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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여제(麗濟)동맹 5

오늘의 쉼터 2014. 10. 31. 16:02

제25장 여제(麗濟)동맹 5

 

 

“아뢰옵니다. 사직의 기초를 논하기로 들면 방금 대왕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7백 년 전의 일이옵고, 그 뒤로 세월은 흐르고 풍습은 변하여 말과 글이 다르고

문물과 제도가 바뀌었으니 이는 마치 오얏나무와 복사나무가 같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같으며,

산에 사는 범과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둘이 아니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옵니까?

백제는 마장수 서동이 나타난 후 삼한을 토평하겠다는 가당찮은 꿈에 취해 시시각각 우리를 군박케

하였으며, 그가 죽자 이번엔 그 아들 의자가 아비의 뒤를 이어 군사를 키우고 병장기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동의 비이자 의자의 모후는 우리나라의 공주였으니 만일 인연을 따지기로 들면 저희인들

어찌 살뜰함이 없으오리까?”

춘추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의자는 모후의 나라를 쳐서 그 백성을 무참히 잡아 죽이고, 관수의 목을 잘라 가족들에게 보내며,

우리의 항구를 봉쇄하여 뱃길을 가로막으니 그 잔인함과 무도함이 금수보다 나은 것이 없나이다.

만일 우리가 의자의 말발굽에 짓밟혀 사직을 잃게 된다면 그 다음은 대왕의 나라를 공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의자가 대왕께서 말씀하시는 사직의 기초를 생각하는 인물이라면 어찌 모후의 나라를

그토록 잔인하게 짓밟겠나이까? 부디 대왕의 밝은 눈으로 전후시말을 통촉해주사이다.”

신왕은 춘추의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끄덕였으나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낭비성과 칠중성을 되돌려주면서 10만 군사를 청하는 일은 당치 않다.”

춘추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신 또한 도둑놈 심보를 가지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대군을 청하면서 성곽 두 개를 논하오리까.

낭비성과 칠중성은 신을 따뜻하게 맞아준 보답으로 드리려는 것이옵고,

실은 양국이 군사를 내어 백제를 토벌한 뒤엔 한수 이북의 땅을 모두 돌려드리겠다는

우리 임금의 약조가 있었나이다.”

그러자 신왕은 사뭇 놀라는 눈치였다.

“한수 북녘을 모조리 돌려주겠다고? 그것이 사실인가?”

“어느 안전에서 감히 거짓을 아뢰겠나이까.

신이 금성을 떠나올 때 이미 임금과 조정으로부터 전권을 결재할 자격을 얻어왔으니

합의문을 만들 수 있으면 우리 임금을 대신해 서명하겠나이다.”

신왕은 그제야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사정은 다르구나.”

하지만 이 일도 그는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물러가서 기다리도록 하라. 조만간 다시 불러 가부의 결정을 내릴 것이다.”

일의 진행이 답답했지만 춘추 또한 사정을 짐작하던 바라 잠자코 편전을 물러났다.

그가 객관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시 졸고 있으려니

도해가 나타나서 다시 대궐로 가자며 급하게 보챘다.

춘추와 훈신이 재입궐하려고 서두르자 도해가,

“작은 사신께선 그대로 있고 큰 사신만 입궐하란 분부이시오.”

하고 훈신에게 객관에 있을 것을 말하였다.

도해가 춘추만을 데리고 편전에 이르니 왕은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연 화난 사람처럼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마목(麻木)과 죽령(竹嶺:경상도와 충청도 경계) 서북은 본시 우리 땅이다.

만약 이를 돌려준다면 동맹을 맺고 합의문을 지을 것이나, 거기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대는 백제를 토벌한 후에 땅을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그것을 무슨 수로 믿는단 말인가?

하니 반드시 먼저 돌려주어야 군사를 움직일 것이다.”

하였다.

춘추로선 경악할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대왕마마, 신은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 동맹도 맺기 전에 땅부터 돌려달라고 하시며, 그것이 또한 마목과 죽령이라니요?

이는 신에게 나라를 모두 팔아먹으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온지요?”

“마목과 죽령 서북을 돌려주더라도 백제가 망하면 남역이 전부 신라의 수중에 들어가니

과히 손해 볼 일은 아니지 않은가?

사신은 잘 생각해서 말하라.

전권을 결재할 자격이 있다고 그대 입으로 말했으니

이 자리에서 서명만 하면 내일이라도 우리는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불가합니다. 나라의 땅은 한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춘추가 강력히 항변했으나 신왕은 오히려 이상한 트집을 잡고 나왔다.

“그대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을 보니

그렇다면 세간에 도는 소문이 맞는 말이구나.”

“소문이라니요?”

“그대는 동맹을 핑계로 우리나라에 왔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형세를 염탐하러 온 것이 아닌가?”

느닷없는 질문에 춘추는 말문마저 막힐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그런 의심을 하시옵니까?”

“하면 어찌하여 객관을 벗어나 도성을 샅샅이 살피고 심지어 향산까지 가서

산곡간의 동태를 엿보았단 말인가?”

“마마, 그것은 시일이 지체되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고

또한 신이 객관을 벗어날 때마다 일거일동을 모두 관에 알려 허락을 얻고 다녔나이다.

법도를 어긴 사례가 하나도 없으니 궁금하시면 친히 확인을 해보시옵소서.”

춘추가 땅에 머리를 박고 통곡하듯 변호했지만 왕의 태도는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확인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할 까닭이 있는가?”

“억울하옵니다!”

“마목과 죽령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대의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대는 염객이요,

염객을 살려 보낼 수는 없는 법이다.

합의문을 짓고 서명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그리 알라!”

왕이 단호하게 말끝을 분질렀다.

춘추가 사색이 되어 몇 차례나 거듭 항변했지만 이미 결심을 굳힌 왕이었다.

그는 춘추에게 합의문에 서명할 것을 윽박지르다가 춘추가 말을 듣지 않자

크게 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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