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6
“여봐라! 저놈은 사신을 가장한 염객으로 우리나라에 왔다!
당장 포박하여 옥에 가두고 여죄를 추궁한 뒤 국법에 따라 처형하라!”
춘추는 어명을 듣고 달려든 호위병들에게 붙잡혀 몸이 묶였다.
그가 바깥으로 끌려나가려고 할 때 마침 연개소문이 편전으로 들어서다가
그 모습을 보자 부리나케 임금에게 달려가 이마를 땅에 박고 복주했다.
“전하, 사신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대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두시고 예도를 되찾으소서!”
“과인인들 어찌 인국의 사신을 대우하는 예절을 모르겠소?
하나 저 자는 사신이 아니라 간악한 염탐꾼일 뿐이오.”
“어찌하여 별안간 그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젊은 신왕은 춘추의 포박에 얽힌 경위를 간략히 설명했다.
“게다가 저 자는 처음에 낭비성과 칠중성을 말하다가,
뒤에 한수 이북을 말하며 과인과 우리 조정을 능멸하였소.
그는 진심을 알 수 없는 위인이니 과인이 어찌 저 자를 믿을 수 있겠소?
또한 죽령 서북의 우리 땅을 돌려달라는 과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묵살하였으니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짐작컨대 동맹을 맺을 의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게 틀림없소.
마땅히 염객으로 봐야 할 것이외다.”
임금의 설명이 끝나자 개소문이 이마를 땅에 붙인 채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무엇을 의심하는지는 신도 알겠지만 본래 협상에는 밀고 당김이 있는 법이요,
합의에까지는 시일이 걸리는 수가 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라 사신은 신과 막역지간이올시다.
신의 체면을 봐서라도 그를 옥에 가두지는 말아주십시오.
간청하옵니다, 전하!”
임금은 잠깐 침묵하다가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맛을 쩍쩍 다셨다.
“상신께서 그토록 간청하시니 거절하기 어렵구려.
하나 염객으로 의심받는 자를 그냥 놓아줄 수도 없으니
그가 진심을 보일 때까지 객관에 두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오.”
말을 마치자 임금은 난처하다는 듯 자리를 떠버리고 말았다.
춘추는 연개소문의 덕택으로 남의 나라 옥에 갇히는 신세는 면했지만
객관에 갇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으니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모두가 막리지의 치밀한 계책인 듯도 하고,
의심을 걷어내고 보면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돕는 것도 같아서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날짜만 지나가서 어언 김유신과 약조한 두 달이 되었다.
조급증이 난 김춘추는 연개소문과 얘기를 해보려고 몇 차례나 말을 꺼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이거 정말 큰일이 아닙니까,
나리. 마목과 죽령 서북 땅을 돌려주는 조건으로 동맹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의심을 벗고 풀려날 길은 없어 보입니다.”
훈신은 춘추의 곁에서 줄곧 한숨만 쉬었다.
창칼을 든 군사들이 지키는 객관을 드나드는 사람은 언제나 신왕의 총신 선도해뿐이었다.
축일상종하며 지낸 지도 어언 두 달,
비슷한 연배의 춘추와 도해는 서로 식구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친해져 있었다.
춘추는 도해가 비록 공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지만 친히 아궁이를 점검하고,
반찬의 맛을 보며, 심지어 세숫물까지 떠주는 심성에 감동해 말에 싣고 온
청포(靑布) 3백 보(1步는 6자)를 모두 그에게 주었고,
도해는 춘추가 고귀한 신분이면서도 자신을 깍듯이 대하는 데 호감을 느껴
성심껏 그를 보살펴주곤 했다.
춘추가 임금의 진노를 사서 객관에 감금되자 도해는 안타깝고 가슴이 아팠다.
어느 날,
그는 집에서 성찬과 술 한 병을 마련해 객관으로 들고 와서 실의에 빠진 춘추를 위로했다.
“기운을 내십시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하지 않습니까?”
“우보께서도 저를 의심하시는지요?”
“아닙니다. 저는 사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번 일은 상신을 만나지 않고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공무가 바쁘더라도 이 김춘추를 한 번만 더 만나달라고 전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춘추는 눈물을 흘리며 간청했다.
몇 순배 술잔이 오가고 나자 도해는 사위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사뭇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제가 보기엔 상신을 만나신다고 해도 크게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좀 소상히 말씀해주십시오!”
춘추가 깜짝 놀라 다그치고 나오자 도해는 더욱 음성을 죽였다.
“사신께선 시기를 잘못 택해 오셨습니다.
지금 장안성엔 당장 10만이나 동원할 군사가 없습니다.”
“요동엔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요동의 군사를 불러오면 되지 않습니까?”
도해는 사방을 한 번 더 두리번거린 다음 여전히 속삭이듯 말했다.
“막리지께서 정변을 일으킨 뒤 장성 축조의 속도를 늦추고 사역을 군역으로 돌리기는 했지만
아직 전장에 동원할 만큼 군사가 많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신라의 의도를 명확히 알아내기 위해 사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란 임금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한 치도 더할 것이 없고 뺄 것도 없습니다.
백제를 쳐서 정벌하면 한수 이북을 돌려드리겠다는 것뿐이올시다.”
“결국은 사신의 목숨을 담보로 귀국 임금의 진심을 확인하겠다는 것이지요.”
“제가 날짜에 맞춰 돌아가지 못한다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런데 김유신과 약속한 날짜는 이미 지났으니
어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이며 잠이 제대로 오겠습니까?
군사를 청하러 왔다가 양국이 저 하나 때문에 피를 흘리며 싸우게 생겼으니
대체 이 노릇을 어찌해야 옳습니까?”
춘추가 탄식하자 도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신께서는 혹 토끼와 거북이의 얘기를 알고 계십니까?”
춘추가 고개를 젓자 도해는 거북이의 꾐에 빠져 용궁으로 들어갔다가
간을 두고 나왔다며 용왕을 속이고 도망친 토끼의 우화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재미나지 않습니까? 무료하실까봐 들려드린 이야기입니다.”
도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웃었다.
우화를 듣는 순간 춘추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도해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튿날 춘추는 도해를 통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간 신이 곰곰 생각해보니 마목현과 죽령의 두 영(嶺)은 본래 대국의 땅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신이 귀국하면 우리 임금께 청하여 반드시 돌려보내겠나이다.
신의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동녘에서 떠오르는 해를 두고 맹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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