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7
춘추의 글을 받아 읽어본 왕은 크게 기뻐하며 연개소문을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국경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첩자로 신라에 숨어 들어간 덕창(德昌)이란 중으로부터 김유신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로 쳐들어갈 거라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춘추가 고구려로 들어가서 60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유신이 휘하의 정병 3천 명을 뽑아놓고 말하기를,
“자고로 위태로움에 처하여 목숨을 걸고, 어려운 일에 몸을 바치는 것은 열사의 뜻이라고 한다.
또한 대장부 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면 백 사람을 당하고, 백 사람이 죽기로 들면
천 사람을 당하며, 천 사람이 죽음을 불사하면 만 사람을 당하는 법이다.
이렇게 되면 곧 천하를 횡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어진 재상이 다른 나라에 잡혀 돌아오지 못하는데
우리가 무엇이 두려워 어려운 일을 해내지 못하겠는가?”
하니 이 말을 들은 장정들이 일제히,
“비록 만 명이 죽고 한 명이 살 수 있는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장군의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김유신이 몇 년째 병부대감을 살며 도성에서 키워낸 정병 가운데서도 가장 출중한 군사들이었다. 유신은 군사들의 각오를 확인한 뒤 곧 임금에게 가서 윤허를 구하니
춘추의 일을 걱정하느라 침식을 거르며 고민하던 여주도 당석에서 출정을 허락하였다.
“김유신이라면 낭비성에서 우리 장수들의 목을 감나무의 감 따듯이 취한 명장이 아닙니까?
그런 자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다니 이쯤에서 그만 사신을 보내주도록 합시다.
하늘의 해를 두고 맹세한 글도 이미 받아두었지 않습니까?”
왕이 개소문과 의논하니 개소문도 춘추의 글을 읽고 나서,
“김유신이란 자가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공연히 군사를 내어 싸울 까닭은 없지요.”
하고서,
“다만 전하께서 김춘추를 후하게 예대하여 그의 맺힌 마음이나 풀어서 돌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보장왕은 객관으로 급히 도해를 보내 춘추와 훈신을 대궐로 불러들이고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말했다.
“사신의 뜻은 잘 받아보았소.
그간에 결례가 있었다면 용서하오.
과인이 국정을 살핀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사신을 의심하는 자들의 말만 듣고
미처 인국에 대한 예를 돌아보지 못하였소.
이제 사신이 마목과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주기로 하늘의 해를 걸고 굳게 맹세하였으니
어찌 딴마음이 있는 것이겠소?
돌아가시거든 약속대로 이행하여 하루빨리 합의문을 짓고 양국이 힘을 합쳐 백제를 칩시다.
이곳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은 너그럽게 잊어버리시오.”
왕은 자리를 옮겨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진수성찬을 마련하고 두 사신을 대접했다.
그런 다음 동맹의 신표로 예맥검(濊貊劍) 한 자루와 과하마(果下馬) 두 마리를 선물로 주고
장군 안고(安固)에게 국경까지 전송하도록 지시했다.
수레에 오른 춘추가 안고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궐을 나와 얼마만큼 남쪽으로 왔을 때
갑자기 뒤에서 한 패의 군마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사신은 잠시 가는 길을 멈춰라!”
등뒤에서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춘추는 혹시 왕의 마음이 변했을까봐 가슴이 철렁했다.
앞서 가던 안고가 뒤를 돌아보더니 행렬을 정지시키고 말에서 내렸다.
“사신께서는 잠시 밖으로 나오셔야겠습니다.”
안고가 수레로 다가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막리지께서 오십니다.”
춘추는 연개소문이 온다는 말을 듣자 더욱 불안했다.
잠시 뒤 투구를 쓰고 갑옷을 갖춰 입은 앙바틈한 무장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려 춘추에게 다가왔다.
놀랍게도 그는 몸에 다섯 자루나 되는 칼을 차고 있었으며, 그가 나타나자
모든 장수와 군졸들이 일제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형님! 인사도 없이 그렇게 가시깁니까?”
투구 속에서 얼굴을 드러낸 사람은 과연 연개소문이었다.
“성밖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다가 이제야 형님이 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지 뭐요?
인사도 없이 떠나시다니 이거 정말 섭섭합니다그려.”
객관에 갇혔을 때 그토록 만나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던
그가 오히려 춘추를 원망하듯 말했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장안을 들락거리며 만인을 상대한 춘추가 그 정도의 빈말에 당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거 내가 곡해를 했구먼.
나는 아우님이 들어 나를 풀어주는 줄 알았소.
객관에 갇혔다가 죽을 뻔한 것을 아우님이 살려주는 게 아니었던가?”
춘추가 노련하게 받아치자 개소문의 안색에 잠시 당황하는 빛이 감돌았다.
“하하, 죽을 뻔하다니요! 무슨 그런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까?”
개소문이 갑자기 헛웃음을 쳤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사신으로 오신 분을 감히 누가 해치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듣기에 일이 잘 해결되어 조만간 동맹을 맺게 되었다니 반가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사실 저는 병부의 일만 알지 나머지 국사는 잘 모릅니다.
이제 양국이 동맹을 맺게 되면 자주 뵙게 될 터인데,
다음 번에 오시면 절대로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엔 여러 가지 일로 도리를 다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만사가 제 마음 같지 않으니 형님이 너그러이 헤아려주십시오.”
춘추는 개소문이 단순히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국사를 돌보는 처지가 그런 줄을 내 어찌 모르겠소? 심려치 마시오.
시일이 약간 지체되어 그렇지 대접을 융숭하게 잘 받고 돌아가오.
아우님의 호의는 두고두고 잊지 않으리다.”
춘추는 개소문의 팔을 붙잡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일행이 국경에 도착하자 춘추는 안고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백제와 숙원을 해결하러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 왔었는데
귀국의 임금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강토를 요구하였소.
그러나 이는 내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먼저 귀국의 임금에게 글을 보낸 것은 오직 죽음을 면하고자 도모한 방책이었으니
돌아가시거든 사정을 잘 말씀드려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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