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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여제(麗濟)동맹 3

오늘의 쉼터 2014. 10. 30. 15:52

제25장 여제(麗濟)동맹 3

 

 

그러구러 장안성에 온 지 한 달하고도 다시 보름이 되었다.

김유신과 약조한 날이 두 달이니 이제 남은 기한은 고작 보름,

만일 그사이에 결판이 나지 않으면 김유신은 틀림없이 일이 잘못된 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 게 뻔했다.

“막리지께선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소?”

춘추는 선도해만 눈에 보였다 하면 젖먹이 젖 찾듯이 그렇게 묻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막리지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도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춘추는 뛸 듯이 기뻤다.

“아마 내일쯤 상신께서 친히 객관으로 오실 것 같습니다.

하니 오늘밤은 편히 주무십시오.”

도해가 말한 이튿날 저녁 무렵, 과연 춘추가 묵던 객관으로 연개소문이 찾아왔다.

작달막한 체구에 양옆으로 떡 벌어진 어깨, 돌덩이처럼 단단해 뵈는 그 모습은

 영락없이 장안에서 같이 지내던 개소문이었다.

“여어, 오랜만이오 요동 아우님! 그간 잘 계시었소?”

춘추가 활짝 웃으며 한껏 팔을 벌리고 다가서자 연개소문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반갑게 뛰어와 춘추를 얼싸안았다.

“이거 죄송합니다.

금성 형님께서 오셨다는 말은 진작에 들었으나 급사가 생기는 바람에 오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결례야 어디 큰일이오. 급사부터 해결을 해야지. 그래, 가셨던 일은 해결이 잘 되었소?”

“안시성 성주의 아들놈이 모반을 일으켰지 뭡니까?

이놈을 내 손으로 잡아죽이고 오느라 시일이 며칠 더 걸렸습니다.

이제 모두 평정이 되었으니 해결이 잘된 셈이지요.”

“하하, 아우님은 언제 봐도 기상이 씩씩해서 좋소.

과연 젊어서 장담하시던 대로 요동의 맹주가 되시었소그려.”

두 사람이 한동안 붙잡고 선 채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나자

개소문은 춘추에게 대궐로 갈 것을 제안했다.

“20년 만에 만난 회포도 풀고 그간의 결례도 사죄할 겸 왕궁에 만조의 백관들이 다 모인

성대한 주연을 마련해두었습니다.

가서 오늘은 만사를 다 잊고 실컷 즐기십시다.

특히 오늘 주연엔 형님의 춥고 쓸쓸한 잠자리를 데워줄 아름다운 미인들도 잔뜩 초청을 해두었습니다.”

마음 같아선 주연 따위는 그만두고 당장 미뤄온 일부터 가타부타 결판을 내고 싶었지만

예의가 그게 아니었다.

춘추는 바쁜 속내를 감추고 기쁜 마음으로 주연에 참석하자고 굳게 마음을 도슬렀다.

그날 대궐에서 벌어진 연회는 전날 임금이 주관한 것보다 훨씬 더 성대하고 화려했다.

물론 그날도 시초엔 임금이 나와 있었지만 곧 몸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고,

연회는 개소문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춘추는 그 자리에서 말로만 듣던 연개소문의 위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임금 앞에서도 저희끼리 농담을 지껄이던 만조의 문무 백관들은 연개소문의 시선이 닿자

당장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눈빛 하나, 손짓 한 번에 조정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가공할 권위가 아닐 수 없었다.

춘추에겐 문득 20년 전 장안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불과 엊그제까지 서로 입에 든 밥을 내어먹을 만큼 가까이 지내던 이세민이

형과 아우의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현무문에서 제압하자 대뜸 개자식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리곤 몇 해나 동고동락하던 자신이나 성충에게조차 온다간다 말 한 마디 없이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좋게 말하면 주관이 뚜렷하고 과단성이 있는 인물이지만 나쁘게 보면 속을 종잡을 수 없는

위험한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생각하자

춘추는 까닭 없이 불안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하하, 무엇을 하시오? 어서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형님!”

연개소문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옆자리에 앉은 춘추를 공공연히 형님이라고 불렀다.

오히려 춘추가 조정 대신들 보기에 미안할 정도였다.

“막리지께서 저를 이토록 환대하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춘추는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자 개소문이 버럭 역정을 냈다.

“이거 왜 이러시오?

형님이 내 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면 이곳에서 정한 나의 법도를 따라야 할 게 아니오?

내가 호형을 하는데 언제까지 그놈의 막리지 소리만 되풀이할 거요?”

개소문은 요동의 반란을 진압하고 온 때문인지 몹시 기분이 들떠 있었고,

일찍부터 술에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했다.

춘추는 그가 너무 취했다고 판단했다.

“사신에겐 사신의 도리가 있는 법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하나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그 마음만은 고맙게 간직하리다.”

“이런, 정말 술맛 떨어지는군 그래! 여봐라,

무희를 불러 춤을 추도록 하라! 그래야 다시 술맛이 살아날 것 같구나!”

연개소문이 고함을 치자 미리 준비한 무희들이 나타나 풍악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춘추는 언제부턴가 술자리가 바늘방석처럼 불편했다.

어떻게든 개소문과 유쾌한 기분으로 헤어져야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풍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틈을 타 개소문의 옷자락을 가만히 잡아당겼다.

“약주가 너무 과하지 않았는가,

아우님? 기분을 좀 푸시게나. 춘추는 아우님의 진심을 잘 알고 있다네.”

그러자 연개소문은 술잔을 집어던지며 와락 춘추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형님이 무슨 일로 왔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가 서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합친다면 세상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소?”

춘추는 연개소문이 비록 취했지만 예전 스무 살 저쪽의 순수했던 마음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구나 싶었다.

“고마우이. 실은 나도 자네를 믿고 여기까지 왔다네.”

“그런데, 형님.”

두 사람이 나누는 귀엣말은 풍악소리에 묻혀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게 꼭 한 가지가 있소.”

“말씀을 해보시게.”

“형님은 당주 세민형과 절친한 사이가 아니오? 왜 그쪽으로 가지 않고 우리한테 오셨소?”

춘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당조가 우리 삼한 땅에 들어와서 좋을 일이 있겠는가? 뒷감당을 어찌하려구.”

그는 연개소문을 믿고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하, 역시 내 예상이 정확했소.”

연개소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니까 형님도 세민형의 본성을 통연히 꿰고 있다는 얘기요.

그는 입만 열면 정도(正道)를 말하고 순리를 논하지만 실은 형제를 한꺼번에 주살할 만큼

위선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지요.

겉 다르고 속 다르기로 치면 천하에 그런 사람 둘도 없을 게요.

아니 그렇소?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풍악소리와 함께 궁정의 밤하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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