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2
비록 골육을 해쳐가며 황제가 된 공통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주 이세민은
수나라의 양광(楊廣)과는 여러 면에서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제업(帝業)과 치세(治世)의 비교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휘하엔 재사와 명신, 군사와 책사,
장수와 호걸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황제인 자신이 병법과 지략에 밝고, 용병술에도 뛰어났으며,
20세 전후엔 숱한 싸움터를 전전하며 적과 싸워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던 출중한 장수였다.
그는 한동안 정주에 머물며 사방 각지로부터 모여드는 군사들을 기다렸다.
군대가 도착하면 그는 주성(州城)의 북문 망루로 가서 친히 그들을 환영하고 위로했다.
그럴 무렵 한 병졸이 갑자기 병이 나서 천자를 알현할 수 없게 되자 이세민은
직접 그 병졸을 찾아가 고통을 묻고 주현(州縣)의 의원을 불러 치료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를 본 장수와 군사들은 천자의 보살핌에 감동하여 더욱 결의를 다졌다.
정주를 출발할 때 이세민은 스스로 활과 화살을 몸에 차고 우의(雨衣)를 말안장 뒤에 옭아맸다.
동정(東征)에 나서는 그의 각오가 어떠한지를 새삼 알 만한 대목이었다.
이때 당군의 전략은 첫째도 속전(速戰), 둘째도 속전이었다.
“수씨의 잘못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요동에서 시일을 너무 오래 끈 것이
가장 큰 패인(敗因)이다.
많은 군사로 적은 적을 치려면 군량과 마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일이 으레 가장 큰 골칫거리다.”
이세민은 출정에 앞서 장수들에게 그렇게 강조했다.
“늦어도 석 달 안에는 반드시 요동을 장악해야 한다. 제장들은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하라.”
당군은 지난날 양광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크게 네 패로 군사를 나눠 요하를 건너기로 계획했다. 수나라 때와는 시작부터 사뭇 양상이 달랐다.
요동 공격의 최북단을 맡은 장수는 이적, 나이가 많아 따라오지 못한 노장 이정과 더불어
자타가 공인하는 당조 최고의 명장이었다.
정관(貞觀:당태종 이세민의 연호) 이래 거의 모든 싸움터엔 그가 있었고,
말을 타고 나가서는 단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어 이세민으로부터
곧잘 한신(韓信:前漢 초기의 제후)과 백기(白起:전국시대 秦나라 명장 공손기)에
비유되곤 하던 그였다.
4월에 이적이 거느린 정예는 유성(柳城:조양)을 떠나 크게 위세를 떨치며
회원진(懷遠鎭:광령)으로 나오는 것처럼 꾸몄다가 몰래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지름길로 향했다.
건무왕이 스스로 갖다바친 봉역도와 몇 해 전에 진대덕이 직접 염탐한 자료들을 통해
요동의 지세를 샅샅이 꿰뚫고 있던 당군들이었다.
이적의 군대는 옛날 양광이 설치한 통정진(通定鎭)으로 가서 수나라 군사들이 만들어놓은
용도(甬道)라는 곳을 통해 요하를 건넜다.
용도는 강을 건널 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덤불과 담장으로 위장한 길이었다.
요하를 무사히 건넌 이적의 군대는 불과 수일 만에 요동 9성12)의 하나인 현도성(현토성)에 도착해
성문이 바라뵈는 곳에 진을 쳤다.
비슷한 시기, 부총관인 강하왕 도종도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도종의 부하인 절충도위 조삼량(曹三良)은 마군(馬軍) 10여 기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을 공격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 또한 호병(胡兵) 3만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달려가
미처 싸울 태세를 갖추지 못한 고구려군 수천 명을 잡아 죽였다.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의 선발대가 육지에서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눠 신성, 현도성, 건안성을
공격하는 동안 평안도행군대총관 장량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동래(東萊:요동반도 내주만)를 출발,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했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었고 그나마 오를 수 있는 곳은 서문(西門)뿐이었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와 장량의 부장인 정명진(程名振)이 서로 공을 다투며
서문으로 기어올라 남녀 8천 명을 죽이고 비사성을 함락시켰다.
요동의 최남단인 비사성을 함락시킨 장량의 군사는 곧 건안성을 향해 북진했다.
장량이 요동의 최남단에서 공을 세울 동안 요하의 최북단을 맡은 도종과 이적의 군대는
이렇다 할 전과가 없었다.
신성 앞에서 여러 날 성군과 대치하던 도종은 시일에 쫓기자 성을 포기하고 하는 수 없이
현도성으로 내려갔다.
현도성 앞에서 역시 날짜만 보내던 이적도 황제와 약조한 군기를 생각하면 조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현도성에서 만나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9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했다.
개모성 주변의 자성들이 원군을 내어 돕자
이적은 선봉이 패하여 자칫 전군의 사기를 꺾을까 우려해 황제의 대군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자 도종이 말했다.
“안 됩니다.
적군은 개모성의 위급함을 구하려고 멀리 왔으므로 모두 지쳐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니
한번 맞붙어 싸우면 능히 무찌를 수 있습니다.
선봉은 제가 맡겠으니 장군은 뒤를 받쳐주십시오.”
이적은 하는 수 없이 도종의 의견을 따랐다.
개모성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당군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펼치며 분투했으나
도종이 수백 명의 마군을 이끌고 종횡무진 좌우를 뚫자 형세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에 이적도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 크게 무찌르고 나오자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개모성은 본래 요동의 소문난 곡창 가운데 한 곳이었다.
이적과 도종은 개모성의 남녀 1만여 명을 사로잡고 덤으로 양곡 10만 석을 취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이들은 관리를 세워 개모성 일대를 개주(蓋州)로 만든 뒤 군사를 이끌고 황제와 약조한 요동성으로
향했다.
가히 전광석화와도 같은 총공세였다.
요하를 건넌 뒤 당군의 발빠른 움직임은 도처에서 맹위를 떨치며 요동 전역을 싸움터로 몰아갔다.
9성은 산발적인 당군의 파상 공세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군이 요수를 건넌 지 불과 두 달 만인 5월, 9성 가운데 개모성과 비사성이 함락되었다.
그런데 애당초 이세민이 요동에서 승부처로 삼은 곳은 요동성과 안시성(安市城)이었다.
9성 종렬의 한복판인 그 두 성곽만 수중에 넣는다면 요하로부터 군량과 마초를 실어 나를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으니 더 이상 시간에 쫓길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만 된다면 요동 전역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했다.
이는 대륙에서 지속적으로 많은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던 당군으로선 당연한 전술이었고,
실제로 돌궐과 고창국, 토번국 등을 정벌할 때 써온 그들의 전통적인 병책이기도 했다.
이세민은 요하를 건너기에 앞서 4군 장수들에게 군기(軍期)를 약정하고 6월 초순에
모두 요동성에서 만날 것을 지시해둔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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