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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여제(麗濟)동맹 16

오늘의 쉼터 2014. 11. 1. 21:19

제25장 여제(麗濟)동맹 16

 

 

 

“왜 그러시오?”

장수들이 의아해하며 묻자 진기문이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무 멀리 쫓아왔네. 이것이 속임수라면 어떻게 할 텐가?”

“원 참, 속임수는 무슨 속임수요? 하여간 형님은 너무 소심한 게 탈이오.”

성주를 비웃는 다사의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너희는 달아나는 적군을 쫓지 않고 여기서 무얼 하느냐?”

처음 듣는 목소리에 장수들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가슴까지 수염을 늘어뜨린 장수가 마상에 늠름하게 앉아 마치 어린애를 대하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자상한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장수들이 기겁을 하고 돌아서며,

“누구냐?”

하고 반문하자 그 장수는 평시에 말을 하듯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금관의 후예이며 계림의 양장(良將)인 용화 김유신이다.

백제로부터 가혜성을 되찾으려고 왔다.”

간단히 말을 마치자 칼을 빼들고 장수 다섯을 동시에 노려보는데

그 눈빛이 좀 전과는 사뭇 달라 기가 질렸다.

김유신이 왔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던 백제 장수들은 우선 김유신이란 말에 놀라고,

눈앞에 나타난 인물이 과연 소문대로 위엄을 갖춘 영걸처럼 보여 두 번 놀랐다.

그때 장수들을 뒤쫓아온 마군 1백여 명의 모습이 뒤에 나타나자

용기를 얻은 부리가 창을 꼬나 쥐고 앞으로 나섰다.

“거타주에서 벌구라는 명궁을 단번에 벤 부리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그대가 내 손에 걸린 것은 천복이다. 고통 없이 목을 베어줄 것이니 오히려 내게 감사하라!”

부리는 겁을 주자고 한 말이었으나 상대는 곧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면 눌최를 죽인 자도 너였더냐?”

“눈치 한번 비상하구나.”

부리가 짐짓 거짓말로 대답하자 유신은 다짜고짜 말배를 걷어차며 부리를 향해 돌진했다.

부리는 황급히 창을 길게 늘어뜨려 유신을 막으려 했지만 어느새 창끝을 피한 유신이

무섭게 달려들며 천지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똑똑히 들어라! 눌최도 벌구도 다 나의 아끼는 낭도였느니라!”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부리의 목은 피를 뿌리며 땅바닥에 굴렀다.

“네 이놈!”

부리가 죽는 것을 본 다사가 눈이 뒤집혔다.

다사는 부리와 서로 처를 바꿔 지낼 만큼 사이가 각별했다.

흥분한 다사의 칼이 매섭게 상대의 가슴을 파고드는가 싶었지만 그 역시 유신의 적수는 아니었다.

보지도 않고 등 뒤로 내리친 칼날에 팔이 베이고 내처 돌아서며 정면으로 휘두른 번개 같은 솜씨에

그만 목이 떨어졌다.

“귀신의 솜씨다!”

다사와 부리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거의 동시에 죽는 것을 본 백제 장수들은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쫓아온 마군 1백여 명이 장수들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성주 진기문이 생각하니 성안의 장수와 군사들을 거의 데리고 나왔으므로

이대로 물러난다는 것도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는 흑치모와 백문두에게 말했다.

“우리 셋이 동시에 저 자를 공격하는 건 어떻겠나?”

두 장수는 성주의 제안이 께름칙했지만 뒤에서 부하들이 보고 있었다.

“좋시다. 까짓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소?”

흑치모가 도끼를 매만지며 결의를 다지자 백문두도 칼을 뽑아 들었다.

이어 세 장수는 어지럽게 말을 타고 돌며 상대의 시야를 흐리다가 진기문의 구령에 맞춰

동시에 무기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유신의 칼이 진기문의 칼날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는가 싶었다.

짧은 순간 그 광경을 목격한 흑치모와 백문두는 옳거니 하고 사정없이 도끼와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진기문의 칼이 갑자기 허공으로 높이 치솟았고 그것이 흑치모와 백문두가 이승에서

본 마지막 풍경이었다.

두 사람은 진기문의 칼이 왜 갑자기 하늘로 솟구쳤는지 끝내 이유를 알지 못했다.

 칼을 잃은 진기문은 손가락이 떨어져나갈 듯이 욱신거렸다.

상상도 하지 못한 무서운 완력이었다.

19세에 무관이 되어 삼십 수년간 싸움터를 떠돌며 크고 작은 공을 세운 그였지만

칼을 잃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런 일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창졸간 다시 장수 둘을 잃고 외톨이가 된 그에게는 오직 살아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돌아가라! 우리 성으로 모두 돌아가라!”

진기문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자신도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고 달아났다.

마군 1백여 기가 일시에 말을 돌리느라 사방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여기저기에서

저희들끼리 뒤엉켜 넘어지고 쓰러지는 자가 속출했다.

어지러운 비명과 말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진기문은 발등이 얼얼하도록 말 배를 걷어찼다.

김유신인지 부하들인지 계속해서 누군가가 자신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었지만

이미 겁에 질린 진기문은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내내 당장이라도 시퍼런 칼날이 목덜미를 내리칠 것만 같아 몇 번이나

머리털이 쭈뼛거리고 모골이 송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가까스로 가혜성 앞까지 달려온 진기문은 성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새 성루의 깃발이 바뀌고 낯선 군사들이 망루에 잔뜩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아, 이게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인가……”

진기문이 성루에 나부끼는 신라군의 깃발을 쳐다보며 난감해하고 있을 때

돌연 한 장수가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성주는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딜 그처럼 바쁘게 돌아다니시오?”

성문 망루에서 그를 맞이한 사람은 어처구니없게도 문영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문 주위에는 이미 한 차례 치열한 교전을 증명하듯

군사들의 시신이 참혹하게 널려 있었는데, 대부분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큰일났습니다, 장군! 어서 남쪽으로 달아나 동화성에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은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동화성에서 후일을 도모합시다!”

뒤따라온 마군들이 소리쳤다.

“성에 갇힌 처자는 어찌한단 말이냐……”

진기문은 크게 한숨을 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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