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27
“계림의 법도는 엄격하다. 나의 사촌 오라버니였던 진지 대왕께서는 지아비가 있는 부녀를
잠시 대궐에 데려가 우어한 까닭으로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나의 경우만 해도 진골인
너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은 탓에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뵙지를 못했다.
국법을 어겨 배필을 구하거나 신분에 어긋나는 정인을 두고는 만인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또한 만군을 통솔할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의 오랜 전통이다.
하니 너는 어느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나라의 큰 장수가 되고자 하면 금일 이후로는 처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지만 만일 천한 기생의
지아비로 만족하려거든 어디 조용한 산골로 들어가서 농사나 짓고 살아라.
어느 쪽을 택하든 이는 너의 자유다. 그러나 옛일을 살펴보면 사전(史傳)에 이름이 오른 인물은
그 숫자가 적고 여인의 지아비가 되는 일은 사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결정은 네가 해라.
나라를 구할 큰 장부가 되려면 때로 정분 따위는 단념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네가 굳이 여인을 택하겠다면 나는 장차 죽을 때까지 너를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번 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을 누구보다 서로 잘 아는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유신은 잠깐 괴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미 노할 대로 노한 어머니 앞에서 달리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동안 아무리 천한 여자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또 골화천 객관에서 도움받은 일을 말했어도 어머니는
요지부동 고개만 젓곤 했다.
“헤어지겠습니다.”
“정말이냐?”
“네.”
만명은 한동안 유신의 기색을 살피고 나서 비로소 평상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알았다. 그만 나가보거라.”
유신이 안방을 물러나 마당으로 나오자
아버지 서현이 뒷짐을 진 채 감나무 밑을 서성거리고 있다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모두가 시절 탓이다.
태평세월만 같아도 하룻밤에 꽃다운 정인을 들쳐업고 거로섬에 가서 산들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아비가 못나서 너희에게 그런 시절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만 너는 훗날 네 자손들에게 마음 따라
살 수 있는 때를 반드시 만들어주어라.”
하고 유신의 처진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유신은 어머니의 호통보다도 아버지의 그 말에 더욱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어머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면 그 뜻도 네 마음속에 품어라.
그래야 만사를 아우르는 큰사람이 된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냐, 알았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천관은 미리 짐작이라도 했을까.
거로섬에 나들이를 갔을 때 그는 잠자리에 누워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김유신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검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과 헤어지면 다시 칠불암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칠불암이 지금 서적의 손에 들어갔으니
만일 헤어지고 나거든 제일 먼저 칠불암부터 찾아주세요.”
유신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천관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만명부인의 뜻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왜 별안간 그런 소리를 하오? 이렇게 지낸 것이 어디 한두 핸가?”
유신이 불평하자 천관은 유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칠불암을 내려와 당신을 만났으니 후회는 없지만 더 늦기 전에
당신과 꼭 닮은 아이를 하나 낳으면 여한이 없겠어요.
당신을 이렇게 안고 있을 때면 더욱 그런 욕심이 생깁니다.”
유신은 어머니와 약속한 뒤 과연 천관의 집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비록 어머니와 철석같이 약속은 했지만 인연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정다운
이와 하루아침에 헤어지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시며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만명은 그런 유신을 못 본 체 외면했으나 아버지 서현은 달랐다.
수시로 유신의 방에 들러 기분을 물으며 아들을 위로했다.
하루는 유신이 술에 취해 들어와 아버지를 보고,
“장부란 본시 의리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부모님의 가르침과 기대를 좇는 것은 자식의 도리지만
여인과 맺은 의리도 가벼이 여길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소자는 그 둘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하니 어찌 그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어머님의 말씀은 하나도 그른 데가 없고 또한 소자도 장차 벼슬길에 나서려면 국법을 지키고
전통을 따라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관의 일이 더욱 괴롭습니다.”
하며 피를 토하듯이 하소연을 하니 서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어찌 천하의 덕을 논할 것이며,
한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슨 수로 만인의 처지를 읽겠느냐?
괴롭거든 실컷 울어라.
정인 때문에 우는 것도 필경은 장부의 일이거늘.”
하고 등을 어루만졌다.
그 뒤로 서현은 유신이 괴로워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밤에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와
뒷문을 열어놓곤 했다.
그날도 유신은 아버지가 몰래 열어놓은 뒷문으로 빠져나와 늦게까지 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첫날밤의 달고 아름다운 가약(佳約)에서부터 마지막 헤어지던 순간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숱한 일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아우들이 시집 장가를 다 가도록 홀로 지낸 것도 천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술잔을 비우며 어머니의 노한 얼굴과 천관의 해맑은 웃음을 번갈아 떠올렸다.
해거름에 시작한 자작이 어느덧 삼경, 반쯤 이지러진 달이 월성 망루 꼭대기에 처연히 내걸려 있었다.
유신은 바깥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며,
“저놈의 달도 절반을 잃고 나온 것이 영락없이 내 신세구나.”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백설총이에게 다가갔다.
“세상 사람 다 몰라도 너만은 내 마음을 알 테지?
이놈아, 똑바로 걷지 말고 오늘만은 갈지자(之) 걸음으로 가자꾸나.
그래야 어지러운 내 심사를 저 달도 알게 아니냐.”
말귀를 알아듣기로는 웬만한 사람보다 낫다는 백설총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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