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15
때는 추수를 끝낸 지 달 반쯤 뒤였다.
신라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성안에서는 연일 흥겨운 연회가 벌어지고,
성주와 장수 부인네들은 자고 나면 모여서 떡을 찐다,
술을 빚는다,
아무 날짜에 배가 들어오면 항포에 노리개와 장신구를 사러간다 부산을 떨어댔다.
그 재미를 못 볼 판이니 여인네들은 서방 그림자만 보이면 성밖 형세는 어떠한지,
신라군은 얼마나 되는지,
도대체 한 줌도 안 되는 적군은 왜 무찌르지 않는지 집집마다 부아가 돋고
욱기가 치밀도록 꼬치꼬치 캐묻곤 했다.
“나는 그놈의 전쟁이 싫어. 지긋지긋해.
배를 타고 어디 전쟁 없는 나라에 가서 살았으면 좋으련만.”
아낙들은 공공연히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았고 단맛에 물든 아이들조차
전쟁놀이 대신 연회놀이나 장사치놀이, 하다못해 절에 중놀이를 하며 놀았다.
“며칠만 더 지켜보세.
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으니 제풀에 지쳐 물러갈 수도 있지 않겠나?”
진기문은 나이든 성주답게 신중했다.
그는 젊은 장수들을 달래며 계속해서 성밖의 동태를 주시했다.
그러구러 날짜가 흐르고 달이 바뀌었다.
그래도 까마득히 보이는 신라군의 모습에선 별다른 징후가 엿보이지 않았다.
체계 없이 쳐놓은 군막도, 아무렇게나 벌여 세운 깃발도 처음에 보던 그대로였다.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이따금 웃음소리도 들려오고,
간혹 비파를 뜯는 소리 뒤에 박수가 터져 나올 때도 있었다.
망꾼 중에는 진중에 여자가 얼씬거리는 것을 봤다고 우기는 자까지 나타났다.
말을 타고 나와 까부는 놈이라곤 시종일관 김문영 하나뿐이었다.
“대체 당신은 언제까지 더 기다릴 셈이우? 이제 보니 천하의 진아무개도 늙었구려.
저따위 오합지졸이 겁나 군사를 내지 못하다니
만일 이 사실을 대궐에서 알면 받지도 못할 큰상이 내릴 게라.”
본처가 죽고 두 번째로 들인 성주의 아내는 스무 살이나 어린 사비성 여자였다.
그러잖아도 촌구석에 처박혀 산다고 불만이 심했던 그는 평소 관인의 처첩들과 어울려
뽐내고 물건 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바야흐로 연중 형편이 가장 넉넉하다는 팔구 월 상달,
더구나 보리누름 풋바심에 희멀건 풀떼기를 끓여 먹을 때부터 감평현(-平縣:순천)
갯가에 상선 들어오면 사달라고 부탁한 물자가 약속대로 고룡군(古龍郡:남원)에 당도했다는
전갈을 받고도 여러 날을 발이 묶여 가지 못하니 겨울잠 자고 나온 독사처럼 바짝 약이 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여편네 등쌀에 송신해 못살겠구나!”
견디다 못한 성주 진기문이 드디어 벌컥 화를 내고 장수들을 소집했다.
소란을 떤 지 근 열흘이 넘었지만 다른 성에서 특별한 기별이 없는 걸로 미뤄 적군은
눈에 뵈는 것이 전부인 게 확실했다.
“기왕 군사를 낼 거면 한꺼번에 나가서 확 쓸어버리세.
저 정도면 반나절 공사도 안 되지 않겠는가?”
성주의 말에 장수들은 한결같이 싱글벙글했다.
그들은 득달같이 성문을 활짝 열어 제치고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을 각기 장수 수대로 나눠
바깥으로 나갔다.
이를 본 신라 군사들은 미처 군막을 걷을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동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백제군은 마군을 앞세워 토끼몰이를 하듯 신라군을 사방에서 뒤쫓았다.
뿔뿔이 흩어졌던 신라군이 말을 타고 맹렬히 쫓아오는 백제군의 위세에 놀라
막 한곳으로 모이려 할 때였다.
“이놈들, 이제야 성문을 열고 나왔구나!”
잔뜩 기세가 오른 백제 마군들 앞을 별안간 한 장수가 막아섰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연일 성문 앞에서 핏대를 올리며 시끄럽게 굴던 문영이었다.
그를 보는 순간 백제 장수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네 나라엔 먹을 게 없어 뇌성을 삶아먹었더냐?
오늘 이후론 두 번 다시 그 주둥이를 놀리지 못할 것이다!”
제일 앞선 부리가 이를 갈며 창을 휘둘렀다.
전날 거타주에서 종명궁 벌구를 죽였던 부리의 창날이 아슬아슬하게
문영의 목덜미를 스쳐 가는 순간이었다.
“네 이놈, 감히 어디서 하찮은 창질이냐!”
벼락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나타난 장수가 부리의 창날을 창으로 가로막았다.
“김유신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모든 사람이 보니 그는 말쑥한 얼굴에 건장한 체구인데 소문에 듣던 김유신이라고 믿기엔
나이가 젊어 보였다.
그 장수가 웃으며,
“한낱 가혜성의 졸개 따위를 치는데 어찌 대장군의 힘을 빌리랴.
똑똑히 기억하라,
나는 김유신 장군의 의제(義弟)인 소천이다!”
말을 마치자 잽싸게 창을 휘둘러 부리를 공격했다.
엉겁결에 부리가 창으로 맞섰으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이를 본 흑치모가 도끼를 휘두르며 부리를 돕자
저쪽에서는 문영이 현란한 검술로 소천을 엄호했다.
네 장수가 말을 타고 돌아가며 정신없이 몇 합을 겨루고 났을 때였다.
갑자기 소천이 창을 거두어 남쪽으로 달아나자
문영도 덩달아 말머리를 돌리더니,
“다음에 보자!”
하고는 납작 말등에 몸을 엎드려 그대로 도망갔다.
바짝 약이 오른 백제 장수들이 이를 두고 볼 리 없었다.
장수들이 싸우는 사이에 신라군의 모습은 거의 뵈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으나
백제군은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얼마나 뒤쫓았을까.
벌판이 끊어지고 소폭의 개천이 나타난 뒤에야 진기문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멈춰라!”
그는 힘차게 팔을 휘둘러 추격을 제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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