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52. 하얀재로 변한 귀원비급<완결>

오늘의 쉼터 2014. 10. 29. 14:47

52. 하얀재로 변한 귀원비급

 

 

이리하여 세상의 풍파를 일으키던 도옥은 조금씩조금씩 죽어갔고 죽어가는 도옥을 안고

달려가는 동숙정은 울고 있었다.

한때 순정을 바쳤고 사랑에 배반당해 평생을 증오심에 사로잡혀 평생을 살아온 인생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밀려오는 허무라면 너무나 큰 허무를 안고 지금 달려가는 동숙정이었다.
그러한 동숙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어찌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지 않을 수 있으랴!
죽어가는 도옥을 안은 동숙정이 사라져 간지도 얼마.
그동안 묵묵히 섰던 조소접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며,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양몽환에게 한 걸음 조용히 다가갔다.
[양상공!]
[.........]
양몽환 역시 비감한 마음에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소저가 가엾어요.]
[.........]
할 말이 없는 양몽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하림이 조소접에게로 다가왔다.
[혹시 도옥을 살리려고 하지 않을까요?]
[글쎄......옛정을 생각해서 살릴지도 모르죠.]
하는 것을 양몽환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그럴리 없습니다. 그렇게 사리를 모르는 동사매가 아니오.

만일 도옥을 살려준다면 이 강호에 풍파가 다시
일어날 것인 만큼 신중히 고려할 것이오.]
[그럼 란이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하림이 주약란을 찾았을 때 주약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 어디에도 없는 주약란을 황망히 찾는 하림과 양몽환의 태도에 비해

조소접의 태도는 너무나 의외였다.
동숙정이 사라지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 양몽환과 조소접 그리고 심하림의 눈을 피해

이미 서쪽으로 몸을 날린 주약란을 찾아볼래도 찾을 수도 없지만 찾을 생각도 하지? 않는

조소접은 도옥이 떨어뜨리고 간 귀원비급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표정은 주약란이 사라진 것을 예상했고 지금 바람에 책장이

이리 접히고 저리 접히고 하는 귀원비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같았다.

 

<......귀원비급......

수 십년 동안 강호에 출현해서 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는가......>


생각하면 무술계의 최고 비법이 실려 있는 보배중의 보배요,?

무수한 인명을 해치는 살인마(殺人魔)인 귀원비급을 지금 아무도 주으려는 사람도 없는 계곡에서

원래 주인이었던 조소접의 시선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주위는 침울한 정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동안 조용한 침묵이 흐르던 그때.
그렇게 꼼짝없이 귀원비급을 내려다 보고 있던 조소접은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귀원비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얼마 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조소접은 땅에 흩어진 돌을 두 개 집어들었다.

의아히 생각하며 주시하고 있는 양몽환과 하림 앞에서 조소접은 두 개의 돌을 맞비벼 불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나는 불길 위에 귀원비급을 올려놓고 말았다.?

 

비보(秘寶) 귀원비급은 드디어 마지막 표지를 태우면서 하얀 재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재가 되는 귀원비급을 지켜보고 있는 양몽환과 하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아깝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영원히......영원히 사라져 가라!>

그로부터 십일 후.
양봉환의 내상을 치료한 조소접과 하림은 구대문파의 고수들과 이창란이 기다리고 있는?

산장(山莊)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위 밑에 잠자는 듯 누워 있는 금환이랑 도옥(金環二郞陶玉)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 역시 자는 듯 고이 눈감은 채 숨을 거둔 동숙정(童淑貞)의 시체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한때는 곤륜파의 같은 제자였고 또 이유는 다르지만 함께 추방당한 동숙정을 보는 양몽환의 가슴은

천만가지의 감회가 얽히고 얽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악했던 도옥이나 착했던 동숙정도 이미 생(生)의 미움과 증오를 잊고 자는 듯이 누운

시체 앞에서는 한번쯤 숙여지는 고개이고 마음으로 빌어주는 명복(冥福)이었다.
얼마 동안 고인(故人)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던 양몽환과 조소접 그리고 하림은

주위에서 바위와 돌을 굴려 도옥과 동숙정의 시체를 합장(合葬)하고 났을 때는

이미 동이 훤히 트이는 아침이었다.
석별의 정을 못내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기면서도 되돌아보고

또 되돌아보는 양몽환은 속으로 다시 한번 동숙정의 명복을 빌고 또 도옥의 명복도 빌어주었다.
다시 사흘이란 시일이 흘러간 오후.
양몽환과 조소접 그리고 심하림이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구대문파의 고수들도 이미 돌아가고 이창란과 이요홍 부녀(父女)와 자취를 감추고 떠났던

주약란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허연 수염을 내려쓸고 허......허......

연발 웃음을 터뜨리던 이창란은 양몽환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려 놓으며

여전히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반갑네. 모든 사연은 여기 주소저에게서 들어 알고 있네.

도옥이 죽었다니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군......

아무리 악한이라도 죽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은 명복을 빌어주는 것도 도리(道理)이고......]
[예, 그렇게 했습니다. 장인 어른! 돌아오는 길에 동소저도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뭣이? 그럼 동소저도?]
[네, 섭섭한 일이고 애석한 일입니다.]
[음......동소저의 마음을 십분 짐작하겠다. 비장한 각오였고 또 순정인 모양이구나......]
하는 동안 주약란과 이요홍은 동숙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이때 다시 이창란의 부드러운 음성은 천천히 계속되었다.
[환아야! 딸 홍아(紅兒)에게서 들었다만 자네 양친께서도 별고? 없이 지금 수월산장에서

자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리고 이것은 자네 양친 어르신네의 명(命)이고 이 늙은이의 간청이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도 강호 무술계에 나선지 어언 이십여년! 그동안 풍파가? 많았네만 이제는 모두 끝이 났네.

그리고 그동안 자네를 음(陰)으로 양(陽)으로 도와주고 헌신(獻身)한? 여기 주소저와 조소저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할 때가 되었네.

그래서 이제부터 주소저와 조소저 그리고 심소저와 홍아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하네.

자네 어르신네의 간곡한 청(請)이시자 명이시고 이 늙은이의 부탁이네.]
그러자 양몽환은 펄쩍 놀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그것을 이창란은 손을 들어 막았다.
[알고 있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네.

그러나 은혜를 보답할 길은 이 길밖에 없네. 자 돌아가게.

어서 이 소저들을 데리고 양친이 기다리시는 수월산장으로 돌아가게!]
[아, 장인 어른님!]
[어서 속히 떠나게. 날이 어두워지네!]
양몽환은 더 말하지 못하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장인 어른께서는?]
[나? 허......허...... 암, 이 늙은이도 같이 가야지! 자 어서 가자!]
얼굴을 붉히는 주약란과 조소접을 번갈아보며 역시 얼굴을 붉힌 양몽환은

하림과 이요홍이 생긋이 웃는 것을 못본 척하며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이창란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그 뒤를 주약란이 따르고 조소접 이요홍이 따랐다.

그리고 맨 뒤를 따르는 하림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지는
마음과 소원이 이루어진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노을이 뜨고 해가 지는 들녘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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