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3
5월 중순, 이세민은 후군을 이끌고 요택(遼澤:요동성 부근의 호수) 부근에 당도했다.
그러나 주변의 땅이 워낙 질고 험해서 인마의 통행이 어려운 데다 수나라 때 전몰자의 유해가
곳곳에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어 섬뜩한 느낌마저 일었다.
이것이 출정 이후 그가 제일 먼저 접한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군사들과 약조한 요동성으로 가기 위해선 2백여 리나 되는 요택의 진창을 무슨 수로라도
건너야 했다.
그는 유해를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스스로 제문을 지어 말하기를,
“그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자손들이 왔으니
영혼이 있거든 길을 밝히고 장도(壯途)를 음덕으로 환히 비추시오.”
하고는 군사들을 모아놓고 수습한 유해를 가리키며,
“너희들은 벽지 진창에 흩어진 이 골육의 아들들이다. 어찌 복수를 하지 않겠느냐?”
하니 혈기왕성한 젊은 군사들은 대부분 눈물을 뿌리며 결전을 다짐하였다.
제사를 지낸 뒤 이세민은 장작대장(將作大匠) 염립덕(閻立德)을 불렀다.
“땅을 펴고 다리를 만들어 행군을 잠시도 멈추지 않도록 하라.”
황제의 명을 받은 염립덕은 휘하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밤낮없이 수레로 흙을 퍼다 진창을 메우고
인마가 통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근 한 달이나 걸려 어렵게 요택을 지나고 요수를 건너자
이세민은 곧 부하들에게 애써 만든 다리를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요동을 평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다시 요하를 건널 때는 반드시 연개소문에게 직접 다리를 놓게 하리라!”
그는 배수진을 쳐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한편 후군이 요하에서 시일을 끄는 동안 강하왕 이도종의 군사가 제일 먼저 요동성에 도착했다.
도종은 말로만 듣던 요동성을 직접 눈으로 보자 그 견고함에 넋이 팔려 한동안 혀를 내둘렀다.
“저것은 성이 아니라 하늘에 맞닿은 철벽이구나!”
이때 요동성 성주 고태사(高太仕)는 전 성주 고신(高愼)의 아들로,
요동성에서 태어나 요동성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 성정이 호방하고 술과 여자를 좋아했지만
고신이 독살당한 일을 한시도 잊지 않고 중국인이나 거란족이라면 이를 갈았다.
죽은 건무왕이 고신과는 인척간의 우애가 자별했던 터라
고신의 뒤를 이어 태사에게 성주를 맡겼는데,
태사는 건무보다도 을지문덕을 섬겨 전란 뒤에 문덕이 조정에서 내침을 당하자
뒷짐을 진 채 관사를 쏘다니며 좀팽이 같은 임금이라고 욕을 해댔다.
성주가 된 시초만 해도 태사는 을지문덕이 수나라 백만 군대를 물리칠 때
자신의 아버지 고신 장군이 능히 한몫을 해낸 것을 만대에 남을 가문의 영예라며 자랑하고 다녔는데,
건무왕이 줄곧 당나라에 굽히고만 들자 급기야는 공무도 보지 않고 술로 소일하는 날이 많았다.
하루는 조정 대신인 맹진이 장성 공역의 감독관으로 와서 요동성 공역이 지지부진한 것을 책망하니
태사가 저녁에 요동성 서문 성루에 주안상을 차려놓고 맹진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태사가 벌떡 일어나 잔을 든 채 성루를 거닐며 시 한 수를 읊었다.
높은 성엔 차가운 갈가마귀만 모여들고
함부로 자란 풀은 강변을 뒤덮었다
젊어서 세운 뜻은 간 곳을 모르는데
요동성 별빛은 밝기도 하여라
장부는 뜻을 꺾고 늙은이가 되었거늘
하물며 돌덩이로 성은 왜 쌓는가
高城寒鴉集 江邊荒草覆
靑雲何處去 遼城星光白
丈夫折志老 況復石何築
조정의 정책과 왕업의 나약함을 꼬집는 항명의 시구(詩句)였다.
태사는 시를 읊고 나자 손에 든 술잔을 바닥에 팽개치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맹진은 태사의 혈기와 위세에 눌려 더 문책하지 못하고 요동성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임인년에 연개소문이 건무왕을 시해하고 정변을 일으키자
태사는 대번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안시성에서 고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직접 요동성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연개소문을 도왔다.
안시성이 평정된 뒤 개소문은 태사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만일 당군이 침략하면 서로 손발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했다.
“제 소원은 단 한 가지외다.
제발 그놈의 조공사가 수레에 바리바리 방물을 싣고 우리 요동성을 지나다니지 않도록 해주시오.
당이 수씨의 뒤를 이었다면 마땅히 저희들이 조공사를 보내야지 어찌하여 전쟁에서 이긴 우리가
해마다 조공물을 실어 나른단 말씀이오? 돌궐을 보시오.
돌궐의 족장 힐리는 우리보다 훨씬 못한 군사를 가지고도 한때 경주(涇州)와 무공(武功)을 지나
장안의 위수(渭水)까지 쳐들어가서 당을 세운 이연(李淵)으로 하여금 스스로 신하라 칭하며
무릎을 꿇고 오줌을 싸게 만들지 않았소?
막리지께서는 부디 을지문덕 장군과 내 아버지 고신 장군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시오.”
태사의 이런 점은 연개소문의 뜻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개소문은 그런 태사에게 요동성의 방비를 강화해줄 것을 거듭 당부하면서 정책이 바뀌면
전란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강조하였다.
도종의 군대가 요동성에 나타나자 태사는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났다.
그는 휘하의 장수들과 성군 1만을 이끌고 남문에 올라 미리 준비한 시석을 퍼부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까마득하여 현기증이 이는 성루였다.
그곳에서 엄청난 양의 화살과 무거운 돌덩이가 쏟아지자
도종은 황급히 군사들을 뒤로 물리고 성을 공격할 계책에 골머리를 짰다.
이때 연개소문은 요동 9성의 순시를 마치고 박작성(泊灼城)을 거쳐 국내성(國內城)에 머물며
압록수를 이용한 두 번 째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비록 요동에 물샐 틈 없는 방책을 세워두긴 했지만 최악의 경우를 예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십수 년 장성 노역에 시달린 요동의 피로한 장정들이었다.
정변에 성공한 뒤로 지난 이태 동안 그는 요동의 성주와 관수들에게 노역을 일체 중단하고
성고(城庫)를 열어 밥을 배불리 먹이도록 지시했지만 아직은 창칼을 들고 싸울 형편들이 아닌 듯했다.
그는 갈수록 죽은 건무왕의 처사가 괘씸하고 원망스러웠다.
만에 하나 요동이 뚫려 당군이 내지로 들어오면 박작성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전선을 구축해
한겨울까지 버틴다는 것이 개소문의 전략이었다.
그는 4월이 되어 당군이 요수를 건넜다는 보고를 받자 만면에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세민은 천하를 돌며 허세를 부리고 천자의 위엄을 갖추느라 이미 때를 놓쳤다.
요동은 날이 차서 10월이면 강물이 어는 곳인데 4월에 요수를 건너 언제 요동을 정벌한단 말인가!
두고 보라, 그는 반드시 패하여 쥐새끼처럼 초라한 몰골로 되돌아갈 것이다!”
개소문은 근심하는 여러 장수들 앞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사정은 그의 낙관처럼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6장 요동(遙東)정벌 5 (0) | 2014.11.03 |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4 (0) | 2014.11.03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2 (0) | 2014.11.02 |
제26장 요동(遙東)정벌 1 (0) | 2014.11.02 |
제25장 여제(麗濟)동맹 24 (0) | 2014.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