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요동(遙東)정벌 1
김유신이 백제를 상대하여 홀로 고군분투할 무렵 요동에서는 마침내 고구려와 당나라 간에
사직과 국운을 건 결전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을사년(645년) 정월,
요동도행군대총관 이적(李勣:李世勣)이 거느린 선발대는 유주(幽州:북경)에 당도했다.
3월에 당주 이세민은 정주(定州:하북성 정현)에 이르러 다시 장정들을 징발하며
다음과 같이 요동 정벌의 취지를 밝혔다.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인데 수씨(隋氏:수양제)는 네 차례나 출사하고도 이를 취득하지 못하였다.
짐이 지금 동쪽을 정벌하려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해선 군부(君父)의 수치를 씻어주고자 할 따름이다.
또한 사방을 대략 평정하였으나 이곳만은 평정하지 못한 까닭으로,
짐이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의 여력을 빌려 이를 취하려 한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그렇게 교시를 내리고 출정의 취지를 설명함으로써 장부들을 소집했다.
즉위 초부터 권좌에 눈이 멀어 형제를 죽인 것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던 당주였다.
항상 천자의 덕업(德業)과 삼라만상의 교화(敎化)를 강조해온 그로서 어딘지 모르게
자신이 젊은 날 행한 현무문의 난과 비슷한 연개소문의 행동을 징벌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주인으로서 위엄이 서지 않는 일이었고, 그런 명분이 아니고선 앞으로 요동을
공격할 기회 또한 더 이상 얻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세민의 이런 대의명분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과 지지를 받았다.
5제와 3왕의 전설에나 나올 법한 꿈같은 치세 19년,
하늘보다 높고 신보다 존엄한 천자가 직접 천하의 비리와 패도를 다스리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힘깨나 쓰고 무기깨나 만져본 대륙의 장정들은 저마다 황군(皇軍)이 되려고
황제가 머무는 성읍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편 고구려 조정에서 이와 같은 전란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것은 그 전해 겨울,
연개소문은 자신이 보낸 백금을 당주가 받지 않고 물리쳤을 때부터 이세민의 흑심을 간파했다.
그는 만조의 문무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이 백금을 보낸 것은 우리가 백제와 동맹을 맺은 이후 장안의 속셈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이제 선물도 거절할 뿐 아니라 사신까지 잡아 가두는 것을 보면 세민의 저의가 한밤에 켜둔
등촉처럼 명백해졌나이다.
저들은 얼마 아니 있어 틀림없이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개소문의 말에 임금과 신하들은 사뭇 사색이 되었다.
“하면 이 노릇을 어찌합니까? 백제와는 공연히 동맹을 맺지 않았는지요?”
임금이 묻자 개소문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명분에 불과합니다.
신은 저들이 돌궐을 칠 때부터 다음은 요동이 침략당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이다.
다만 아직은 오랜 노역에 시달린 요동의 장정들에게 다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부과할 일이 걱정스러워 어떻게든 당조의 환심을 사서 시일을 끌고자 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
일변 생각하면 신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가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개소문의 태도는 너무도 태연해서 그를 태산처럼 믿던 임금과 신하들조차도
한편으론 의구심이 일 정도였다.
“과인과 조정이 막리지에게 의지하는 바는 새삼 말할 것이 없으나 천하를 수중에 넣었다고
호언하는 당나라요 또한 이세민이 아닙니까?
정말 그가 쳐들어올 것 같으면 시급히 무슨 방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지요?”
“물론입니다. 신은 지난 2년 동안 다섯 차례나 요동을 다녀왔고 또 한 번 요동을 가면
길게는 반년씩이나 걸린 적도 있어 그 날짜를 모두 꼽아보니 1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도성에 있은 날은 불과 석 달입니다.
따라서 조정 대사에는 더러 모르는 것이 있어도 요동의 일이라면
아무개 관수(官首) 집의 제삿날까지 알고 있나이다.
그런 신에게 어찌 방책이 없겠나이까.
전하께서는 신을 믿고 지금까지 해오신 대로 국법과 제도를 손질하고 백성들이
감동할 올바른 정사를 펴주시면 될 것입니다.”
개소문이 비록 안심을 시켰지만 나이 어린 보장왕은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인 한겨울에 개소문이 임금에게 와서 말했다.
“작년에 당군이 요동으로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이정(李靖)과 위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신과 한때 막역지간으로, 이정은 진왕의 사저에서 함께 병서를 읽었고
위징은 은태자의 휘하에서 서책을 관리할 때부터 신과 가깝게 지낸 사람입니다.
이들은 옛날부터 신을 잘 알고 또 두려워하여 그동안 진왕이 요동으로 군사를 내려 할 때마다
이를 극구 만류하였는데, 얼마 전에 위징이 병으로 죽고 이정마저 몸져누웠으니
날이 풀리고 봄이 되면 이세민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제 신이 요동으로 떠나면 내년 겨울에야 다시 돌아올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때까지 강녕하소서.”
“천하를 발 아래 복속시킨 당나라 군댑니다.
만일 전쟁이 난다면 어찌 내년 겨울에 막리지를 다시 보리라 반드시 장담할 수 있겠는지요?”
임금은 이미 예측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다시금 놀랍고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러자 개소문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공손히 대답했다.
“이세민이 비록 천자라고 우쭐대고 그 휘하엔 제법 병서를 읽은 장수들이 있지만
신의 눈엔 그 모두가 한낱 말을 탄 허수아비로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신이 보기에 진왕에게는 세 가지 계책이 있는데,
첫째 요동으로 군사를 낼 욕심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요,
둘째는 적은 군사로 정병을 선발해 이정이나 이적 같은 장수에게 맡겨
우리 성곽을 오랫동안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중책이며,
마지막으로 지난날 양광이 그랬듯이 수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왕 스스로가
정벌에 나서는 것이 하책입니다.
하지만 대개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치려고 할 때는 위엄을 갖추고 허세를 부릴 욕심으로
대군을 동원하는 것 또한 물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군사의 규모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것이지요.
물론 평지와 초원으로 연결된 나라를 치는 데는 그것이 먹힐 수도 있지만
당나라와 우리 사이에는 요수가 있고, 성과 산이 끝도 없이 펼쳐진 요동의 험지 장벽이
또한 1천 수백 리에 이릅니다.
많은 군사를 동원하면 할수록 식량의 보급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은 시일에 쫓겨 스스로 궁지에 빠지는 자충수가 될 뿐입니다.
진왕이 어떤 계책을 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만 어떤 계책이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두었으니
전하께서는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
더 솔직히 아뢰면 신은 부디 진왕 스스로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주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나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세민은 틀림없이 양광의 전철을 고스란히 되밟을 것이니
전하께서는 오히려 기뻐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보장왕은 개소문의 설명을 듣자 비로소 약간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인이 해야 할 일은 없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하께서는 내정에만 힘을 쏟으시면 됩니다.
내신 유자는 을지문덕 장군의 양자이며 전조의 충신 귀유공의 친자로 신과는
피와 살을 나눈 형제 같은 사람이고, 주부 고운(高雲)과 신의 어리석은 가제(家弟) 정토(淵淨土)도
하문에 대답할 정도는 되는 사람들입니다.
신은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에 대비해 세상의 비난을 무릅써가며 칼에 피를 묻혔나이다.
요동의 일은 신이 다 알아서 할 것이옵니다.”
개소문은 장안성을 출발하기 전에 궁성의 신묘에 가서 참배하며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묘당에 엎드린 그의 얼굴엔 사뭇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개소문은 배웅을 나온 을지유자에게 도성의 일을 당부한 뒤 자신이 직접 훈련시킨 병부 군사
2만과 고정의(高正義), 뇌음신(惱音信), 온사문(溫沙門), 고하(高河) 등의 장수를 거느린 채
요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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