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6
기가 막힌 도종은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는데 듣다 못한 마문거가 화를 버럭 내며,
“닥치시오! 패장이 무슨 할말이 그리 많소? 나 같으면 칼을 물고 자결이라도 하겠소!”
하고 모욕을 주자 장군예는 대뜸 허리에서 칼을 뽑아 들고,
“네 이놈! 하찮은 도위 따위가 감히 어느 안전에서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대는가?
내 너의 목을 따서 군영의 위계를 바로 세우리라!”
눈알이 벌게서 소리쳤다.
약이 오른 마문거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군영의 위계를 따지는 사람이 목숨이 아까워 도망을 쳤소?
저런 기세로 적장은 왜 베지 못했을까? 여러 말 할 것 없소.
오늘의 패인은 모두 총관에게 있는데 무슨 자격으로 위계를 논한단 말이오?”
구경하던 장수들이 황급히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뜯어말렸지만 설전은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만들 두라!”
급기야 도종이 고함을 질러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장총관은 어서 칼을 거두고 마도위도 그만 입을 다물라!”
마음만 같으면 도종은 그 자리에서 장군예의 목을 치고 싶었지만
황제가 임명한 행군총관이라 자신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당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보군(步軍)을 이끌고 조삼량이 도착한 뒤였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조삼량이 오고 얼마 안 있어 이적도 당기를 휘날리며 요동성에 당도했다.
도종은 이적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함께 요동성 공략에 나섰다.
남문벌에서 벌어진 두 번째 교전에서 도종은 먼저 패한 선군들만 데려나가 고구려 군사들을 안심시켰다.
“우리가 지난번에 저들을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것은 혹시 복병이 있을 것을 염려해서였는데
그사이 며칠이 지나도록 반격하지 않다가 다시 잔병들을 데리고 나온 것을 보면 의심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 같소.”
태사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의견이 같았다.
“소문에는 30만이 요수를 건넜다던데 요동성엔 겨우 몇천 기만 나와 깝죽대는 것을 보니
나머지는 죄 안시성으로 간 모양이오. 어서 저것들을 소탕하고 우리도 안시성으로 내려가야겠소.”
원군 장수들을 대신해 뇌음신이 맞장구를 쳤다.
이들은 군호를 맞춰 일제히 성문을 열고 나가 도종의 마군들을 상대했다.
도종은 잠시 맞서 싸우는 척하다가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남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구려 장수들은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맹렬히 도망가는 적을 추격했다.
그런데 벌판이 끝나고 둔덕이 시작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요동의 적들은 들어라!
황군의 장수 절충도위 조삼량이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갑자기 한 장수가 큰 소리로 고함을 치자
이를 신호로 둔덕 밑에서 수천의 복병들이 일어났다.
마음 놓고 적의 후미를 추격하던 고구려 군사들은 그제야 적의 계략에 빠진 줄을 알았다.
“겁낼 것 없다! 물러서지 말고 당당히 본때를 보여주라!”
“당황하지 말라! 당군은 치졸한 계략에만 밝은 오합지졸일 뿐이다!”
태사와 원군 장수들은 목이 터지게 고함을 지르며 군사들을 단속했다.
시초만 해도 크게 놀라 우왕좌왕하던 고구려 군사들은 장수들의 의연한 모습 덕분에
재빨리 안정을 되찾았다.
곧 달아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무기를 들어 복병들과 교전하니
그때부터 승패를 점칠 수 없는 맹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수천 개의 창칼이 무섭게 허공에서 어울리고 수많은 화살이 비오듯이 날아다니는 싸움터,
비명과 아우성이 귀를 찢고 낭자한 피가 사방을 붉게 적시는 가운데 땅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팔다리가 어지럽게 나뒹구는가 하면, 목을 잃은 몸뚱이가 홀로 말을 타고 달리다가
아무데나 처박히기도 했다.
살을 맞고 가슴을 움켜쥐며 죽어 나자빠지는 자는 그래도 행운아요,
창에 목이 꿰어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무슨 고깃덩이처럼 바닥에 패대기쳐지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방패에 맞아 터지고 말발굽에 짓뭉개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주검도 돌산에 자갈처럼 흔했다.
덜렁거리는 팔다리로 살겠다고 달아나는 자, 눈에 박힌 화살을 고함을 지르며 스스로 뽑아내는 자,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남문벌 둔덕에서는 그날 하루 종일 인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광경들이 속출했다.
군사들은 갈수록 짐승처럼 변해갔다.
장수들의 독려하는 소리나 고막이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도 차츰 귀에 들리지 않았고
그러구러 피아(彼我)의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고 찌르고 쓰러뜨려야 할 뿐이었다.
아침나절에 시작한 싸움이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어찌 승패가 없으랴.
비록 양측이 다 같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오후가 되고 이적이 합류하면서
열세에 몰린 쪽은 고구려 군사들이었다.
태사는 말로만 듣던 이적이 나타나자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울 욕심에 쌍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족히 10합 이상을 겨뤘지만 그는 이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적이 휘두른 칼에 팔 하나를 잃고 말에서 떨어지자 마침 주위에 있던 온사문이 달려왔다.
온사문은 사력을 다해 이적의 공격을 막는 한편 태사가 다시 말에 오르도록 도움을 주었다.
멀리서 이 모습을 본 고하까지 가세하고야 태사는 잃을 뻔한 목숨을 가까스로 얻었다.
온사문과 고하는 이적을 양쪽에서 협공하여 30여 합을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밀리는 느낌을 받자
결국 군사들에게 퇴각을 명령하고 요동성을 향해 달아났다.
두 번째 교전에서 고구려 군사는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팔을 잃은 태사는 성에 돌아오자 혼절하여 급히 의원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며칠 동안 몸이 불덩이 같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주위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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