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51. 사랑의 고백

오늘의 쉼터 2014. 10. 29. 14:44

51. 사랑의 고백

 

 

 

말없이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 보는 양몽환의 시선에는 작고 초라한

 

한 채의 산사(山寺)가 있었다.
[?.........]
[그곳에 주소저가 계십니다.]
의외의 말이었다.

그 초라한 절간에 주소저가 있다는 것도 의외였고 이렇듯 바위 위에서 감시하듯 앉아 있는

옥소선자의 거동도 의외였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자결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물아쉬었다.
[주소저는 혼자 있습니까?]
[네......]
하고 삼시 말을 끊었던 옥소선자는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몇년 동안 나는 주소저를 가까이 모시면서도 오늘같이?

침울해 하고 쓸쓸해 하는 언니를 본 일이 없어요.

말도 하지 않고 또 웃지도 않고......]
<......그럼 옥소선자는 아직 어떤 눈치도 채지 못했단 말인가? ......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어서 가서 설득시켜야지......>

하면서 양몽환은 즉시 주소저를 만나보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꿀꺽 참으며 다른 말을 했다. 그것은 자기가 서두르므로써 옥소선자에게 어떤 눈치를 채이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고

될 수 있는 한 여러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럼 무슨 근심이라도?]
[글쎄요......마음의 상처라도 있는지 모르겠어요......양상공이 가서 위로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더 말할 수는 없어요......

마음의 상처... ...여하간 주소저도 마음이 착한 여자에요......]

<......그럼, 옥소선자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광대사에게 몸이 더럽혀진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래서 이 양모인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가보라는 말인가?......>

하는데 다시 옥소선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서 가세요. 그리고 위로하고 설득시키세요.]
[옥소소저는?]
[안가겠어요. 여기서 누가 오는가 감시하겠어요.]
양몽환은 즉시 진기를 돋우어 땅을 박찼다.
초라한 산사,

허술한 절간 벽에 기대앉은재 지그시 눈을 감고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없이
앉아 있는 주약란 앞에서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제야 천천히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앉은 주약란은 양몽환이 찾아올 것을

예상이나 하고 있었는지 앞에 서 있는 양몽환을 보고는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얼굴빛이 약간 홍조(紅潮)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끔 슬픔의 수심(愁心)이 잠깐씩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왔어요?]
[주소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왜 갑자기?]
[그 말은 이 양모인이 물어야 할 말입니다.

주소저는 일찍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표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이별을 고하고 또 이처럼 외딴 곳까지 와 있는 것이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는가 궁금하고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보여요?]
하며 주약란은 쓸쓸히 웃었다.
[네, 저뿐 아니라 조소저와 옥소소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약란은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멀리 떠가는 구름을 응시했다.
[한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 잃은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좋아요.]
[그럼 주소저, 무슨 일인지 또 무엇을 잃었는지는 모르지만 잃은 것은 잊어버리고 용기를 내주십시오.]
[양상공, 너무 염려말아요.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잠시 모든 번민을 잊기 위해서에요.

못된 마음이나 생각은 품지 않아요.]


<......음, 틀림없는 일이구나. 기어이 지광대사에게 그럼 스스로 자결하는 생각은 안한다고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다.>
[그럼 돌아가십시다.]
[아니 좀 더 이곳에 있겠어요. 그리고 나라는 여자에 대해 생각좀 해야겠어요. 그럼 양상공......]
[? .........]
[여기서 한달간만 있다가 도옥을 만나겠어요. 그래서? 상처를 입혀 놓겠어요. 그러면 삼개월 후의? 대결에는
양상공의 승리가 될 거에요. 그러나 양상공도 미리미리 준비해 두세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양상공, 나는 한달 후 도옥과의 대결에서 도옥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서 그때 자결할 결심이에요.]
그러자 양몽환은 펄쩍 놀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양상공, 내 얼굴에 침을 뱉아도 좋아요. 스스로 자결하려고도 했어요.? 그러나 삼개월 후 도옥과의 대결
때 양상공을 위해서......]
[주소저!]
[제 말을 들으세요. 저는 이미......더럽혀진......몸......]
<기어이......아, 기어이......예상대로 기어이 모욕을 당했구나...그러나 당황하거나? 놀라지 말자...... 설득시켜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은 막아야지!>
하고 결심한 양몽환은 큰 소리로 웃어젖혔다.
[핫......하......이 양모인은 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웃는군요. 웃어도 좋고 침을 뱉아도 좋아요.]
[주소저! 주소저가 지광대사에게 사로잡힐 때는 그리고 우리들에게 들아올 때까지 그 며칠 동안은 혼절상태
에서 아무 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지나간 일을 뉘우친다면 그래서 최후를? 생각하신다면 주소저답
지 않습니다. 부득이한 일, 불가항력이라면 그것은 수치가 안됩니다. 더구나 혼절상태에서!]
[그러나 양상공! 나는 동정호반(洞庭湖畔)에서 양상공을 만날때부터 오늘? 이 시각까지 결국 나도 여자로서
한 남자를 마음에 두고 살아왔어요. 그리고 그 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홀로 울기도 많이 했어요. 그리
고 용기를 냈어요. 꼭 말하리라고, 그러나 그 오랜 세월을? 다 보내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지
내왔어요.]
[주소저! 이 양모인 역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지나갔어요.

청순하고 순박한 몸으로 양상공 당신을 섬기려고 했던 것이....

이제는 모두 산산조각이 났어요.

저도 당신을 잊어야 하고 당신도 저를 잊어야해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도와드리고 싶어요.

그것은 도옥에게 상처를 입혀 당신이 이기게 하는 것이에요.]
[주소저, 이 양모인은 주소저가 아무리 말씀해도 주소저에 대한 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더 말하지 마세요. 괴로운 심정을 더 아프게 하지 말고 이제는 돌아가세요. 돌아가 주세요.]
[주소저, 이 양모인과 함께 안가겠습니까?]
[자꾸 그러시면 내가 떠나겠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일으킨 주약란은 절간의 지붕을 넘어 어디론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넋이 빠진 양몽환은 즉시 주소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다리에 기운이 빠지고 머리가 띵해서 당장 그 자리에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 아, 이 양모인이 죽을 죄를 졌구나, 조금 더 일찍 주소저를 맞아들였다면......>

그러나 주약란의 말대로 이미 지나간 일이오, 흘러간 물,

그리고 지금 따라갈 기운도 없는 양몽환이 아닌가!
지붕을 넘어 멀리 사라진 주약란의 환상을 더듬으며 길게 한숨을 쉬는 순간,

사라져가는 주약란의 뒷모습을 먼 빛으로 보고 있던 옥소선자는 급히 절간으로 달려왔다.
[양상공!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고 황망히 묻는 옥소선자의 말에 양몽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굳이 숨겨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실대로 말하고 사후책을 마련하는 것이......>
생각한 양몽환은 그간에 일어난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래서 이 양모인은 만일 주소저가 스스로 자결하는 것을 막게 할 수 있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해서

주소저를 살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양상공, 이렇게 하세요. 주소저가 수치를 당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는 바 없고

더구나? 당사자인 지광대사는 죽었어요.

그리고 주소저는 그동안 혼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주소저 자신도 확정적으로 자신의
몸이 더럽혀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옳은 말입니다. 주소저는 선녀같은 사람이어서 지광대사가 감히 나쁜 짓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들이 보는 주소저에요. 지광대사의 눈에는 주소저가 천사로 보일리는 없어요.]
[음......]
[그런 만큼 양상공을 주소저에게 혼절당한 며칠 동안 지광대사가 욕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갖 착각이라고 다짐을 주세요.

그래서 주소저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무모한 일은 하지 않을 거에요.]
[좋은 생각입니다. 욕을 당했든 어쨌든 죽게끔 방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주소저가 욕을 당해 청결치 못한 몸이라 해도? 주소저를 구하려면

따뜻하게 주소저를 대해 주고 수월산장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동거해야 해요.]
[그럼 부부가 되라는 말인가요?]
[왜 정결치 못한 몸이어서 싫다는 것인가요?]
[천만에 그런 뜻이 아니라......]
[부인이 많아진다는 것인가요?]
[바로......]
[그것이 문제에요? 양상공은 꼭 주소저를 부인으로? 맞아야 해요.

그렇지 않겠다면 주소저를? 구할 수 없어요.]
[? .........]
[괴로운 한 평생을 혼자 살아가는 것 보다는 죽는 것이 나을거에요.]
양몽환은 마른 침을 삼키며 깊이 생각했다.

<......우선 살리고......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차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하고 생각한 양몽환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옥소소저의 말대로 따르겠습니다.]
[됐어요. 이젠 떠나세요.]
[어디로?]
[주소저의 행방을 찾아 떠나야해요.]
두 사람은 절간을 나와 주약란이 사라진 정서(正西)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수 십리 길을 달려오며 주위를 살폈으나 그 어느 곳에서도 주약란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맞은편 높은 산 상상봉에 올라?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사방을 휘둘러보던?

옥소선자는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모양이군요......그런데 저기 보이는 것이 주막(酒幕)이 아닐까요?]
하며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양몽환은 휘날리는 주막집 깃발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주막집입니다.]
[그럼 그쪽으로 가서 알아봐요. 혹시 주막집에 들렸다 갔을지도 모르잖아요?]
[설마 주막집에 들렸을라고요?]
하면서도 양몽환은 먼저 걸음을 옮겨 놓는 것이었다. 그 뒤를 옥소선자가 따라 이윽고?

 당도한 곳은 날리는 깃발에 비해 더없이 초라하고 볼품없는 술집이었다.
그리고 주막집 앞으로 그리 넓지 않은 외길이 있는 것이 산을 넘어 가지 않는 이상

이 길을 통해야만 하는 것도 알아냈다.
주막 안으로 들어선 양몽환은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국물인지

후르륵거리며 마시고 있는 흑의의 노인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때 마악 들어서는 양몽환의 인기척에 하인인 듯한 장정이 물? 묻은 손을 닦으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서 옵쇼!]
하는 하인에게 두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인 양몽환은 우선 용건부터 물었다.
[혹시 이 길을 지나가는 아가씨를 보지 못했소?]
그러자 술이라도 한 잔 팔아주려나하고 기대했던 하인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손짓만 하는 것이었다.
[방금 저쪽으로 갔소!]
서쪽을 가리켜 보이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주약란의 향방을 알게 된 양몽환과 옥소선자는

미처 인사도 차릴 겨를없이 몸을 날려 순식간에 이십 여리를 달렸다.

그러나 방금 지나갔다는 주약란은 이미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약란의 초인적인 경신술을 깨달은 양몽환은 달리던 길을 멈추고 숨을 돌려 쉬었다.
[옥소소저, 주소저의 경신술은 우리들이 따를 바가? 못됩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살피며 따르기로? 합시다.

혹시 어느 은밀한 곳에서 조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옥소소저, 아까 좀전 그 주막집에 앉아 있던 흑의인을 자세히 보았습니까?]
[아니, 왜요?]
[어디서 본 얼굴같기에 말입니다.]
[글쎄 저도 흘깃 보고 그런 느낌은 들었어요. 그러나 누구인지는 모르겠던데요. 양상공은?]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얼핏 보기에는 사수구원(蛇 邱元) 같습니다.]
[사수구원?]
사수구원이라면 옛날 요주성(饒州城)에서 뱀독으로 혜진자에게 상처를 입혀 주약란이

치료하게 한? 바로 그 구원이었다.
[그렇죠, 틀림없습니다.]
[음...... 나도 생각이 나는 군요.

그런데 왜 혼자 앉아 있을까요? 더구나 무예계에서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상한 점이오.

만일 주소저가 그곳을 지나왔다면 사수구원이? 못 보았을리 없고 ......

또 그가 계략을 쓰고 하인에게 미리 서쪽으로 갔다고 시켰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소?]
[그렇군요. 속히 되돌아가 구원을 잡아요.]
[그럽시다.]
그리고 다시 양몽환과 옥소선자가 주막 안으로 되돌아왔을 때,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흑의인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술에 취해? 잠이라도 든듯 탁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그들이 주막 안으로 들어가 얼마를 기다려도 하인은 어디를 갔는지 나타나지 않고

주객(酒客)인 흑의인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주위를 냉철히 살피던 옥소선자는 별안간 옥피리를 뽑아들며 흑의인에게 덮치는 순간!
탁상에 엎딘채 자는 듯이 숨소리를 죽이고 있던 흑의인이? 번개같이 몸을 일으켜

옥피리를 피하고는 핫......하...... 소리쳐 웃더니,

웃음을 뚝 그치고는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두 번이나 재난을 받는군......]
하며 번쩍 얼굴을 드는 사람은 틀림없는 사수구원이었다.
그 바람에 얼핏 두어 걸음 물러선 옥소선자는 냉랭하게 물었다.
[두 번?]
[그렇소. 나의 사지 관절을 비틀어 던진 도옥이 뭐라고 한지 아시오?]
[어떻게 알아요?]
[들어보쇼. 뭐라고 했는가 하면 이렇게 말하더군. 네가 평생 뱀독만 주물렀으니

그 뱀독에 죽어라! 이거죠.]
[그런데 아직 죽지 않았단 말인가요?]
[죽어요? 핫...... 하...... 운좋게 마침 주소저가 와서 구해 주었소.]
[주소저가? 그럼 어디로 갔는지 알겠군요?]
[그건 모르오. 그러나 한가지 두 분에게 전하라고 했소.]
[무슨 말을?]
[두 분께서는 따라오지 말라고......]
[그럼 우리 두 사람이 쫓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오?]
[물론, 한 사람은 양몽환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옥소선자라고 똑똑히 말했소.]
하고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곧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젠 가야겠소. 전할 말은 다했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려는 구원을 양몽환이 급히 불러 세웠다.
[잠깐!]
[? .........]
[구형께서는 우리가 이곳을 지날때 봤소?]
[암, 봤소.]
[봤으면 왜 그때 말하지 않았소?]
[그때? 그때는 주소저가 옆에 있어서 말하지 못했소.]
[뭣이? 주소저가 이곳에 있었단 말이오?]
[그렇소.]
[어디로 갔소?]
[모르오.]
순간, 얼핏 지나가는 이상함이 있었다. 그것은 하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인은 어디 갔소?]
그러자 구원은 역시 모른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하는 것이었다.
[하인을 찾거나 원망할 필요는 없소. 이미 주소저가 계획한 일, 더 쫓지? 마시오.

만일 서로 쫓고 쫓기다 보면 모두 안심하고 무공을 연마할 수 없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옳은 말이다. 더 쫓지 말고 은밀한 곳에서 무공을 닦도록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친천히 밖으로 나간 구원은 금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구원이 사라지고 얼마 동안 생각에 잠겼던 옥소선자는 그때까지 경황없이 서 있는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양상공, 더 이상 주소저를 따르지 말아요.]
[그럼 영영 만나지 못하고 맙니다.]
[만날 수 있어요. 주소저는 지금 한달 동안 무공을 닦은 다음 도옥과 겨루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주소저는 한달 후부터 도옥을 찾아다닐 것이 아니에요?]
[겨루기 위해서?]
[그렇죠. 도옥을 찾아야만 대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 만큼 우리가 주소저를 찾는 대신? 도옥의
거처를 알아두면 틀림없이 주소저가 도옥을 만나러 올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것이었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도옥의 행방을 찾는 것이 어떻습니까?]
[물론 찾아야죠.

주소저 대신 도옥을 찾는 거에요.

그러면 주소저는 마음놓고 무공을 닦을 수도 있고......]
[좋은 의견입니다.

그런데 수월산장으로 간 조소저와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건 염려마세요. 내가 대신 만나서 잘 말하겠어요.

그대신 양상공은 도옥의 행방을 찾으세요.

그리고 삼일 후에 이곳에서 만나요.]
하고는 즉시 몸을 날려 사라져갔다.
악의 뿌리는 뽑히고
옥소선자가 떠나가고도 얼마 동안
가볍게 탄식하고 돌아선 양몽환은 서산 뒤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침 지나가고 있는 이곳이? 바로 심하림을 데리고 오는 조소접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라는 것을 깨닫고 멈추어 섰다.

그때, 양몽환이 나타나기를 먼 빛으로 보고 있기나 한 듯 땀에 흠뻑 젖은 조소접과 심하림이

나는 듯이 달려왔고 해는 이미 서산뒤로 넘어가 어스름 일몰의 시간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온 하림은 조소접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었는지

주약란의 행방부터 물었다.
[언니를 만났어요?]
[행방을 알아내기는 하였소.]
그럼 속히 만나봐요.]
하고 조급해 하자 양몽환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서두르지 마시오.

심소저도 조소저에게서 대강 사연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우선 주소저를 만나면

무슨 말로 설득시키겠소?]
[설득시킬 말보다 저는 언니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것부터 믿고싶지 않은 심정이에요.]
[그러나 주소저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확실하오.

그래서 옥소선자와? 의논한 바도 지금 주소저를 괴롭히지 말고 한달을 지낸뒤

도옥과의 결전장에서 설득시키자고 한 것이오.]
그러자 처음 듣는 소리에 조소접은 눈을 크게 떴다.


[도옥과의 결전?]
[그렇소. 삼개월 후에 있을 대결에 앞서 먼저 도옥과 겨루어서 상처를 입힌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이 주소저의 결심이오.

그런 만큼 한달 동안 무공을 닦게 한 후 도옥과 겨룰 때 주소저를 설득시키자는 것이오.]
[그럼, 어디서 겨룬다는 말인가요?]
[그곳은 나도 모르오.

그러나 도옥과 겨루려면 주소저도 도옥의 행방을 찾을 것이 아니겠소?]
[그건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주소저를 찾는 것을 보류하고 도옥의 행방을 알아낸 다음 주소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자는 것이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조소접은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으나

하림은 고개를 흔들며 반대의 뜻을 표했다.
[그건 안돼요. 도옥과의 대결 날짜가 한달 후라고 해도 삼심 일인데,

만약 언니가 마음이 변해 그 전에 목숨을 끊으면 어떡해요?]
그것도 옳은 말이었다.

아무리 굳게 결심했다 해도 순결을 짓밟힌 주약란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더구나 순결을 짓밟힌 여자로서 감당해야 할 수치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주소저를 믿어온 것처럼 주소저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소?]
[죽음을 결심한 언니를 믿을 수는 없어요.

당장 찾아가서 혈도를 짚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못하게 한 다음 대책을 강구해야 해요.]
어느 때없이 강경한 태도를 표시하는 하림을 바라보며 언제 저렇듯 강한 마음이 있었던가 하며

양몽환은 새삼 놀랐다.
[그러나 섣불리 손을 쓰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그러자 조소접은 눈에 반짝 광채를 띄웠다.
[그건 염려마세요. 양상공이 눈짓으로 신호만 하면 내가 틀림없이 언니의 혈도를 짚겠어요.]
하는 말에 하림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해요.

그러면 제가 잘 말해서 언니의 마음을 들려놓겠어요.

죽지않고 우리와 함께 살도록 하겠어요.]
하는 바로 그때였다.
점차로 어둠이 깔리는 황막한 들길 한편에서 홀연 한 줄기의 불빛이 번쩍 일었다가

천천히 꺼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 바짝 긴장하며 진기를 돋운 조소접이 발끈 주먹을 쥐었다.
[양상공, 지금 불빛을 봤죠?]
[네, 이상하군요.]
[틀림없이 무슨 신호일 거에요. 제가 가보고 오겠어요.]
하고 마악 달려나가려는 조소접을 급히 막아선 양몽환은 다급히 그러나 음성을 낮추어 소리쳤다.

그것은 지금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 순간, 쏜살같이 달려오던 하나의 검은 그림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오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쉬잇! 너무 음성이 커요!]
하며 이윽고 걸음을 멈추는 검은 그림자는 바로 동숙정이었다.
그제야 돋우었던 진기를 풀며 양몽환도 동숙정에게로 몇 걸음 다가갔다.
[동사매!]
[주소저를 만났어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옥은?]
[지금 나는 주소저를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리고 도옥은 주소저를 만나기 위해 두? 명의 고수를 데리고 떠났어요.]
[주소저가 무슨 말이라도?]
[대결 날짜를 변경해서 오늘밤에 도옥과 만난다고 했어요.]
[뭐라고요? 그럼 도옥은 어디로 갔습니까? ]
[정동 방향(正東方向)으로 갔어요.]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그러나 동숙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몸을 날린 양몽환이었다.
그러자 동숙정은 황망히 달려가는 양몽환을 불러세웠다.
[양사제, 잠깐 기다려요.]
하는 소리에 홱 돌아선 양몽환에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양사제는 혼자 가지말고 조소저와 심소저를 데리고 가세요.

여기서부터 정동(正東)방향으로 십리(十里)정도만 가면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은 계곡이 있어요.?

그곳에서 도옥을 기다리세요.

그러면 그곳에서 주소저를 만나게 될지 물라요.

그러나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그곳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세요.]
[알았습니다.]
하고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그리하여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조소접은 동숙정과 헤어져 곧장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유성같이 몸을 날려 단숨에 십리길을 왔을 때는 동숙정의 말대로 과연 평탄한 계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몽환은 동숙정이 말한대로 각기 숨소리를 죽이고 이제 나타날 도옥과 주약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를 지났을까? 풀벌레의 울음소리조차 없는 계곡에는 은은한 달빛만이 교교히 비치고

가끔 지나가는 바람에 마른 나뭇잎이 굴러다니는 계곡에 숨어 있기 다시 얼마!
이윽고 바람소리에 굴러가는 마른 나뭇잎 소리가 아닌 발자국 소리가 동시에 동쪽과 서쪽에서 들려왔다.
순간, 귀를 바짝 세우고 눈을 크게 뜬? 양몽환 일행의 시선에는 동시에 나타나는 네 명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동쪽에서 나타나는 그림자는 셋, 그리고 서쪽에서 나타나는 그림자는 하나!
동쪽에서부터 나타나는 세개의 검은 그림자는 바로 도옥과 그의 부하 두 명이었고

서쪽에서 모습을 나라낸 검은 그림자는 그렇게도 찾아다니던 주소저 바로 주약란이었다.
이때, 주약란을 발견한 하림은 너무나 기쁜 마음에 소리를 치고 말았다.
[란이 언니......]
그러자 주약란과 동시에 고개를 돌린 도옥은 아차 했다.
<음......저놈들이 어떻게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따라왔을까?>
어리둥절 했다가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양형! 양형이 이 도옥의 뒤를 따르는 재간엔 실로 탄복하는 바이오.

그러나 틀림없이 이 도옥의 부하 중에 첩자(諜者)가 있다는 것을 오늘 분명히 알았소!]
그러자 양몽환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도형! 이 양모인의 눈을 속이지는 못할 거요.

아무리 흉계를 쓰고 속이려 해도 속지 않소!]
[핫......하...... 그러나 양형이 이 도옥의 계략에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단 말은 못할거요.

그리고 오늘 일도 첩자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거요.]
하고 싸늘한 웃음을 흘리자 이번에는 조소접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도옥! 그럼 란이 언니도 첩자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예요?]
[그건 다르지.]
[다르다고?]
[주소저는 이 도옥이 유인해 온 거요.]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이제까지 무표정하게 서 있던 주약란이 갑자기 입을 열어 도옥을 불렀다.
[도옥! 아무래도 오늘은 무공을 겨룰 수 없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도옥은 한편에 서 있는 양몽환과 하림

그리고 조소접의 험악한 기세를 뚫어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것은 주소저 마음대로 하시오. 지금 형세는 주소저 편이 강하다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면서 주춤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양몽환 일행을 만난 것이 도옥 자신에게는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자신이 불리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누구도 합세하지 않는 일대 일의 싸움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일대 일로 싸우는 것이고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자는 것이죠.]
[핫......하......이 도옥도 원하는 바요.]
하는 것이었다.
이때, 한편에서 듣기만 하고 있던 하림은 도옥의 방자한 태도에 그만 눈썹이 치켜오르고 말았다.
[도옥! 오늘 여기서 만난 이상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어요. 자, 장검을 뽑아들어요!]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등에 메었던 장컴을 쓱 뽑아들며 도옥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 아넌가!
순간, 슬쩍 한쪽으로 비켜서는 도옥을 대신해서 왼쪽의 장정이 달려들고 말았다.
장검의 칼날이 유난히 날카로운 안영도(雁翎刀)를 쥔 장정은 그 무거운 장검을 죽장(竹杖) 휘두르듯

가볍게 휘두르며 하림에게 역공해 들어왔다.
뜻밖에 나타난 장정의 장검을 피한 하림은 경각심을 더욱 불러일으키고 공격 수법을

금사진완(金絲 腕)으로 급변시키고 검과 몸이 홀연 일체가 되며 비스듬히 육박해 들어갔다.
그러한 한편, 잠시 전세를 살펴보던 양몽환은 하림과 맞서는 장정의 검법이 놀라운 것은?

물론 아직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정체 불명의 장정이라는 것에 의아해했다.
하림의 공격을 피하는 수법도 날렵하거니와 반격하는 그의 안영도도 새파란 섬광을 수없이

날리는 것이 보통 무술인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니 놀라운 검법실력을 갖춘 정체불명의 장정과 싸우고 있는 하림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즉각 장검을 뽑아 힘주어 쥐고 다른 하나의 장정을 끌어냈다.
그러자 이미 양봉환의 거동을 주시하고 있었는지 재빨리 장검을 비껴들며

크게 한 걸음 옆으로 피한 다음 장검을 고쳐쥐며 반격해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몽환처럼 한 자루의 장검이 아닌 두 자루의 장검을 양손에 한 자루씩 꼬나쥔

 

장정은 이 팔, 저 팔 번갈아 휘두르며 흡사 검무(劍舞)를 추듯 어지럽게

양몽환의 주위를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홱! 몸을 돌이켜 두 자루의 장검과 함께 발길질까지 가하며 덤벼드는 바람에

 

양몽환은 어쩔 수 없이 옆으로 다섯걸음이나 피했다.

그러던 양몽환은 허리를 바싹 구부려 새우등처럼 둥글게 한 다음

옆걸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걸으며 기회를 노리다

눈껍이 옆으로 치켜 오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돌연 수량환주(搜樑換柱)검법을 변화시키면서

싸늘한 검광을 뿌린 후 재차 춘운작전(春雲作展)으로 대변화시켜 바람을 가르고 말았다.
순간, 새파란 불꽃을 튕기면서 맞부딪친 세 자루의 장검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면서

한데 엉켰다가 떨어지는 순간,

숨돌려 쉴 여유도 주지 않은 양몽환은 분광검법(分光劍法)중에서

추혼십이검(追魂二十劍)법으로 썩은 토막 자르듯 크게 열 두번을 연거퍼 후려갈기고

뒤로 물러서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장정은 두 자루의 장검을 쥔? 재 양몽환의 검법에 말려들 제대로 한번 흔들어 보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기에만 급급했다.
이와 같이 맹렬한 속공을 전개하는 양몽환은 이미 살기(殺氣)가 충천해 거칠 것이 없었다.

땅을 구르며 비호같이 몸을 날린 양몽환의 장검에서는 무시무시하고도 소름이 끼치는

쇳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편, 데리고 온 두 명의 부하를 양몽환과 하림에게 각각 겨루게 한 도옥은 팔장을 낀 채

실눈을 뜨고 결투 광경을 노려볼 뿐 요지부동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것이었고

주약란은 주약란대로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어둠에 싸인 수풀 쪽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주약란 옆에서 주약란을 호위하듯 서 있는 조소접은 또 조소접대로 열전을 벌이고 있는

싸움터와 도옥을 번갈아 노려보며 진기를 돋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던 바로 그때였다.
돌연,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양몽환의 장검에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나가는 장정의

한쪽 팔과 손에 쥔 한 자루의 장검!
순간, 옆으로 기우뚱 쓰러지려다 장검을 의지하며 몸을 바로 세운 장정은 입을 꽉 깨물어

고통을 참으며 재차 달려 들어오는 양몽환의 장검을 맞받아 쳐내는 것이었다.
간신히 위기를 면한 장정은 그만하면 아무 곳에나 털썩 쓰러져서? 목숨을 건지려고

애원할 법도 하련만 이를 부드득 갈며 표독스럽게 항거하는 장정은

그까짓 떨어져 나간 팔이 어디 내것이냐는 듯이 옆으로 몸을 기울인 채 비틀비틀하며

다시 반격해 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그만 분통이 터진 양몽환은 아무 것도 아닌 장정에게 놀림을 당하는 듯한

씁쓸한 기분을 참지 못하고 울컥 올라오는 침을 탁! 뱉았다.

그리고 눈썹을 치켜올렸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유성같이 긴 꼬리를 그으며 허공을 가른 한 줄기의 파란 섬광이 장정의 목을 휘감았다고 했을 때는

이미 양몽환의 새파란 칼날에는 검붉은 피가 얼룩져 있었고 장정의 머리는 머리대로

몸뚱이는 몸뚱이대로 떨어져 땅바닥에서 두어번 꿈틀거리다 꾸역꾸역 피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진 양몽환은 즉각 선수를 돌려 검붉은 피가 묻은 장검을 그대로 도옥에게 들이대고

땅을 박찼다.
순간, 금환검을 미처 빼들지 못하고 뒤로 여섯? 걸음이나 피하던 도옥은 한소리 크게 외치며

두 팔을 들어 웅후한 장풍을 몰아붙여 양몽환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를 노려 옆구리에 길게

가로찼던 금환검을 뽑아 단단히 거머쥐고 턱을 쓰윽 치켜올렸다.

그러나? 서슬이 파래서 달려오는 양몽환에게 마주쳐 나가지? 않고 다시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던 도옥의 왼쪽 팔이 넌지시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가 내려지면서

튀어나온 두개의 노란 물체!
지척지간에서 갑자기 던져오는 암기를 피해 장검을 휘두르자 창!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는 물체는 양몽환이 서 있는 곳에서도 다섯걸음이나 옆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그 물체는 도옥의 손목에 끼워 있던 금환(金環)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금환에는 가늘고 단단한 쇠줄이 매어져 있어서 도옥의 팔이 뒤로 뻗쳐집과 동시에

흡사 쇠붙이가 지남철에 끌려가듯 도옥의 손목으로 끼워지는 것이었다.
그러한 금환은 언제 어디로 던져졌다가도 곧 회수하게끔 되어 있어 암기로 쓰기에도 맞았다.
그러나 금환을 회수하여 손목에 끼자마자 몸을 날린 도옥은 오른손에 쥐었던 금환검에

검광을 그리면서 양몽환의 단절요혈(丹田要穴)을 스치고 허공을 뚫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양몽환이 황망히 장검을 앞가슴에 들이대며 위기일발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했을 때는 다시 바람을 가르며 날아 덮치는 도옥의 금환이었다.
미처 팔을 들어 막을 사이도 없이 계속 공격을 퍼부어 오는 도옥의 악랄하고도 민접한 수법에

정신마저 빼앗길 듯 머리가 어지러워진 양몽환은 앞 가슴을 보호한 장검을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머리만 흔들었다.

정신마저 흐려진다면 더 싸워볼 여지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시의 여유도 두지 않고? 어지럽게 공격해 오는 도옥의 금환검이?

바람을 가르고 검광을 그리는가 하면 어느 사이에 금환이 날고 금환이 날아오는가 하면

금환검이 쇳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사방 팔방에서 일시에 협공하는 것같았다.
얼마 동안을 이렇게 금환과 금환검을? 피하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양몽환은?

은근히 화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이놈! 정신을 못차리게 하고 악랄한 수를 쓰려고?>

입을 꽉 다문 양몽환은 전신에 퍼져 있는 진기와 내공을 장검을 쥔 팔에 운집시킨 다음,

깊이 숨을 돌려 쉬었다.

그러고는 성난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뜨며 으흥! 소리를 지름과 동시에 모래를 날렸다.
실로 웅후하고도 가공할 만한 무시무시한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 일자로 꽉 다문 입, 부릅뜬 눈, 그리고 심줄이 울퉁불퉁 튀어나 불그러진 팔,

힘있게 쥐어진 양봉환의 손아귀에서 부르르 떠는 예리한 칼 끝은 도리어 불빛 무지개를 그리며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으윽!]
하고 처절하고도 소름이 끼치는 비명소리와 함께 털썩 떨어지는 두개의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하림의 장검에 역시 허리가 끊어진 흑의 장정의 시신(屍身)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떨어지는

살덩이의 처절한 음향이었고 그 소리가 채 끌나기도 전에 마침 도옥에게로 덮치는 양몽환의

뒤를 따라 몸을 날리는 하림의 연약한 자태가 은빛처럼 하얀 줄을 그으며 도옥에게로 덮치는 것이었다.
순간, 일시에 양몽환과 하림의 강적을 맞은 도옥은 불리한 전세를 직감하고 급히 땅바닥에 엎드리는

척하면서 덮쳐오는 양몽환과 하림의 사이를 뚫고 일장(一丈)이나 앞으로 달리다가 돌연 돌아서면서

쌍환비격(雙環飛擊)으로 마악 돌아서는 양몽환과 하림을 겨누고 금환을 날렸다.

그리고는? 여유를 두지 않고 금환검을 곧추 세운 다음 내비검적(內飛劍敵)의 수법으로 땅을 박차며?

육척(六尺) 높이로 부웅! 몸을 허공으로 띄우며 날렸다.

한편,
가끔 도옥을 대적하고 있는 양몽환과 하림을 보기도 하고 어둠에 싸인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면서

가만히 서 있는 주약란 옆에 바싹 붙어선 조소접은 당장 뛰어나가 양몽환과 하림에게 합세해서

도옥을 처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만일 주약란의 옆을 떠나 싸움애 휩싸이면 요행히 찾아낸 주약란이 몰래 자취를 감출 것같아

떠나지를 못하고 암암리에 감시만 햐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초의 약속대로 주약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도록 혈도를? 짚어 하림의 설득으로

주약란의 마음을 돌리는 방법을 생각도 했지만 좀전 도옥의 말대로 이곳 주위 사방에 도옥의 부하가

매복되어 있다가 일제히 공격해 온다면 혈도를 짚힌 주약란이 도옥의 부하에게 꼼짝없이 죽거나

사로잡힐 것을 염려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주약란이 지금 한창 열전 중인 싸움에 가담한다면 조소접 자기도 마음놓고 합세할 수 있지만

지금 주약란의 표정으로서는 아예 싸움도 하지 않으려는 눈치가 역력해 발을 구르고 싶은

조소접이었다.

주약란이 움직이지 않는 한, 조소접은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때, 여섯자 높이로 허공을 날은 도옥은 허공에서 원을 그리며 한 바퀴 도는 듯하다가

몸을 곧추 세우면서 긍환을 던지고 연이어 금환검을 휘두르면서 땅에 내려섰다.
그 틈을 노린 양몽환 왼쪽에서, 하림은 오른쪽에서 협공을 가하는 사이에 땅에 내려서던

도옥은 발딱 몸을 눕히면서 양몽환과 하림의 벌어진 틈으로 기어나오는 바람에 노리고

가했던 일격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래도 하림보다 무공이 강한 양몽환은 재빨리 빠져나가는 도옥의 뒤를 쫓아

기어이 왼쪽 어깨에 한 치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데 겨우 성공했다.
순간, 피를 본 도옥은 그만 악이 나는지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꿈틀거렸다.

<함......이놈이 이 도옥의 몸에서 피를 내도록 해! ......>

부드득 이를 간 도옥은 선뜻 소매를 걷어 불였다.

그리고 양쪽팔을? 옆으로 뻗치며 씨익!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기어이 참지 못하고 장검을 꼬나쥔 조소접이 질풍같이 몸을 날려 하림을 막고 섰다.?

그리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심소저! 언니를 부탁해요!]
하고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는 도옥을 대신 막고 나섰다.
그러자 조소접의 말뜻을 알아챈 하림은 즉시 장검을 거두고 주약란에게로 급히 돌아왔다.
한편, 하림대신 도옥을 가로막고 나선 조소접은 양몽환과 연합작전을 쓰면서 슬슬?

왼편으로 돌고 양몽환은
또 양몽환대로 오른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조소접의 장검에서부터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순간, 쫙! 옷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주르르 흐르는 검붉은 피! 삽시간에

양몽환과 조소접에게 한 곳씩 상처를 입은 도옥은 순간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을 참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랑이 눈처럼 크게 부릅뜬 도옥의 눈에서 붉은 빛이 번쩍했을 바로 그때,

두 개의 금환을 조소접에게로? 날아붙이고 금환검은 양몽환을 덮치고 노도처럼 부딪쳐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금환을 던져 조소접을 위협한 다음 그 순간을 노려 양몽환에게 덮쳐든 도옥은 몸을 뒤채듯

크게 흔들어 진기를 돋우고는 양몽환을 스치고 지나면서 순식간에 양몽환의 손목을 잡고

끌고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섯걸음이나 질질 끌려가다 내공력을 이용해서 벌떡 몸을 일으킨 양몽환은 죽기를 결심하고

왼쪽 손에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으며 내려치고 말았다.
그러자 양몽환의 손목을 쥐고 있는 도옥의 어깨가 큰 바위에 눌린 것처럼 휘청한 것도 잠시,

관절이 부러져 나가는 아픔을 느끼며 쥐고 있던 손목을 놓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만히 물러날 도옥은 아니었다.
떨어져나가는 어깨에 아픔을 느끼며 양몽환의 손을 놓아버린 도옥이지만 물러서면서

두발차기로 양몽환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걷어찼다.
그바람에 양봉환과 도옥은 각기 네 걸음씩이나 뒤로 물러서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 앉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나는 양몽환과 도옥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도옥의 두발차기에 아랫배를? 걷어채인 양몽환은 배를 움켜쥐며 가만히 그 자리에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그리고 도옥도 간신히 참고 참아 주저 앉지는 않았지만 양몽환의 주먹에 얻어맞은 어깨에는

견골(肩骨)이 부러져 있었다.
각기 가볍지 않은 중상을 입었지만 그래도 양몽환의 중상이 조금 심했다.
이때, 장검을 내던지고 두 손바닥에 웅후한 진기를 운집하고 도옥에게 밀어붙이려던

조소접은 뜻밖의 중상을 입고 주저 앉는 양몽환을 발견하고는 잡시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가

더욱? 분발하며 두 팔을 흔들고 말았다.
그러자 산이라도 쓸어버릴 듯 굉장한 장풍이 한데 엉겨 둥글둥글 굴러 돌과 모래를 수 없이 날렸다.

그리고 그 돌과 모래는 파도처럼 밀려 도옥의 몸을 덮어씌웠다.
순간, 차악 배를 땅바닥에 깔고 납작하게 엎드린 도옥은 수풀속으로 사라지는 뱀처럼 살살 기어

무시무시한 장풍을 무난히 피하고는 발딱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때, 그만 조소접의 쇳소리가 터졌다.
[도옥! 이래도 더 싸워보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자 도옥은 몇걸음 뒤로 물러서서 조소접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불의의 공격을 막을 태세를

갖추며 싸늘하게 웃음을 흘렀다.
[흥! 얼마든지!]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건가요?]
[목숨? 피차 아깝기는 마찬가지오. 그러나 이 도옥을 죽이지는 못하지!]
[죽이지 못한다고?]
[그렇소. 만일 당신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했다면 모르지만!]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또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면서 두 팔을 다시 휘둘렀다.

그러자 미리 태세를 갖추고 있던 도옥도 이번만은 피하지 못하고 벌렁 뒤로 자빠졌다가

황망히 일어나며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상처가 아픈지 공격하지 못하고

두어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갈 도옥은 아니었다.
[조소저, 길게 숨을 한번 들이쉬면 이 도옥의 말을 믿게 될 거요.]
하고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혹시나 해서 조소접은 입을 다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아무 것도 이상하거나 냄새는 없었다.
[어떠시오?]
[뭐가 어떻긴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럴 거요. 이 도옥이 말하기 전에는 절대 모를 거요.]
[잔재주는 그만 피우고 싸우겠다면 어서 덤벼요.]
하며 두 팔을 벌리자 도옥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잠깐! 이 도옥의 말을 들어보시오.]
[무얼 또 들으라는 거요?]
[지금 숨을 들이마실 때 이상한 향 냄새를 맡지 못했소?]
그러나 조소접은 별로 느낀 것같지 않았다.
[그게 어떻다는 거에요?]
[핫......하...... 분명히 조금은 맡았을 거요.]
[그래서?]
[이제 이 도옥이나 당신들은 모두 죽을 거요.

그러면 오년이나 십년 후에 다시 귀원비급의 쟁탈전이 벌어질 거요.

틀림없이......그렇지만 이 도옥부터 죽을 수는 없는 일,

모두 모시고 함께 죽어야 되지 않겠소?]
[뭐라고? 누가 죽는단 말이오?]
[그야 당신들 모두지......핫......하 아름다운 소저들이 이 도옥과 함께 죽는다면 이 도옥은 영광이오.

그러면 무슨 한(恨)이 있겠소?]
[흥! 혹시 잠꼬대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잠꼬대? 천만에 말이오. 지금 조소저가 맡은 향기는 구유기향(九幽奇香)이란 독향(毒香)으로서

오일(五日)이 지나야만 독이 몸에 퍼지는 것이오.

그러면 죽었지 별 수 없소.

여기 있는 당신들은 모두 중독되었소!]
그러자 조소접은 정말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같기도 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냄새가 나는 것같았다.

그러나 혹시 계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함께 죽자는 말인가요?]
[그렇소. 그러나 해독약이 없는 것은 아니오.]
하고는 조소접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이 도옥은 앞으로 삼개월 후 남악(南嶽)땅 형산(衡山)에서 일대 격전을 겨루려고 하였소.

그런데 변경한 것이오.]
[왜 두렵던가요?]
[두렵다고? 그것은 당신들이 할 소리요.

이 도옥은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안하는 사람이오.]
[그래서?]
[당신들은 이 도옥을 간재(奸才)라고 하지만 이 도옥보다 더한 간재가 당신들 중에도 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이죠?]
[이 도옥의 부하들 속에 당신들이 보낸 첩자(諜者)가 있어서 모든 기밀을 탐지하는 것은 물론,

칠십명(七十名)이나 되는 이 도옥의 부하들을 꼼짝 못하게 중독시켰단 말이오.]
하는 말은 너무나 놀라운 말이었고 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어리둥절하고 의아해 하는 주약란 일행을 하나하나 노려보던 도옥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도옥은 부하들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이오.

그리고 그것을 복수하려고 구유기향(九幽奇香)을 뿌린 것이오.

이 도옥은 원래 주소저 한 사람만 중독시키려고 했는데 고맙게도 양형 부부와 조소저까지

따라와 주어서 옛정을 생각하고 아낌없이 중독시킬 것이오.

그러나 이 도옥의 부하 칠십? 명에 비한다면 당신들 네 명은 너무 적소.]
놀라운 말이고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도옥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가 칠십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깨끗이 중독시켰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다시 도옥은 양몽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양형! 이 도옥은 조금 전 무공으로 겨룰 때 양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기독(奇毒)에

중독되어 죽을 것을 미리 죽여서 뭘하나 해서 그냥 둔거요.

그래서 이왕 죽는 양형이기에 하는 말이지만? 양형이 제일 탐내는 귀원비급도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소. 이제 양형이나 이 도옥이 살 날도 앞으로 칠일(七日),

은밀한 곳에 감추어둔 귀원비급은 이 도옥의 부하 두 명만이 알고 있소.

그러면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이 도옥의 부하들은 천하 무술계를 쥐고 흔들 것이오.

그러니 만일 목숨이 아깝다면 이 도옥의 요구를 들으시오.]
이때, 뒤미처 달려오다 도옥을 발견한 동숙정은 기필코 오늘만은 도옥을 죽여 가슴에 맺힌 한을

풀으리라고 백번, 천번 마음 속으로 다짐하며 장검을 뽑아들고 눈을 흘겼다.
[도옥,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래도 용케 칠십 명 속에 끼이지 않았군!]
하는 것이었다.

순간,

주약란과 조소접 그리고 양몽환과 심하림은 펄쩍 놀랐다.
<그럼? ......도옥의 부하 칠십 명을 동사매가? ......>
틀림없이 동숙정의 솜씨라는 것을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었다.
그때 도옥의 놀라움은 주약란 일행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땅을 구르며 한 걸음 나서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으음...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틀림없는 당신의 짓이군!]
하며 이렇게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듯 눈을 까뒤집으며 동숙정을 노려보았다.
<저 년을 일찍이 처리해 버리지 못한 것이...... 아, 분하다. 분해......>
그러나 별 수 없는 노릇, 동숙정의 비수같이 가슴을 찌르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흥! 잔재주로 다른 사람을 해쳤으면 그만한 울분으로는 아직 모자라지!

독수를 쓰는 자에겐 역시 독수로 보복해야 해!]
가시돋친 말에 도옥은 분통이 터지고 창자가 뒤틀려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들어 한 칼에 요절을 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것은 머지 않아 역시? 구유기향에 쓰러질 동숙정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독은 독으로, 악은 악으로, 좋은 말이오.

이 도옥은 이 주위 일대에 구유기향을 뿌려놨소.

당신도 앞으로 칠일이오.

칠일이 지나면 당신도 별 수 없지.]
그러나 동숙정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흥! 구유기향? 여기 해독약이 얼마든지 있어. 그러나 너만은 줄 수 없지!]
하며 품 속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 보이는 순간!
돌연, 매가 병아리를 채가는 것처럼 으흥!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린 도옥이 동숙정을 덮치는 순간과 동숙정의 장검이 은빛을 그으며

쇳소리를 낸 것과는 거의 같은 순간이었고 또 눈깜짝할 사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으로 솟아 올라가는 검은 물체와 사방으로 튀기는 피가 도옥의 비명과 함께

동숙정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바람에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선 동숙정은 금환이 끼워진 채?

어깨에서부터 잘라져 떨어진 도옥의 한 팔과 엉금엉금 기어가다

털썩 주저 앉는 도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옥의 온 몸은 목욕이나 한 듯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달빛에 번쩍였다.

도옥은 얼굴이며 옷이며 흠뻑 피를 뒤집어 쓴 채 두어번 신음소리를 내고는

그나마 그쳐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도옥을 보는 동숙정은 잠시 가슴이 쓰렸다.?

 평생 풀지 못할 한을 품게 한 원수였지만 처참한 그의 몰골을 보는 순간

약하기만 한 여자의 마음은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원수는 원수다.

 

반생(半生)을 비탄(悲嘆)과 수치(羞恥) 그리고 절망 속에서 헤매게한 장본인 앞에서

이제 동정심이나 연민을 나타내기에는 이미 메마를대로 메마른 동숙정의 가슴이었다.
[도옥! 벌써 죽여야 할 것을......오늘에야 복수하게 됐어!]
그러자 고통을 못이겨 얼굴을 온통 찌푸리고 피를 뒤집어 쓴 채?

줄줄 땀을 흘리며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도옥은 그래도 기가 죽지 않고 씨익 웃는 것이었다.

독종이오, 악종이다.
[흥! 비록 이 도옥이 오늘 여기서? 죽는다 해도 앞으로 삼년 후면 이 도옥의 화신(化身)

십여 명이 나타나 꼭 보복할 거요.

그들은 모두 이 도옥이 숨겨둔 귀원비급을 찾아 무공을 닦을 것이오.]
[그래도 큰 소리를! 귀원비급이 어디 있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어!]
그러자 도옥은 참느라고 잔뜩 찌푸린 얼굴에서 놀라운 표정을 띄웠다.
[뭣이!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리고 지금 어디 있소?]
[흥! 그래도 살고 싶어서 간계를 쓰려고 바로 네 품 속에 있지 어디 있어?]
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도옥은 얼굴에 핏기가 싸악 가시며 고개를 탁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음......진작에 너를 죽였어야 할 것을......]
하며 절망적인 한숨을 길게 토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잠잠히 섰던 조소접이 선뜻 도옥에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도옥! 원래 귀원비급은 내것이었어. 이제는 돌려주지?]
하는 소리에 도옥은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뜻 귀원비급을 꺼내주는 것이 아니라 주위를 세밀히 살피는 것이었다.

<......음, 주약란, 양몽환, 조소접, 심하림, 동숙정......

이 도옥을 둘러싸고 있지만 이곳을 뚫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팔이 잘리고 내상(內傷)을 입은 지금......조심해서 꾀를 써야지......>

하고 생각한 도옥은 앞에 서 있는 조소접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주약란을 부르는 것이었다.
[주소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에 임박하면 진실한 말을 한다고 하오.

그래서 이 도옥도 진실된 말을 한마디 하겠소.]
그러자 주약란은 별로 이렇다 하는 표정없이 담담히 말했다.
[살려달라는 말만 아니면 하세요.]
하고 말하는 주약란을 이윽히 바라보던 도옥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수 십년 동안 천하 무술계가 파란만장으로 풍파가 그치지 않은 것은 바로 귀원비급 때문이었소.]
하며 그제야 자기의 품 속에서 귀원비급을 꺼내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풍파를 없애기 위해서 이 도옥은 얼마 동안 생각한 나머지

이 귀원비급을 불태워 버리든가, 아니면 이도옥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주소저 당신이 보관해 두면

다시는 풍파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소.]
하며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주약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그래 저 귀원비급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져 갔는가.

물론 귀원비급을 가진 사람이 착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시 도옥처럼 악독한 자가 가지게 된다면......>

그야말로 어지러운 풍파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럼 내가 보관하겠어요!]
하면서 도옥에게로 다가가 마악 내미는 귀원비급을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주약란의 손과 귀원비급 사이로 날카로운 장점이 가로막는 것과 동시에 다급한 음성이 터졌다.
[안돼요. 건드리지 말아요.]
순간, 주약란과 도옥은 동시에 손을 거두어들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눈썹을 치켜올린 동숙정이 도옥을 노려보며 재차 소리치는 것이었다.
[도옥! 죽음 앞에서도 끝내 독수를 쓰려고?]
그러자 도옥은 정말 이년을 죽일 것을 ...... 하고 다시 후회했다.

정말 후회막금이었다.
[무슨 독수를 쓴다는 거요?]
[뭐라고? 극독(極毒)에 잠겼던 귀원비급으로 주소저를 해치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나를 속이려고?]
[터무니없는 소리......]
검붉은 피를 뒤집어 쓴 도옥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동숙정을 노려보았다.

<......음......아무래도 안되겠는걸......양몽환이라도 사로잡아 인질로 삼고......>

조건을 걸기로 결심하고 암암리에 진기를 돋우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양몽환을 향하여 달려들었다.
이때, 양몽환은 앞서 도옥과의 일전으로 아랫배와? 허벅지에 중상을 입고

그대로 앉아 운기 조식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달려드는 도옥을 발견하고 간신히 손바닥을 폈을 때는

이미 양몽환의 손바닥을 힘껏 갈기는 순간이었다.
양몽환을 후려 갈기며 스쳐간 도옥은 여섯 걸음이나 더 지나가서 다시 쓰러지고 양몽환은

앉은 자리에서 뒤로 발랑 자빠졌다.
너무나 돌발적이고 순간적인 일이어서 그 누구도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피를 한 입 토해내는 양몽환에 비해 도옥은 어떻게나 모지게 쓰러졌는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리다 겨우 무릎을 꿇 듯하며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어나 앉은 도옥은 앞으로 엎어질 때 돌뿌리에 쓸렸던 코와 입이 형편없이 찢어져 있었다.
모든 계획이 난데없이 나타난 동숙정에 의해 헛되게 틀어져버린 것을 생각하면 땅을 치며 통곡해도

원통함이 풀리지 않을 것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없이 저리고 쑤시는 상처의 고통도 동숙정을 생각하면 아픔이 싹 가시고

대신 분통과 원통함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분통함을 터뜨리고 있을 때 다가온 사람이 바로 동숙정이었다.

<이년! 간(肝)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겠다. 어서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라. 그러면......>

하는데 가까이 다가온 동숙정은 마음 턱 놓고 도옥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이제 더 항거할 능력이 없는 도옥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옥! 죽을 때까지도 독수를 쓰는군......]
하는 그때 말을 갑자기 그치는 동숙정의 입에서는 그만 따가운 비명이 터지고 말았다.
[아얏!]
순간 동숙정의 왼쪽 발이 힘껏 요동하고 동시에 장검은 쇳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라놓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동숙정의 발길질에 여지없이 빠져버린 도옥의 이빨과 잔등에서부터 엉덩이까지 깊이

한 줄로 찢어져 벌어진 살덩이. 동숙정의 장검은 도옥의 허리 위를 번개같이 날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숙정의 왼쪽 정강이에는 주먹만큼 살덩이가 떨어진 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팔은 잘리고 내상도 심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도옥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동숙정을 본 순간,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동숙정의 정강이를 물어버린? 것이었다.

그러자 경계심을 풀어버리고 다가가던 동숙정은 반사적으로 발길질을 하게 되었고

동시에 들고 있던 장검으로 도옥의 등을 후려치고 말았다.
그러나 도옥은 다시 두어번 버둥거리다 꿈틀거리며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퉤! 한 입 뱉아내는 그의 입에서는 피에 범벅이 된 이빨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도옥은 핏발이 선 눈으로 동숙정을 노려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끈질긴 도옥이다.

이미 숨이 끊어졌어도 그 사이 몇번을 끊어졌으련만 여전히 피를 뱉으며 말하는 것이었고
그때마다 부러진 이빨이 튀어나왔다.
[음......슬프다. 동숙정 너부터 죽이고 그 다음 양몽환을 죽인다음 남악 땅 형산에서

구대문파 고수들을 죽이고......음...... 주약란만 사로잡아 이 도옥과 함께 살려고...... 했는데, 퉤!]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전혀 자기 잘못이나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도옥은

피와 이빨을 뱉아내고 다시 말을 이었다.
[......대사(大事)를 앞두고 동숙정 너한테 모든 기밀이 탐지되고...... 또 부하들을 죽이고......

이제 이 도옥 또한...... 이꼴이 된 지금......동숙정 너를 죽여 간을 씹어 먹지 못한 것이

철천지한이다......]
그러자 동숙정은 한 번 크게 외치며 들어올렸던 장검을 그대로 휘둘러 도옥을 내려찍고 말았다.
[끄윽......]
도옥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지를 쭉 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꿈틀거리는 것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한 도옥을 한 눈으로 보며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동숙정은

천천히 몸을 돌려 양몽환을 불렀다.
그리고 다가오는 양몽환에게 옥병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양사제! 이것은 해독약이에요. 그리고 저 도옥은 내가 데리고 가겠어요.]
<아니? 그럼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살려주겠단 말인가?>
[어디로? 아직 생명이 끊어지지는 않은 모양인데 어디로 데려가겠단 말입니까?]
[그래요.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래서 은밀한 곳으로 데려가 조금씩조금씩 살을 도려내어 죽이겠어요.

나도 오랜 세월을 그렇게 아픈 상처를 지니고 살았으니까요.]
하고는 입술을 깨물다 야수(野獸)의 울부짖음같은 소리를 지르며 도옥을 번쩍 안은

동숙정은 땅을 박차며 계곡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도옥을 안고 사라져 간 동숙정의 뒷 모습을 바라보는 일행의 얼굴에는

비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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