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7
이때 쇳독이 퍼진 태사의 팔뼈를 칼로 깎아내고 환부에 약초를 붙여 치료한 의원은
팔신(八莘)이라는 늙은이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는 수나라가 침략할 때 양광을 따라왔다가
포로로 붙잡힌 중국인이었다.
팔신이 양광의 병을 돌보던 의원으로 종군했으니 의술이야 다시 말할 것이 없었으나
태사의 아우 진사(盡仕)는 형이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자 팔신의 저의를 의심했다.
“그대가 보기에 형님의 상태가 어떠한가?”
“글쎄올시다. 의원의 도리를 다하였으니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길 뿐이지요.”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내 형님께서는 팔 하나를 잃었을 뿐이다.
전장에서 팔다리를 잃는 경우야 흔한데 어찌하여 유독 내 형님만 팔 하나 때문에
목숨까지 잃는단 말이냐?”
“피를 너무 흘리면 누구든 위험한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진사는 팔신이 환자를 살피고 나올 때마다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다가
마침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 역시 태사와 마찬가지로 이방인,
특히 중국인이라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그대의 고향이 장안이랬지?”
“네.”
“장안에 처자가 있다고 했던가?”
“허허, 그야 이미 오래전의 일이지요.”
팔신은 포로로 붙잡힌 이래 요동성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넷이나 낳은 터였다.
그 가운데 큰아들은 의술을 전수해 의원이 되었으나 둘째는 제법 용맹이 있어
일찍부터 검술을 배웠고, 성군에 자원하여 마군 10여 기를 통솔하는 편장(偏將)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신의 처가도 요동에서는 고래로 부유하고 문벌 높은 집안이라 성사(城事)에 이런저런 도움을
주던 처지요,
곡물의 출입을 담당하던 관인 노덕(盧德)이란 자도 바로 손아래 처남이었다.
평시만 같아도 팔신은 결코 의심받을 인물이 아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살벌한 싸움이 사람들을
이상한 쪽으로 몰아갔다.
“장안에 두고 온 처자 소식은 들은 적이 있던가?”
“풍문에 듣긴 했지만 다 잊어버렸습니다.”
“반갑겠구먼.”
“반갑다니요?”
“당군이 쳐들어온 게 그대로선 반갑겠단 말일세.”
“반가울 것도 없고 반갑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고향 소식을 묻고 들을 수 있는 한 고을 사람들이 아닌가?”
“제 고향은 여기올시다.”
팔신이 말끝을 분지르자 진사는 실눈을 뜨고 팔신의 기색을 살폈다.
“솔직히 한번 말해보게나.
그대는 과연 어느 쪽이 이기고 어느 편 군사가 더 많이 죽었으면 좋겠는가?”
올곧게 평생을 산 의원의 오기였을까.
팔신은 꼬치꼬치 파고드는 진사의 의도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뻔한 대답으로 구차하게 자신을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전란이야 승패를 떠나 그 자체로 큰 슬픔이요 불행이지요.
하물며 저는 인술을 펴고 사람의 목숨을 돌보는 의원이올시다.
어서 싸움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 특별히 어느 쪽을 편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정직한 대답이었지만 진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감의 바로 그 마음이 우리 형님을 저렇게 만든 게야!”
진사는 비로소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네가 우리 형님을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요동성을 당군에게 바치려고 하는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터무니없는 모함이오. 나는 꿈에도 그런 마음을 먹은 일이 없소.”
“닥쳐라! 천하에 음흉한 족속이 바로 중국인이다.
너는 지난 신축년(641년)에 진대덕 일행이 요동을 염탐하러 왔을 때도
역질에 걸려 다 죽어가던 당인(唐人) 둘을 감쪽같이 살려내 장안으로 돌려보내더니
이번엔 말을 타고 스스로 성에까지 돌아온 내 형님을 금방 산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독을 썼기에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저 지경이 되어 여러 날이 지나도록
의식조차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냐?”
진사가 따지고 들자 팔신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미 의심이 깊은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을 한들 통할 리도 없을 것이어서
팔신은 잠자코 고개만 가로저었다.
“당장 독을 풀고 처방을 새로 하여 내 형님을 병석에서 일으켜라.
만일 내일까지 형님의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면 내 손으로 너의 목을 치리라!”
진사가 일방적으로 정한 기한이었지만 팔신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밤을 새워 환자를 돌보고 약초를 삶아 수시로 그 물을 입에 흘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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