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20
백제로부터 7성을 빼앗고 가혜나루를 되찾은 김유신은 8천 군사를 동원해 새로운 국경을 만들고
성곽을 손보느라 겨우내 하루도 쉬지 못했다.
임금에게는 인편에 승전보를 전하고 성을 보수할 역부를 청했더니
여주는 크게 기뻐하며 예작부(例作府)의 인원 3백여 명을 보내주었다.
유신은 이들을 데리고 일곱 성곽을 차례로 수리하였는데, 스스로 돌을 져서 나르고 나무도 깎았다.
다른 장수들은 처음부터 그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도 당연히 몸을 사리지 않았지만
실추된 명예를 노역으로 만회하겠다며 홀로 적화성에 떨어졌던 흠돌은 부하들만 부릴 뿐
제 손으로 연장 하나 들지 않았다.
11월에 예작부 감독관이 적화성에 와서,
“7성 가운데 적화성 공역이 제일 늦은 이유를 알겠소.”
하니 딴에는 연일 고함을 질러가며 열성을 다한 흠돌이 깜짝 놀라,
“우리 성 공역이 제일 늦다니, 그게 참말이오?
혹시 제일 빠르다는 말이 잘못 나온 게 아니오?”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감독관이 웃으며,
“작대기 집어 들고 고함만 지른다고 일이 됩니까?
윗사람이 솔선수범을 보여야지요.
저기 위쪽에선 이 엄동에 장수들이 옷을 벗고 비지땀을 흘립디다.
1만 역부를 통틀어 제일 열심인 사람은 바로 김유신 장군이오.”
하고 말하자 흠돌이 그 자리에서 당장 웃통을 벗어 제치고,
“비법을 일러줘서 정말 고맙소.”
말을 마치자 황소 같은 힘으로 공역을 거들었다.
이찬 진골의 아들인 흠돌이 글 하는 집안에 늦둥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은 안 읽고 싸움질에 힘자랑만 하니 그 어머니조차도,
“내가 저런 별종을 무얼 하러 낳았는지, 할 수만 있다면 도로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다.”
하며 혀를 차곤 했는데 하루는 외척인 동갑내기 문충이 와서 흠돌의 기운 쓰는 것을 보고
병부로 데려갔다.
그때 병부대감으로 있던 김유신이 흠돌을 만나보고,
“지금 나라엔 글 하는 사람보다 너와 같은 아이가 더 필요하다.”
하며 자신의 밑에 두고 열심히 가르쳐 장수로 삼았다.
집안에서 늘 따돌림을 받던 흠돌이 김유신을 만나고는 날마다 잘한다는 칭찬만 들으니
그때부터 사는 재미가 나서,
“나를 낳아준 건 부모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김유신 장군뿐이다.”
하고는 아예 집을 나와 병부 훈련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김유신을 만난 뒤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흠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새로 얻은 땅은 원하는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으므로 적성(敵城)을 취하고 나면
대개는 그곳에서 살려는 지원자가 적잖이 모여들었다.
그에 반해 땅을 잃으면 이재민이 늘어나서 민심은 금방 흉흉해졌다.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는 데 따라 백성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승리한 장수는 하루아침에 영웅이 되지만 패장은 민심이 먼저 용납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라 조정이 적성 일곱을 공취하고 주민을 모집한다는 방을 내걸자 백성들간에는
김유신이 명장이라고 찬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성곽 보수 공사가 끝난 직후 나라에서는 희망하는 자들을 새로 얻은 땅에 보내어 살게 하고
신임 성주도 뽑았다.
이 모든 일을 처리한 뒤 김유신이 군사들을 이끌고 금성으로 향한 것은
이듬해인 을사년(645년) 정월이었다.
그런데 유신의 군대가 압독주를 지나갈 때 소천의 처인 장미가 길가에 나와 구경꾼들
틈에 섰다가 급히 제 서방에게 달려가 뭐라고 소곤거렸다.
소천이 그 말을 듣고 금세 안색이 변하더니 군대가 금성 경계로 접어들 무렵 유신에게 가서,
“금성에 가시거든 집에 먼저 들러봅시오. 나리께서 편찮으신 모양입니다.”
걱정스러운 낯으로 귀띔을 했다.
유신이 깜짝 놀라며,
“어디가 얼마나 편찮으시다더냐?”
하니 소천이 제 처한테 들은 말이라며,
“인사불성이 되셨다가 풀려난 지 며칠 되지 않으셨는데 아마도 풍병인 듯하답니다.
마님께서도 지난달에 본댁에를 가셔서 아직 금성에 그대로 계신답니다.”
하였다. 유신이 침통한 얼굴로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흠순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라.”
그렇게만 당부하고 입을 다물었다.
개선군이 금성에 당도해 아직 임금도 배알하지 못했을 때 매리포성(買利浦城:거창)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백제가 대군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여주는 김유신을 다시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매리포성으로 급파했다.
매리포성은 그동안 유신의 군대가 주둔했던 가혜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대야성을 공취한 후 임금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남역을 맡아 다스리던 백제 장수 윤충은
미처 응대할 겨를도 없이 졸지에 7성을 잃고 나자 바득바득 이를 갈며 역습의 기회를 엿보았다.
“신라 따위가 감히 우리를 상대로 선제공격을 한 것이 나는 무엇보다 불쾌하다.
김유신이란 자는 대체 어떤 자인데 잠자는 범을 집적거린단 말인가?
내 필히 그 자의 목을 취하여 강국을 침략한 약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줄 것이다!”
그는 온 겨우내 대야성에서 군사를 훈련시켰다가 추위가 한풀 꺾인 정월이 되자
1만의 군사를 동원해 접경의 매리포성을 공격했다.
성주 김함(金銜)은 김유신이 상수를 살 때 용화향도를 이끌던 부순(芙純)의 아우였다.
그는 군사와 성민들을 동원해 시석을 날리며 저항하는 한편 급히 봉화를 올리고
조정에도 사람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윤충의 군대가 성곽을 포위하고 쇠뇌와 충차까지 동원해 성문을 공략하자
김함은 결사항전으로 이를 막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성주가 죽고 성이 막 함락되려 할 때 북쪽 금물성(今勿城:김천)의 원군 1천 명을 이끌고
부순이 들이닥쳤다.
그는 아우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백제군과 싸웠지만 역시 중과부적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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