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28

오늘의 쉼터 2014. 10. 26. 09:41

제24장 원한 28

 

 

 

 난승한테 얻어온 뒤로 유신은 그 말을 무엇보다 애지중지했다.

한번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하면 그 빠르기가 비호와 같고, 전장에서 상대편 말을 제압하는

기세는 마치 어른이 어린애를 다루듯 했다.

낭비성에서 성주 적문을 단칼에 벨 수 있었던 것도 백설총이가 꼬리를 물고 돌던 적문의 말을

뒷발로 힘껏 차서 중심을 흔들어놓은 덕분이었다.

평소에는 성질이 양순하다가도 싸움터나 사냥터에만 나서면 거세고 포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때로는 주인의 마음까지 신통히 알아차려서 천관과 나들이를 나갔을 때는 생전 안 그러던 녀석이

천관이 타고 나온 암말을 향해 시종 꼬리를 치고 아양을 떨기까지 했다.

백설총이는 만취한 주인을 등에 태우자 엉덩이를 한껏 낮춰 어기적거리며 걷는 듯 마는 듯

요동 없이 밤길을 걸었다.

그렇게 한적한 민가와 숲길을 차례로 지나친 말은 황룡사 남변의 좁은 갈림길에 이르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인은 이미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코까지 골아가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말은 갈림길에서 천경림 쪽을 택했다.

그 길은 오랫동안 주인을 태우고 다니던 익숙한 길이었다.

얼마 뒤, 천관이 사는 집 앞에 당도한 말은 특유의 우렁찬 소리를 내며 집안 사람들을 불러내는 한편

조심스레 등을 흔들어 잠든 주인을 깨웠다.

애마에게 몸을 맡긴 채 졸음에 빠져 있던 유신은 그제야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천관의 집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말울음소리를 들은 장미가 반색을 하며 달려나왔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용화 나리님 아니십니까요?”

천관의 몸종 장미는 유신을 보자 기뻐 어쩔 줄 몰라했다.

“야속하십니다, 나리님! 어찌하여 그토록 왕래가 없었나이까?

우리 아씨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왜 이제서야 오십니까요?”

호들갑을 떠는 장미를 보고야 유신은 모든 사태를 짐작했다.

그는 곧장 말에서 내려 안장에 걸고 다니던 보검을 뽑아 들었다.

“이놈아, 너는 어쩌자고 나를 여기로 데려왔느냐?”

유신은 마치 사람을 꾸짖듯이 말을 꾸짖었다.

주인의 호통에 놀란 백설총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대가리를 숙이더니

무슨 변명이라도 하는 양 붉은 빛이 도는 갈기와 숯처럼 검은 주둥이를 자꾸 만 흔들어댔다.

 

“내겐 그간 천경림이 오도가도 못하는 첩첩산중의 수만 리 벽지였거늘

너는 어찌하여 이토록 한달음에 나를 다시 여기로 끌고 왔더란 말이냐?

너는 주인의 심사를 이다지도 모른단 말이냐? 너 따위는 소용없다.

내 너를 죽여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하리라!”

 

자책이 심해 자학으로 나타난 것일까.

유신은 꾸짖기를 마치자 뽑아 든 보검을 가차없이 휘둘러 아끼던 애마의 목을 쳤다.

순간 백설총이는 천경림의 밤하늘이 진동할 듯 구슬픈 울음을 토하며 목 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잘린 말 목에서는 피가 한 장(丈) 높이로 치솟고 그것은 금세 눈처럼 새하얀 백설총이의 몸을

선홍빛으로 물들였다.

반색을 하며 섰던 장미는 기겁을 하고 대문 안으로 달아났고,

그 참혹한 광경을 문틈으로 지켜본 천관도 감히 나서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금쪽 같은 애마의 목을 벤 유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서 천경림을 떠났다.

이튿날 새벽,

술에서 깨어난 유신은 비로소 간밤의 일을 떠올리고 땅이 꺼져라 깊이 탄식했다.

“내 어리석음 때문에 공연히 충성스러운 말이 목숨을 잃었구나!”

그는 아침 일찍 소천을 시켜 백설총이의 사체를 거두어오게 하고 자신이 직접 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묻어주었다.

썩 뒤의 일이지만 김유신은 자신이 꿈꾸던 대업을 완수하고 나서 백설총이의 목을 친 천관의 집터에

사재를 털어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천관사(天官寺)라 했다.

후세 호사가들의 갖가지 해석이야 말해 무엇하랴.

다만 신분의 장벽을 사이에 둔 남녀의 애틋한 사랑과 죽은 말의 가슴 아픈 사연만이 구슬픈

전설로 화하여 천관사 절터와 함께 오늘까지 이어질 따름이다.

그로부터 3년 반이 흘러갔지만 유신은 따로 배필을 맞이하지 않았다.

천관이 남긴 상처가 워낙 마음에 컸던 탓이리라.

이런 사연을 모두 아는 문희로선 지소가 당돌하게 묻는 소리에 얼른 대답할 말 이 없었다.

우물거리고 선 문희를 보고 지소가 다시 말했다.

“저는 큰외숙과 같은 분이 아니면 시집을 안 갈 거예요.”

그때만 해도 문희는 지소의 뜻이 정확히 어떤 건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큰외숙과 같은 분이라니? 수염 긴 사람을 말하는 거냐?”

“수염도 짧은 것보다는 긴 게 좋지만 반드시 수염을 말하는 건 아니구요.”

“그럼? 체구가 큰 사람? 아니면 나이가 많은 사람?”

“하여간 큰외숙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이요.”

문희는 지소가 철이 없어 그런 말을 하는 줄 알고 깔깔대며 웃었다.

“얘,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어디 있어?

특히 너희 큰외숙은 무섭게 생겨서 그런 비슷한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게다.”

“그럼 어렵게 찾을 것도 없이 큰외숙한테 시집을 가버리면 되지?”

지소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문희가 그제야 깜짝 놀라,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니? 큰외숙한테 시집가는 사람이 어딨어?”

하니 지소가 대뜸,

“왜 없어요? 왕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진흥 대왕은 고모하고 살았고,

어머니의 외할아버지만 해도 입종할아버지가 형님의 딸을 배필로 맞아 낳으신 분이잖아요?”

하고 문희의 집안 내력을 들먹였다.

법흥 대왕의 아우 입종이 형님의 딸을 아내로 맞아 진흥 대왕과 문희의 외조부인 숙흘종을 낳은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라 문희가 일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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