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4장 원한 26

오늘의 쉼터 2014. 10. 26. 09:25

제24장 원한 26

 

 

 

 “유신은 금관국의 자손이기도 하지만 신라 왕실의 피도 이어받은 아입니다.

더욱이 둘로 갈라진 가야와 계림의 민심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유신이 아닙니까?

차라리 배필 없이 혼자 살았으면 살았지 금관국의 처자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가야인의 마음은 얻을지 모르지만 계림의 민심을 잃게 될 것입니다.

중도를 지켜야지요.

춘추가 문희와 결혼하여 가야인의 마음을 얻었듯이 유신은 계림의 명가 처자와 성혼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물며 나라의 세도가 모두 계림에 있지 않습니까? 큰일을 하려면 금관국의 처자는 절대로 안 됩니다.”

 

너그러운 아버지에 엄한 어머니였다. 마흔이 넘은 유신도 아직 어머니 앞에서만은 고양이 앞의 쥐였다. 기굴한 덩치에 검고 윤이 나는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유신이 안채 방문 앞에서 안절부절 서성거리자

안에서 잔기침소리가 나더니,

 

“누구냐?”

 

하는 만명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신이 기어드는 소리로,

 

“소자 유신입니다.”

 

하니 돌연 방문이 왈칵 열리며,

 

“냉큼 들어오너라!”

 

그러잖아도 무서운 얼굴에 쌍심지까지 켜고 만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신이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안방으로 들어가자

만명이 다짜고짜,

 

“잘 왔다.

나는 내일 날이 밝으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가서 중이 되려고 하거니와 출가 전에

네 얼굴을 보고 가니 다행이다.”

 

돌연한 소리를 뱉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어머니께서 절에 들어가 중이 되려고 하시는지요?”

 

유신이 깜짝 놀라 되물으니 만명이 사납게 유신을 노려보며,

 

“네가 하는 짓을 보니 세상이 허무해서 그런다. 아무리 공들여 자식을 키우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라에 중대사가 생겨 임금이 찾고, 부모가 찾고, 국변이 나서 만인이 찾아도 번번이 나타나지 않는

그런 한심한 위인을 자식이라고 낳아 키웠으니 나는 집안에도 죄인이지만 나라에도 죄인이다.

너는 옛날 칠숙이 난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했을 때도 소문을 듣자니 신선 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을

모르고 천한 여자와 어울렸다는데, 이번엔 북적이 쳐들어와 세상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그림자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내가 집안 하인들한테조차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도대체 넌 무엇을 하는 위인이며 올해 나이가 몇이냐?

이제 나는 네게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

자식이 죄인이면 부모 또한 죄인이다.

내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고 나거든 너는 천관인가 하는 그 여자와 마음놓고 살아라.

이제 아무도 방해할 사람이 없으니 깨가 쏟아지게 산들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눈에서 눈물이 쑥 둘러빠지도록 가슴 아프게 야단을 쳤다.

유신이 자라면서 어머니의 꾸지람을 몇 번 들었지만 그만큼 격노한 모습을 보는 것도,

그만큼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너는 금관국 왕실에서 뼈를 얻고 신라 왕실의 살을 얻어 태어난 몸이다.

사람이란 본시 조상의 음덕으로 육신을 얻어 명줄을 이어가는 법이거늘

네가 지금 뉘 덕으로 여기에 있고, 너를 지켜보는 음부의 조상이란 과연 어떤 분들이냐?

헌원(軒轅:황제 헌원씨)과 소호(小昊:소호 金天씨. 김씨의 시조)까지 갈 것이야 없다 해도

수로 대왕 이후 남가야의 열성조와 미추 대왕 이후 계림의 열성조가 모두 너에게 골육을 제공하고

생장과 광명의 길을 터주지 않았느냐?

고결하고 귀중하기로 친다면 세상의 누가 너만할 것이며,

어느 나라의 제왕이 너보다 후한 덕을 입었을 것이냐?”

흥분한 만명은 극도로 언성을 높였다가 갑자기 차분하게 말투를 고쳤다.

“어미는 이미 늙었다.

내 마지막 소원은 네가 자라서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나라의 대들보가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런데 하늘처럼 믿었던 네가 근본도 알 바 없는 천한 여자들과 어울려 일생을 보내니

어미는 너무도 기가 막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이것이 과연 뜻을 품은 장부가 할 짓이며 또한 부모를 섬기는 자식의 도리더냐?

천하의 김유신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만명의 낮고 근엄한 말투는 유신이 듣기에 차라리 화를 불같이 내며 소리를 높여

꾸짖는 것보다 훨씬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계속되는 꾸중에 유신은 고개를 떨구며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상수살이의 울분으로 천관을 만났고, 천관의 재색(才色)에 반해 정이 깊어졌지만

부모가 찾고 임금이 찾을 때 나타나지 않은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앞으로 이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신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출가하신다는 말씀은 거두어주십시오.”

 

“도대체 임금이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

 

“……못 들었습니다.”

 

“사방에 파발이 뛰고 관령이 날아갔다.

게다가 알천은 그 다급한 때에 이틀씩이나 출정을 미루고 기다렸다.

누구와 어디를 갔기에 금성의 개도 아는 소식을 너만 몰랐단 말이더냐?”

 

“거로현에 산보를 갔었습니다.”

 

만명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에도 그 천관인가 하는 여자와 동행했더냐?”

 

“……네.”

 

유신의 머리가 더욱 아래로 꺾였다.

 

“그 여자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그렇게도 정을 끊기가 어려운 게냐?”

 

“죄송합니다.”

 

“좋다. 그럼 오늘 이 자리에서 아주 담판을 짓자.”

 

만명은 작심한 듯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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