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21
신라군의 형세는 점점 불리해지고 성이 함락되는 것은 이제 필지의 일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흰옷에 갈포 망건을 쓴 생면부지의 젊은이가 부순을 찾아와 자신에게
말 탄 군사 몇 명만 달라고 말했다.
“성문은 어차피 충차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부서질 것입니다.
제게 약간의 군사만 내어주시면 성문을 열고 나가 적을 죽일 수 있는 데까지 죽여보겠습니다.”
부순은 그 젊은이의 말이 황당무계하게 들렸지만 사정이 급박하니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겠는가?”
“두고 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것 역시 나중에 말씀을 드리지요.”
부순이 금물성에서 데려온 마군 1백 명을 주자 젊은이는 그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고 달려갈 테니 그대들은 뒤를 따라오며 앞은 신경 쓰지 말고
양옆의 적군들만 베어 넘겨라.
그렇게 몇 번만 적군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면 기세는 많이 꺾일 것이다.”
이어 젊은이는 자신이 가져온 창 한 자루를 움켜잡고 말 위에 우뚝 올라탔다.
“자, 겁낼 것 하나 없다. 내가 가는 길로만 따라오면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젊은이가 성문을 열고 적진으로 뛰어들자 마군들도 황급히 그 뒤를 따라갔다.
부순이 절반은 미심쩍고 절반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 젊은이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성문을 열고 나간 젊은이를 중심으로 적군의 무리가 갈라지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뱃길에 바닷물이 갈리듯 했다.
부순은 입을 쩍 벌리고 혀를 내둘렀다.
“나는 천하의 용화향도를 거느리고도 아직 저와 같은 용맹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저 청년은 누구란 말인가!”
수천 군사가 운집한 곳을 허허벌판의 무인지경을 달리듯 말을 타고 뛰어다니는 젊은이 때문에
한껏 치솟았던 백제군의 위세는 급격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창에 찔려 죽거나 상하는 사람이 속출하자 주변에 있던 자들은 무기를 거꾸로 잡고 달아나기에 바빴고, 그 바람에 진중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저 자가 혹시 김유신인가?”
성곽 맞은편에 단을 쌓고 절도봉을 휘두르던 윤충이 자신의 진중을 어지럽히는 젊은이의 무예에
한동안 넋을 팔고 있다가 부길을 보고 물었다.
“글쎄올시다.
거리가 멀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김유신이라고 믿기엔 너무 젊은 것 같습니다.”
“김유신이 아니라면 소문난 오합지졸 가운데 또 저런 자가 있다니
신라가 과연 달라지긴 달라진 모양이구나.”
하지만 윤충도 언제까지나 그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네가 나가서 저 자를 상대해보겠느냐?”
부길은 윤충의 명령을 받고 즉시 말을 달려 나갔다.
그는 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곳에서 젊은이가 달려오는 방향을 잡고 기다렸다가
칼을 높이 뽑아 들고 외쳤다.
“멈춰라! 감히 어디서 오두발광을 하는가!”
하지만 젊은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창을 휘둘러 부길의 칼과 한두 차례 맞닥뜨리기만 했을 뿐
이내 말머리를 다른 쪽으로 돌려 보군의 무리를 짓밟았다.
부길이 기를 쓰고 젊은이를 뒤쫓아갔으나 숲 속의 뱀처럼 무리 속을 휘젓고 다니는
그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두어 차례 오가며 백제 진중을 쑥밭으로 만들고 다시 성안으로 사라졌다.
금방 무너질 것 같았던 매리포성에 기사회생의 기미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백제 군사가 성을 치려고 모여들기만 하면 성문을 열고 나타나 한껏 진중을 유린하다
사라지곤 했다.
그 바람에 백제군은 근 열흘이나 매리포성 앞에 발이 묶여 있었다.
“안 되겠다. 그물을 던져 저 자를 생포할 수밖에 없다.”
윤충이 그렇게 마음을 먹었을 때 금성에서 원군이 당도했다.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김유신을 보자 아우를 잃은 부순은 눈물을 흘리며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살았네! 그대가 왔으니 내 아우의 원수도 능히 갚을 수 있겠네!”
유신은 부순으로부터 성주 김함이 죽은 것과 낯선 청년의 활약상을 전해들었다.
“아직 성이 온전한 것은 모두가 저 젊은이 덕택일세.”
부순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청년을 칭찬했다.
유신이 궁금하여 그 청년을 만나보니 자신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라,
“뉘 댁의 자제인가?”
하고 물었다.
청년은 그제야 자신의 이름이 군관(軍官)이며,
전조의 잡찬 벼슬을 지낸 일우(日羽)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갈문왕 백반을 섬겼으므로 저는 그저 변방에 나와 농사나 짓고 살았는데
제가 사는 곳이 위태로우므로 창을 들었을 뿐, 다른 욕심은 없나이다.”
김유신은 그를 크게 치하하고 말했다.
“전조의 일을 새삼 거론해 무엇하겠는가?
설혹 선대에 약간의 허물이 있었다 해도 이번에 그대가 세운 공은 그 허물을 덮고 오히려 남음이 있다.
하니 이 난리를 평정하는 대로 우리와 같이 금성으로 가세나. 임금도 아시면 크게 기뻐하실 걸세.”
유신은 성루로 나가 백제군의 형세를 눈여겨 살핀 다음 장수들에게 말했다.
“적군은 그 숫자가 많은 것만을 믿고 보군을 앞세우고 마군으로 둘러싸서 성문을 들이치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이쪽에서 벼락같이 군사를 내어 역공을 하면 뒤에 둘러싼 마군들이 저절로 울타리가 되어
군사들이 쉽게 달아날 수 없으므로 자연히 희생이 클 수밖에 없다.
지금 적군은 우리가 온 것을 알지 못하니 갑자기 들이치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어 그는 휘하의 장수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며 군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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