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29

오늘의 쉼터 2014. 10. 27. 23:03

제24장 원한 29

 

 

 계림의 풍습에 지소의 말이 굳이 안 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방 승낙할 문제도 아니어서,

“그거야 성골들이 자기들끼리 혈통을 이으려고 그랬던 거지.”

궁색한 변명을 하니 지소가 이젠 아주 드러내놓고,

“아무튼 난 누가 뭐래도 큰외숙한테 시집을 가고 말 거야.

 

큰외숙이 아니면 세상에 나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언니 죽고 나서 더욱 마음을 굳혔으니 어머니도 그렇게 아세요.”

하며 말을 분질렀다.

 

문희가 곰곰 생각하니 지소의 마음을 알 듯도 했다.

 

그래 춘추가 왔을 때 지소의 뜻을 전하자 춘추도 처음엔,

“애가 철이 없어 그런 게요.”

하며 웃고 말았는데,

 

갈수록 지소가 고집을 꺾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므로 급기야는 집안에 우환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 그 말을 듣고는,

“지소가 제 아버지를 닮아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호통을 칠 줄 알았더니 도리어 지소 편을 들고는 한걸음 더 나아가,

“너희가 말을 못 꺼내면 내가 하마.”

사단의 전면에 나서서 다짜고짜 유신의 집을 찾아갔다.

 

만명과 천명, 두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이가 점점 더 좋았다.

 

촌수로야 만명부인이 고모할머니여서 천명한테는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서현과 용춘의 남다른 우애 덕에 허물없이 지낸 지 오래였고,

 

춘추와 문희가 혼인을 한 뒤론 사돈이 된 데다,

 

덕만이 보위에 오르고는 또 왕실의 든든한 외조자로서도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이었다.

 

동서고금 에 우리 같은 진귀한 연분이 또 있으랴.

 

이는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하면 늘 입버릇처럼 해온 소리였다.

 

천명이 만명을 찾아가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돌아온 천명부인의 얼굴엔 희색이 감돌았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춘추와 문희를 불러,

“윗전의 마음은 정해졌으니 남은 건 신랑될 사람의 마음이다.

 

세상에서 뭐라 하든 우리네는 우리네 갈 길을 가면 그만이야.

 

처남 매부에 옹서간이면 겹사돈 중에서도 천하에 둘도 없는 인연이니

 

더벅머리 청년 시절에 생사고락을 같이하기로 약조한 너희 아버지와 하주 어른의

 

아름다운 맹세가 너희들 세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는구나.

 

지하에 계신 아버지도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마치 혼사가 다 정해진 것처럼 흡족해하였다. 그리고 춘추에게 말하기를,

“윗전의 뜻이야 내가 물었지만 당사자 마음은 처남 매부 간에 담판을 지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하여 춘추가 내심 난감하면서도,

“기회를 봐서 제가 하지요.”

대답을 철석같이 했는데, 그 말을 저희 할머니한테 전해 들은 지소가 춘추를 볼 때마다,

“외숙께서 뭐래요? 저를 언제 데리고 간대요?”

퇴궐이 늦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빚쟁이 빚 갚을 날짜 을러대듯

 

매섭게 잡도리를 하고 나오니 날짜가 흐를수록 춘추 신세만 불쌍해졌다.

 

대답 얼버무리는 데도 한계가 있고 한집에 사는 딸 피해 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이라,

 

춘추는 당나라를 다녀와서 연일 이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다.

 

그러던 차에 임금이 고구려 사신을 윤허하지 않자

 

춘추의 뇌리에 홀연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초저녁에 술을 한잔 걸치고 김유신의 집을 찾아가 먼저 장인, 장모를 큰절로 뵈니

 

장인은 당나루 해역을 한바퀴 돌아 당나라로 간일을 거론하며,

“내 사위 배포가 과연 두둑해. 큰일들 하시네.”

하고 치하한 뒤 술상이라도 내어올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장모가 무슨 눈치를 챘는지,

“오늘은 당신한테 용무가 있어 온 것이 아닐 겁니다. 그렇지?”

하고서,

“가서 얘기들을 잘 나눠보시게.

 

내가 미리 넌지시 말은 넣어두었는데 워낙 내색을 안하는 사람이라 뜻을 알 수가 없다네.”

하고 언질을 주었다. 춘추가 안채를 물러나와 유신이 거처하는 딴채로 건너가니

 

유신이 반갑게 맞이하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 임금께서 사신 승낙을 하지 않은 연유가 무어라고 보십니까?”

춘추의 질문에 유신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야 아우님이 잘못될 것을 염려해서지. 실은 나도 그게 걱정이거든.”

“고구려는 적지입니다. 전들 어찌 불안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춘추는 사신 얘기가 나오고 처음으로 두려움을 내비쳤다.

 

유신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구연이 있다고는 하지만 연개소문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와 사귄 것은 20년 전의 일이니

 

그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알 길이 없습니다.”

“소문을 들어보면 복병을 세워 조정 대신 1백 명을 무참히 죽인 뒤 곧장 왕정으로 뛰어들어

 

임금을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시궁창에 버렸다고 하니

 

그런 잔학한 자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나?

 

그래서 말인데 내가 아우님을 수행해 가면 어떻겠는가?”

“그건 안 됩니다.”

춘추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쪽에선 어차피 낭비성과 칠중하의 일을 거론할 것이 명백한데

 

만일 그 자리에 형님이나 알천공이 있다면 일이 순조롭지 못할 건 뻔합니다.

 

더욱이 이런 일은 단기(單騎)로 가야 의심을 사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자 유신은 한층 침통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진퇴양난일세. 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보낼 수도 없고……”

그런 유신을 향해 춘추가 짓궂게 물었다.

“만일 제가 고구려에 가서 해를 입고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하시렵니까?”

춘추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김유신의 얼굴이 돌연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네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나의 말발굽이 기필코 고구려와 백제,

 

양국 궁정을 짓밟아버릴 것이네!

 

그러지 않고 무슨 면목으로 우리 백성들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양가 어른들과 식구들을 대할 수 있겠는가?”

유신의 고함소리가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민 듯 눈에 광채가 이글거리고

 

수염이 뻣뻣하게 일어났다.

 

평소에 유신과 지친의 우애를 나눠온 춘추였지 만

 

그 모습을 대하자 새삼 감격스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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