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4
호탕하게 웃던 개소문은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팔을 들어 풍악을 그치게 하고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호위병을 들게 하라, 어서!”
개소문의 고함소리에 놀란 호위병들이 창칼을 들고 들이닥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연회장의 말석에서 술을 마시던 한 사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을 붙잡아 당장 참수하고 그 수급을 은쟁반에 담아 가져오라!”
흥겹던 좌중엔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감돌았다.
놀란 사내는 마시던 술잔을 떨구며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고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호위병들이 그를 포박하여 데리고 나가자 연개소문이 말했다.
“저놈은 고민(高旼)이란 자로 이번에 난을 일으킨 고준의 사촌 형이다.
그는 고준이 반란하자 안시성에서 내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고준을 사로잡을 계책을 알려주면서
그 대가로 조정의 벼슬 자리를 요구했다.
나는 그의 계책에 따라 고준의 난을 평정했고 또한 고민이 성안에서 내응한 공도 작다고는 할 수 없어
도성으로 데려왔는데, 지금 곰곰 돌이켜 보니 저놈은 도둑놈 심보를 가진 자가 틀림없다.
어찌 그따위 성곽 하나를 들어 바치며 만군을 통솔할 수 있는 소형 벼슬을 요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 성곽은 고민의 것도 아닌 본래 우리 땅이다.
우리나라의 땅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대가를 요구하다니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하니 어찌 참수형으로 다스리지 않겠는가!”
개소문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뒤 호위병들은 쟁반에 사내의 머리를 담아가지고 들어왔다.
개소문은 쟁반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죽은 사내의 머리를 향해,
“자네는 억울할지 몰라도 이치가 아니 그런가?”
하고 물었다.
물론 수급이 대답을 할 리 만무했다.
“됐으니 그만 가지고 나가라.”
개소문은 호위병을 물리치고 다시 연회를 진행시켰다.
비파와 오현(五絃)이 울고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무희는 춤을 추었지만 이미 춘추는 흥이 깨진 뒤였다.
누가 보더라도 개소문의 말과 행동은 자신과 신라 조정을 향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개소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술과 음식을 권하며
다정하게 귀엣말을 늘어놓았지만 춘추에겐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향기로운 술과 기름진 음식은 독과 같았고, 앉은 자리는 시종 바늘방석처럼 불편할 뿐이었다.
연회는 늦게 끝났다.
만취한 개소문은 춘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객관까지 따라와 잠자리를 보살피고
객고를 풀라며 아리따운 여인까지 붙여주었지만 춘추로선 그저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다.
헤어질 때 개소문은 춘추를 보고,
“걱정하지 말고 푹 주무십시오.
제가 우리 임금께 잘 말씀드려 일이 순조롭게 성사되도록 힘을 써보겠습니다.”
한번 더 강조했다.
그 모습을 본 훈신은 개소문이 떠나고 나자,
“아까 주연에서 고민을 참수할 때만 해도 저 역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지금 막리지의 태도를 보니 어쩌면 그 일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닐까요?”
하고 말했다.
“글세……”
춘추로서도 종잡을 수 없기는 훈신과 매한가지였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샌 춘추에게 이튿날 아침 도해가 찾아와 말했다.
“임금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입궐하시지요.”
춘추는 훈신과 함께 급히 의관을 갖추고 도해를 따라 입궐했다.
편전에는 간밤 주연에서 얼굴을 익힌 몇몇 신하들이 배석해 있었지만
정작 막리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훈신은 말석에 앉고 춘추가 임금의 앞으로 나가 두 번 절한 뒤,
“신라 사신 김춘추 대령이오.”
하니 임금이 사뭇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과인은 그간 여러 신하들과 의논을 해보았으나 그대의 지난번 말이 매우 무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낭비성과 칠중성은 본래 우리 것인데 그것을 그대 나라에서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주며
10만 군사를 청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리에 맞지 않다.
더욱이 백제와 우리는 같은 시조를 섬기는 형제국이다.
그 나라에서 제사를 받드는 동명 임금은 우리의 시조 대왕이며,
그 때문에 전조의 호태 대왕과 장수 대왕 시절에도 천하를 우리의 말발굽 아래 복종시켰지만
유독 백제만은 멸하지 않고 군장을 잇고 제사를 받들도록 선처한 바 있다.
그에 비하면 그대 나라는 우리와 처음부터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이웃 나라일 뿐이다.
만일 시류를 논하며 동맹을 맺자면 서로 신뢰할 만한 제안이 오가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춘추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는 임금의 말이 실은 임금의 입을 통해 나온 연개소문의 뜻임을 확연히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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