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9
이적이 요동성 남문을 공격한 지 12일째 되던 날 이세민도 정병 6만을 이끌고 합세하여
성을 수십 겹으로 둘러싸고 한껏 기세를 올렸다.
당군들의 북소리와 함성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새로 만든 흙산 정상에서는 수백 척의 포차와 충차가 집채만한 바위를 쉴새없이 날려댔다. 흙산 정상에서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은 무려 3백여 보를 지나가서 요동성 성루를 무참히
파괴했다.
당황한 고구려 군사들은 급히 나무로 누각을 만들고 밧줄로 그물을 얽어매어 날아드는 돌을 막으려
했지만 당군의 충차와 거포는 그 누각까지 명중시키고 말았다.
태사와 원군 장수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요동성에도 포차는 있었지만 고작해야 10여 대에 불과했고 그 위력도 당군의 포차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석공(石攻)이 시작되고 단 하루 만에 견고함을 자랑하던 요동성 남쪽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처참하게 부서졌다.
10년 공역을 생각하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성이 파괴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패색에 물든 군사들의 사기였다.
성이 무참히 파괴되자 군사들과 성민들 사이에서는 곧 요동성이 망할 거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밤이 되고 적의 공격이 잠시 숙지근해졌을 때 성주 태사는 성내의 무당을 불렀다.
혼절에서 깨어난 뒤로 그는 하루가 다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무당은 왜 부르시오?”
원군 장수들이 모두 궁금해 묻자 태사는 사뭇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성엔 시조 대왕의 사당이 있고 그 사당에는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소.
전언에 따르면 적이 쳐들어와 성이 위급함에 처할 때 무당으로 하여금 사당에 제사지내고
성의 운명을 점쳐보라는 말이 있으니 이를 한번 알아보려고 그럽니다.”
원군 장수들은 비로소 태사의 진의를 깨닫고 휘하의 군사들을 전부 사당 앞으로 집결시켰다.
잠시 뒤 무당이 나타나 미녀를 꾸며 부신(婦神)으로 만들고 정갈한 음식으로 제사를 올린 뒤 말하기를,
“시조 대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니 성이 반드시 완전할 것이다!”
하였다. 무당이 나타난 뒤로 가슴을 졸이며 그 모습을 지켜본 군사와 성민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를 올려 다시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그로부터 양측의 교전은 사흘 가량 더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은 정작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먼저 진사에게 발목을 잘린 팔신의 둘째아들 초배(樵倍)는
그 아버지가 당한 일을 알게 되자 분함과 억울함을 견디지 못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중국인인 것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우리는 제아무리 이놈의 나라에 공을 세워도 결국은 중국인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더니 우리 신세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무엇 하러 고구려를 위해 싸운단 말입니까?
차라리 성을 들어 당주에게 바치고 그 공으로 장안에 가서 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팔신이 오히려 그런 아들을 만류했다.
“나 또한 너와 마음이 같았지만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만 가지 감회가 절로 이는구나.
하지만 중국인으로 멸시와 수모를 당하는 것도 내 일이지 너희들의 일은 아니다.
나는 이제 살 만치 살았으니 이대로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발이 없어도 명줄이 붙어 있는 한 환자는 볼 수 있다.
그러니 너는 아비가 당한 일을 깨끗이 잊고 너의 길을 가거라.”
“아버지가 중국인이면 저 또한 중국인입니다.
저는 오늘도 당인 10여 명을 베어 죽이고 돌아왔는데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무슨 수로 참겠습니까?”
초배는 팔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칼을 찬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그는 병영에 가서 기회를 엿보다가 짐짓 일이 있는 것처럼 꾸며 진사의 거처로 들어갔다.
진사는 초배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무슨 일인가?”
하고 물으니 초배가,
“성주께서 잠시 관사로 나오시랍니다.”
하고 거짓말을 했다.
진사는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초배를 따라 관사로 향했다.
초배가 진사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와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다가
갑자기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팔신의 일을 기억하는가?”
초배가 묻자 진사는 크게 놀랐다.
“누구냐?”
“나는 팔신의 아들이다.
우리 부자는 그동안 요동성을 위해 가진 힘과 재주를 다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공을 화로 갚느냐?”
그때쯤은 사실 진사도 팔신의 일을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미안하이, 여보게. 내가 그때는 형님의 일로 워낙 경황이 없어 본정신이 아니었네.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너그럽게 용서하시게나. 부친의 일은 크게 잘못되었네.”
진사는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지만 초배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너희 성에 사는 백성을 중국인이라고 멸시하고, 있지도 않은 혐의를 씌워
노인의 발목까지 절단한 중죄를 어찌 한두 마디 말로 씻을 수 있겠는가?”
꾸짖기를 마치자 초배는 칼을 휘둘러 단숨에 진사를 죽이고 그 길로 성주 태사를 찾아갔다.
태사에게는 진사가 큰 병이 나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거짓으로 고했다.
“낮에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무슨 병에 걸렸단 말이냐?”
형제간의 우애가 자별하던 태사는 전후불계하고 초배를 따라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진사가 죽은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이르자
초배의 칼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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