.”
이적이 황제를 따라가서 문개를 구경하고 그 재질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본 후에,
“이 정도면 우리 군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하고 기쁜 얼굴로 말하였다.
“마침 잘됐지 뭔가. 가져가서 자네 군사들에게 입히게.
남풍이 불면 당장 화공을 쓸 텐데 장대 끝에 매달려 시석과 싸워야 할 군사들한테는
더없이 요긴한 장비일세.”
그리고 이세민은 갑자기 음성을 낮춰 귀엣말로 이렇게 덧붙였다.
“눈가림으로 금물만 들였을 뿐 실은 이것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생각해보게. 이처럼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갔다간
무슨 수로 살아서 돌아오겠나?
바로 이것이 백제왕 의자의 진짜 속셈일세.
수백 벌 철갑옷 가운데 금휴개를 딱 한 벌만 갖다 바친 것은
나를 표적으로 만들어 죽이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남풍이 불어온 것은 복신이 다녀간 뒷날 오후였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이세민은 날랜 군사들을 동원해 충차의 장대 끝에 매달리게 하고
요동성 서남루를 겨냥해 화공을 퍼부었다.
날아오는 시석을 요리조리 피하며 수백, 수천 명의 군사들이 불화살을 날려대자
성루는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와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성안의 고구려 장수들은 전군을 동원해 불을 끄고 필사의 항전을 벌였으나 갈수록 패색이 짙었다.
성중에서 불을 끄려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당군 10만 명이 운제(雲梯:긴 사다리)를 놓고
개미 떼처럼 허물어진 성벽으로 기어올랐다.
수백 명의 맹졸들은 충차에 매단 장대에서 사다리와 줄을 타고 성루로 돌진하기도 했다.
성의 서남루를 태운 연기와 불길이 계속해서 성안으로만 밀려드니
급기야 화염에 휩싸인 고구려 군사들은 싸움은커녕 눈을 뜨기조차 불가능했다.
더구나 태사 형제의 참변 사실이 알려진 후로 성중의 민심은 극도로 나빠져서
미리부터 짐을 싸서 도망가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안 되겠소. 불길과 연기 때문에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소.”
“죽은 사람이 이미 1만이 넘었소.
군사들을 다 죽일 요량이 아니거든 백암성과 안시성으로 후퇴하여 뒷일을 도모합시다.”
원군 장수들은 그렇게 의견을 모은 뒤 성의 동문을 열고 달아났다.
고하는 신성의 군사들을 이끌고 백암성으로 가고 뇌음신과 온사문은 안시성으로 향했다.
당군은 요동성 싸움에서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을 죽이고, 1만여 명을 포로로 붙잡았으며,
성민 남녀 4만과 양곡 50만 석을 얻었다.
이세민으로선 출정 이후 처음 맛본 유쾌한 대승이었다.
그는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만들고 백성들을 모두 그 땅에 그대로 살도록 조처한 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시급히 백암성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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