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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여제(麗濟)동맹 17

오늘의 쉼터 2014. 11. 1. 21:27

제25장 여제(麗濟)동맹 17

 

 

 

서쪽은 고봉준령이 막아섰으니 방법은 그뿐이었지만 동화성으로 가자면 미친 듯이 도망쳐왔던 길을

도로 돌아가야 하니 그 또한 걱정이었다.

진가가 단안을 내리지 못해 울상을 짓고 서 있을 때였다.

“백제군은 들어라. 김유신의 의제 소천이 이곳에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살고 싶은 자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 버릴 테다!”

낙담한 백제군에게 등 뒤에서 들리는 소천의 목소리는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무섭기만 했다.

마군들이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신라군 수백 명이 이들을 에워싸고 찔러 죽일 태세를 취했다.

용케 그 위기를 벗어나도 남쪽에는 다시 김유신이 버티고 있을 테니 진기문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항복하면 처자를 해치지 않을 텐가?”

“물론이다.”

“좋다.”

어차피 싸울 무기도 없던 진기문이었다.

성주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본 마군 1백여 기도 항전을 포기하고 순순히 오라를 받았다.

소천은 이들을 전부 밧줄로 묶어 가혜성으로 데리고 갔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마침 동풍이 분 것은 가혜성이 떨어진 날 초저녁부터였다.

진주는 유신이 말한 대로 동화성 근처 야산에 군막을 쳤다.

과연 야산에는 밤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밤도 잎도 다 떨어지고

수목이 차츰 메말라가고 있었다.

진주는 2천 군사를 데리고 숲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공터를 찾아 축국(蹴鞠:일종의 축구)도 하고, 수박(手搏:일종의 권투) 대회도 열었다.

그러다 산짐승이 눈에 띄면 사냥질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마다 연기를 피우며 밥도 지어 먹고 활로 짐승이나 새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희희낙락 놀자판에 시간이 오래 머물 리 없었다.

그러구러 9월이 지나고 10월이 되었다.

앞서 가혜성의 경우처럼 동화성 망꾼들도 야산에 나타난 적군의 정체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양국이 사이만 좋다면 가서 뭘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동화성 성주 부여성(扶餘星)은 망지가 본국에 와서 낳은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는 부여장이 살았을 때 조정에서 덕솔 벼슬까지 지냈으나 신왕이 즉위한 후 공성신퇴(攻成身退)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남역의 한 성곽을 맡아 다스리고 있었다.

“도대체 저것들이 무엇을 하러 나온 자들이냐?”

“글쎄올습니다. 허구한 날 저희끼리 낄낄거리며 놀다가 밥을 지어 먹고 잠을 자는 게 고작이니

보면 볼수록 요상한 느낌만 더합니다. 가서 물어보고 올까요?”

“우리를 치러 나온 군사는 아니렷다?”

부여성도 처음 며칠은 밤나무 숲에 자꾸 신경을 썼다.

“에이, 설마요.

저것들이 우리를 치러 온 군사라면 다른 건 고사하고 밤나무도 웃을 판이지요.

저 군막 쳐놓은 꼴을 좀 보십시오.

복장들은 또 어떻구요.

갑옷 입고 무기 든 놈도 좀체 뵈질 않습니다.”

“본래 신라군은 소문난 오합지졸들이니 저런 꼴로 싸우러 왔을 수도 있지 않겠니?”

“싸우러 온 놈들이 왜 밤나무 숲만 끼고 놉니까요? 밤나무랑 싸우게요?”

“허 참, 궁금한지고……”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고 대엿새가 지나자

성주는 물론이고 망꾼조차도 더 이상 그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국경 밖에서 저희끼리 노는 것을 상관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이 바뀌고 동풍이 처음 일던 그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망꾼이 망루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홀연 매캐한 연기에 눈을 떠보니

동편 야산에 시뻘건 불길이 보이고 정체불명의 적들이 사방팔방으로 달아나는데,

졸던 눈을 비비고 유심히 살폈더니 군막도 그대로 두고, 끼고 살던 밥솥도 팽개치고,

오로지 불길과 연기만 피해 허둥지둥 도망가느라 여념들이 없었다.

“저것들이 또 무엇을 구워 먹다가 급기야는 산불을 낸 모양이구나.”

그 모습을 본 망꾼이 배를 움켜잡고 한참을 웃다가 눈물까지 질금질금 흘리며

성주를 찾아가 겨우 말하니 성주도 듣자마자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래, 야산 불길이 우리 성까지 번지지는 않겠더냐?”

한참 뒤에 가까스로 웃음을 그친 성주가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물었다.

“거리가 제법 한참입니다요.

먼산 불구경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니 안심하십시오.”

망꾼이 짐작대로 말한 것을 성주도 믿고 그대로 넘어갔는데,

그 망꾼이 보고를 마치고 망루로 돌아오니 그새 불길이 제법 거세게 변해 있었다.

“어따 그놈의 불 한번 활활 잘도 탄다.”

자고로 구경 중에야 불구경만한 것이 없어 망꾼이

오늘 횡재했다고 턱까지 괴고 앉아 불에 정신이 팔렸다가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제야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초만 해도 수건자락 같던 불길이 어느새 속곳자락, 치맛자락처럼 펄럭이며

점점 하늘 높이 치솟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동풍이 불어 이러다간 동화성까지

불구덩이가 되지 않을까 갈수록 겁이 났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연기가 죄다 성으로 날아들어 망조차 볼 수 없는 지경이 되니

망꾼은 성주에게 달려가서,

“불이 수상합니다.

미친놈들이 하필이면 동풍 부는 날 불을 내는 바람에 아무래도 성이 탈 것 같습니다.”

하고 고하였다.

성주가 바깥으로 나와 연기 속에서 눈을 비벼가며 동쪽 숲을 보다가,

“메마른 숲에 불길 번지는 것이 꼭 마른논 물 잡아먹는 것 같구나.

성민들을 깨워 불을 꺼야지 별수 있느냐.”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동원하여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싶어 부여성이 해치(解治)라는 장수를 보고,

“성민을 동원하기 전에 네가 먼저 군사 약간을 데려가서 야산 주변을 살피고 오너라.”

하여 해치가 먼저 성문을 열고 나가 불붙은 야산으로 조심조심 접근을 했는데,

가면서 보니 길에 밥그릇도 보이고, 깃발도 보이고,

부러진 창과 화살 같은 것도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해치가 성으로 돌아와 사정을 말하고,

“불낸 놈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난 흔적이 역력합니다.”

하므로 부여성도 그제야 의심을 거두고 성의 인력을 총동원하여 불을 끄는 데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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