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5
이튿날이 되자
신성으로 갔던 고하가 원군 2만을 얻어 요동성에 합류했다.
태사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모평을 불러 눈을 부라렸다.
“이래도 다시 막을 것이냐? 막리지께서 우리 성에 보낸 원군이 무려 4만이다.
너의 말을 듣고 있다가는 성문이 파괴되고 성벽이 무너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이 망하게 생겼다.”
태사는 원군 장수들과 더불어 계책을 논의한 뒤 성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도종은 자고 있던 군사들을 황급히 깨웠다.
“드디어 적이 성문을 열고 나왔다! 어서 싸울 채비를 갖춰라!”
하지만 성문을 열고 나오는 군사들을 자세히 보니 숫자가 엄청났다.
도종의 군사는 기껏 4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저토록 많은 군사가 나온 것을 보면 원군이 당도한 게 틀림없습니다.
어림잡아도 우리 군사의 10배는 될 듯하니 차라리 깊은 도랑과 높은 보루를 만들고 뒤로 물러나서
황제의 거가(車駕)가 이르기를 기다리는 편이 옳지 않겠는지요?”
도종을 따라온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의 말에 도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적은 무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저들이 원군이라면 먼길을 달려와서 피곤할 것이니
이럴 때 전력을 다해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
이는 이미 개모성에서도 입증한 바다.”
거기까지 말한 도종은 별안간 장군예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과거 후한(後漢)의 경감16)은 장보(張步)를 토벌하고 왕랑(王郞)을 평정했으며
동마(銅馬)와 적미(赤眉)를 두루 진압했지만 적을 군주에게 남겨주지 않았다.
당연히 적을 깨끗이 소탕하여 길을 치운 다음 승여(乘輿)를 기다려야지
어찌 군부(君父)에게 근심을 끼치게 한단 말이냐?”
장군예가 무참하여 고개를 숙이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도끼를 휘두르며 나섰다.
“적을 치는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강적을 만나지 않고 어찌 장사임을 입증하겠나이까?”
이에 도종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의 용기가 과연 출중하다. 선봉을 맡아 당나라 장수의 위용을 크게 떨쳐보라.”
마문거는 명령을 받자 효기병(驍騎兵) 1천을 이끌고 맹렬히 요동성으로 달려갔다.
요동성 남문벌에서 곧 치열한 기병전이 벌어졌다.
수로는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마문거가 데려간 군사들은 도종의 강하군에서
추리고 추린 승병(勝兵:뛰어난 군사)과 맹졸들이었다.
선군이 숫자를 겁내지 않고 달려가 용맹하게 싸우는 것을 보자 일순 겁을 먹었던 나머지
당군들도 용기를 얻었다.
도종은 개모성을 공취할 때 공이 컸던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와 장군예에게도
1천의 마군을 주고 자신도 그만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가 마문거를 도왔다.
힘과 기예를 겨루며 한때 팽팽했던 양측의 교전은 남문벌 서쪽, 장군예의 군사들이
허물어지면서 명암이 갈리기 시작했다.
장군예를 맞은 고구려 장수는 뇌음신이었다.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난전을 벌이는 사이 엉겁결에 맞닥뜨린 두 장수는
말머리를 어우르며 10여 합을 싸웠으나 귀신도 놀란다는 뇌음신의 화려한 검술을
장군예는 당할 수가 없었다.
“네 이놈!”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사정없이 허점을 파고든 뇌음신의 칼끝에 목덜미를 베인 장군예는
더 이상 싸울 마음을 잃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수가 도망가자 군사들의 사기가 꺾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달아나는 장군예의 등 뒤에서 전의를 상실한 당군 1천여 기가 물살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팽팽하던 접전에서 한쪽이 무너지자 승부는 뚜렷이 갈리기 시작했다.
도종은 벌판 동편에서 태사의 군대를 만나 반나절이나 힘겹게 싸웠지만
양쪽으로 죄어드는 상대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퇴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달아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줄행랑을 치면 기세가 오른 적이 사생결단 뒤를 쫓아올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도종은 경황 중에도 북과 징을 번갈아 치게 하고, 일부러 여유를 부리거나 진격할 태세를 취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보니 당군의 희생은 갑절이나 더 늘어났다.
그는 싸움터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나오자 야산을 의지해 황급히 불을 피우고
흑기(黑旗:당나라 깃발)를 있는 대로 늘여 세워 마치 복병이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런 다음 흙먼지를 피우고 징을 쳐서 나머지 군사들을 불러들였다.
부복애와 마문거가 투구마저 잃고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으나 도종은 그들을 탓할 수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 군사들이 추격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첫 교전에서 절반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혼쭐이 난 도종은 의기소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처음 군영을 설치한 장소에서 20리나 더 서남쪽으로 물러나
높은 곳에 올라가서 다시 진영을 꾸몄다.
“이 모두가 장총관이 달아난 때문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싸울 뜻이 없었던 게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장총관만 아니었어도 이처럼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남은 장수와 군사들은 이구동성 장군예를 원망했다.
그런데 밤이 되자 싸움터에서 제일 먼저 달아난 장군예가 살아남은 1백여 기를 이끌고
털레털레 돌아왔다.
도종이 보니 장군예의 몰골은 마치 맹수가 뜯어먹다가 만 것처럼 가관이라
우습기도 하고 일변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싸움터에서 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군예인들 어찌 패하고 싶어 패했겠는가.”
도종은 대국의 군왕답게 너그러움을 발휘해 장군예를 감싸주려 했다.
그러나 정작 장군예는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이 죽을 뻔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그러기에 중과부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후군이 오면 쉽게 이길 것을 공연히 아까운 군사들만 잃었으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천자를 뵙겠소?”
하고 도리어 도종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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