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인과응보
지광대사에게로 향하는 도옥을 발견한 양몽환은 급히 불러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계략이 많은? 도옥이 어떤
묘책이라도 있을까해서 막지도 않고 그냥 놔두었다.
이때 지광대사에게로 다가간 도옥은 급히 음성을 낮추어 지광대사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그러자 지광대
사는 홱! 얼굴빛이 변하며 도옥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지광대사의 표정
으로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때 도옥의 엄숙한 말이 들려왔다.
[대사! 그 방법 밖에는 방책이 없을 것이오.]
하는 말에 지광대사 역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엇으로 당신을 믿을 수 있소?]
[그건 이 도옥이 알 바 아니오.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중
원 땅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오.]
도대체 무슨 조건을 내걸고 또? 무엇을 흥정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도옥이? 양몽환 일행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는 양몽환은 사태의 결과만을 지켜보기로 했다.
지광대사는 무엇인가를 잠시 동안 생각하고는 도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들 중원 사람들은 너무 교활해서 믿을 수가 없소.]
[그렇게 믿지 못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오.]
하고 도옥은 흥! 코웃음을 터뜨렸다.
이와같이 지광대사와 도옥이 대화를 중단한 바로 그때, 그렇게 요란하게 쏴우던? 대정밖이 일시에 조용해지
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싸우는 소리는 고사하고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에 정신이? 번쩍 든 지광대사와 양몽환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일제히 대청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히 살벌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야 할? 싸움터가 조용하다
면 이것은 보통 심상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광대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휘황하게 비추는 횃불 아래 보이는 것은 경혼대진이고 뭐고 즐비하게 쓰러진 승려들의 시체
뿐, 세상 만물이 일시에 움직임을 정지한 듯 스산한 달빛,? 불빛 아래 숨소리도 없이 쓰러진 시체의 승려들
을 보는 지광대사는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다 못해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
는 것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놀란 사람은 지광대사뿐만 아니라, 양몽환을 비롯한 여러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경혼대진을 벌려 놓고 누구든지 들어오기만 하면 박살을 낼 것처럼 위엄을 떨치던 승려
들이 송장이 되어 너저분히 쓰러져 있을 줄을 그 누가 꿈에라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인데 어쩌랴!
대청 안은 너무나 괴이하고 돌변한 사태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그러한 조용한 침묵을 깨뜨리며 앙천대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도옥이었다.
[핫......하......대사 어떠시오? 이래도 이 도옥의 조건을 듣지 않겠소?]
그러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지광대사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을 씰룩거렸다. 할 수? 없는 모양이었
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어 저 지경이 되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지광대사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 들
어선 기분이었다.
[당신이 맹세한다면 그렇게 하겠소.]
침울하고 기운없이 중얼거리는 지광대사는 멍청히 허공을 노려보았다.
[맹세? 그까짓 맹세가 무슨 큰 일이라고? 얼마든지 맹세할 수 있소.]
[맹세하시오.]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소? 만일 이? 도옥의 말대로 이행되지 않는다면 이 도옥? 스스로 사지(四肢)를 갈라
자결하겠소. 어떠시오?]
입으로는 큰 소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냉소를 터뜨렸다.
<이 도옥이 자결?...... 천만에, 천만에 말이지. 할 일이 없어서 자결을 해? ......어림도 없지......>
하고 교활한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돌변한 지광대사가 느닷없이 달려들어 도옥의 두곳 요혈을 짚는? 것
과 동시에 양몽환이 신용출운(神龍出雲)의 수법으로 도옥을 덮치는 지광대사를 후려 갈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천만 뜻밖에도 도옥이 양몽환을? 배반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지광대사와? 행동을
같이 하며 호랑이로 변한 도옥이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도옥의 간계를 의심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뜻밖의 돌변에 머리가 홱!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양몽환이 자기의 날카로운 장풍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지광대사를? 덮치고 재차 장검을 휘두르며 나가는 찰
나, 오른 팔을 비스듬히 뻗은 도옥이 양몽환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양
몽환은 무릎을 치며 일쩍 손을 써서 도옥을 처치하지 못한 것이 후회막심이었다.
사실 지광대사에게 다가간 도옥은 지광대사의 손을 빌려 자기의 요혈을 짚어 기력과 상처를 회복하는 조건
으로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내세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자 도옥과 지광대사의 공격부터 피하려고 장검에 힘을 주며 도옥에게 덮쳐든 양몽환!
그리고 몸을 비스듬히 눕히며 반격하는 도옥!
이윽고 아슬아슬하게 서로 몸을 부딪칠 듯하면서 일격을 교환하는 순간, 장검을? 휘두르고 지쳐나가는 양몽
환의 옆구리로 바싹 다가든 도옥의 왼쪽 손끝에 양몽환의 손목이 스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곳이 바로 맥혈임을 깨닫고 다급히 손을 거두어들이던 양몽환은 불현듯 저려오는 통증에 쥐고 있
던 장검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기세를 돋운 지광대사는 거칠 것 없이 양몽환을? 노리고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달려드는 것이었
다. 그러나 비록 장검을 떨어뜨렸다 해도 자신이 있는 양몽환은 저려오는 손목을 뒤로? 돌리며 무릎을 세워
마악 덮쳐드는 지광대사의 아랫배를 내지르고 한걸음 다가서면서 팔굽을 내려찍어 지광대사의 왼쪽 어깨를
공격하는데 성공했다.
그 통에 단단히 혼이 난 지광대사는 눈에서 번쩍하는 불똥을 떨어뜨리며 다섯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한핀, 양몽환의 손에서 장검을 떨어뜨리게 한 도옥이 재빨리 떨어뜨린 장검을? 집어들고 양몽환에게로 달려
드는 순간!
[환아, 비켜라!]
소리와 함께 도옥을 가로막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번쩍 고개를 돌린 양몽환의 눈에는 용두지팡이를 거머쥔 이창란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서 있고 그 뒤로 옥
영자와 곤륜삼자 그리고 백독옹이 계속 뛰어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위태한 위기에서 구원자를 맞게 된 양몽환은 숨을 돌려쉬며 한 걸음 비켜섰다.
그때 한소리 크게 외친 이창란은 걸음을 크게 떼어 놓으며 용두지팡이를 휘둘러 도옥과 지광대사를 일거에
뒷걸음치게 한 다음 수염을 꼿꼿이 세우며 도옥을 불렀다.
[도옥! 네가 이제는 이역의 요승(妖僧)들과 결탁까지 해서 흉계를 써? 이놈,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놈!]
하며 용두지팡이로 마룻바닥을 탕! 쳤다.
그러나 도옥은 가늘게 실눈을 뜨고는 씨익! 차갑게 웃는 것이었다.
[너무 지나친 말씀이오. 이 도옥이 비록 선량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해도 믿어주지는 않을 거요.]
[건방진 소리! 어느 앞이라고 가볍게 입을 놀리느냐?]
[핫......하......그것 보시오. 이 도옥이 아무리 선량해지려고 해도 믿지 않으니 그 아니 애석하겠소.? 그래도 이
도옥은 사람을 구하고자 왔는데!]
[사람을 구해? 속이지 마라!]
[천만에, 이래봬도 이 도옥은 주약란을 구하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이오.]
[주약란을 네가 구한다고? 너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주소저를 무엇 때문에 구하러 왔단 말이냐?]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는 일이오.]
[그래? 좋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이 늙은이는 너를 죽여야만 되겠다. 그래서 풍파의 화근을 없
애야지!]
[핫......하......그러나 애석한 일은 이 도옥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오. 죽지도? 않겠지만 죽일 기회도 없을 거
요.]
[마음껏 웃어둬라. 오늘이 마지막인 줄 알고!]
[안될 말씀. 이 도옥이 중독되어 있을 때는 죽이기 쉬었지만 지금은 어려울 거요.]
하며 도도하게 이창란을 보는 도옥을 노려보고 있던 곤륜삼자의 장문인 옥영자는 듣기만 해도 비위가 상하
는지 장검을 한번 휘둘렀다 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간악한 자를 죽이는데는 무술계의 도의를 지켜야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 곤륜삼자는 기필코 저 도옥을 죽
여 풍파의 화근을 없애겠소!]
하며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사실 곤륜삼자(崑崙三者) 라면 모두? 무술계의 쟁쟁한 고수들로서 실로? 금성철벽(金城鐵壁)과 같은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도옥은 여전히 실눈을 뜨고 씨익 웃어보일 뿐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때, 대청 밖에서 술렁거리며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대청 밖에는 왕한상이 거느린? 수 십명의 장정이 옥소선자가 데리고? 온 삼수나찰 팽수위와 조소접의
시녀들에게 포위된 채 대청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와 반면 이창란의 부하인 검북사의는 예리한 비수를? 뽑아들고 대청문을 지키고 도옥과 왕한상을 번갈아
노려보며 어느 때라도 비수를 날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듯 험악한 분위기를 돌아본 도옥은 아무래도 자기 편이 약세인 것을 간파하고는 쓸데없는 만용은 삼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지광대사에게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대사, 주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이때, 역시 처참히 패배를 맛본 지광대사도? 경혼대진이 어떻게 저 모양이 되었을까 하고? 낭패해서 처참히
얼굴을 씰룩거리다가 도옥의 질문을 받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쪽 휘장을 친 곳에 있소.]
그러자 도옥은 남이 듣지 못할 정도로 음성을 낮추었다.
[대사, 지금 처지로서는 계략을 쓸 수밖에 없소.? 이 도옥을 믿는다면 주소저를 이용해서 계략을 쓰는? 것이
어떠겠소?]
하는 말에 지광대사도 별 수 없는지 즉각 응낙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군. 데리고 나오겠소.]
하고 지광대사는 휘장을 친 곳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용두지팡이를 거머쥐고 있던? 이창란은 한소리 크게 외치며? 도옥을 노리고 용두지팡이를 날렸다.
그러자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도옥은 양몽환에게서 빼앗은? 장검을 비스듬히 비껴 세우고 가슴을 보호하는
한편, 한 발을 크게 내디디면서 반격해 속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선뜻 달려들지 못하는 이창란
의 용두지팡이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억센 바람만 일으켰다. 그런데다? 도옥의 검법이
눈이 돌아갈 만큼 변화무쌍하고 또? 기기묘묘해서 용두지팡이를 휘두르는 이창란도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서는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창란이 휘두르는 용두지팡이는 그 길이가 육척(六尺)으로? 한번 휘두르면 어느 누구도 육척 이내의? 거리
안에서는 박살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다 웅후한 내공의 소유자이며 강호계의 원로(元老)급인 이
창란의 기력에 있어서야!
거의 십여합의 치열한 공방전이 교환되고서야 이창란과 도옥은 잠시 숨을 돌려쉬었다. 그러자 마침 휘장 속
으로 들어갔던 지광대사가 주약란을 두 팔에 안고 나오다 도옥을 방패삼아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도옥의 눈은 이창란과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사방을? 싸늘하게 쏘아보며 경계
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를 더 노려보고서야 지광대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광대사의 품에서 빼앗듯 주약란을 받아안은 도옥은 어느 누가? 감히 덤비겠는가 하는 듯 턱을 치
켜들고 사방을 훑어보았다.
[만일 이 도옥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여기 주소저도 온전치 못할 것이오.]
주약란의 목숨을 위협하며 누구도 자기 앞을 얼씬거리지? 못하게 위협을 터뜨리자 이창란은 물론 양몽환이
나 그 누구도 일시에 기가 죽고 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날카로운 소리가 대청의 천장을 울렸다.
[도옥!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마라!]
순간, 흘깃 소리나는 곳을 바라본 양몽환은 답답하던 가슴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은 바로 옥피리의 명수인? 옥소선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옥소선자? 뒤에는 독약의 명장(名匠)인
백독옹이 기세도 늠름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돌연 나타난 옥소선자와 백독옹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도옥은 몸을 좌우로 약간 흔들거리며 가볍게
기침을 했다.
[흥! 그따위 위협에 두려워할 이 도옥이? 아니오. 지금 주소저는 이 도옥의? 손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옥소선자의 뒤에 바싹 다가선 백독옹에게로 싸늘한 시선을 옮겼다.
[백독옹! 당신이 경혼대진을 파괴했소?]
그러자 백독옹은 옥소선자 뒤에서 한 걸음 나서며 가슴을 폈다.
사실 백독옹에게 큰 소리치긴 했지만 독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백독옹이 언제 또 독을 뿌릴까 싶어 약간 긴
장하는 도옥이었다. 그러나 백독옹은 독을 쓸 마음은 없는지 눈을 부라리며 도옥을 노려보고는 느릿하게 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조금 재주를 피운 정도네!]
하고 자랑도 겸손도 아닌 말을? 느릿하게 하는 백독옹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도옥은 입안이 마르는지 꿀꺽
침을 삼켰다.
[이 도옥이 당신을 초청한 것은 이 도옥을 도와달라는? 뜻이었는데 불행히 이 도옥의 원수가 될 줄은 물랐
소.]
[허......허 ......도방주가 양해하시지. 이 늙은이는 옥소소저에게 패했기에 부하가 된 것일세!]
그러자 도옥은 언성을 높였다.
[무슨 일이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남을 속이기도 하는 법, 어찌 거짓말을 하지 않았소?]
[거짓말? 그럼 이 늙은이 보고 언약을 저버리라는? 것인가? 그래도 방주라는 자네가 간사한 수단으로 선량
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군!]
[뭣이? 좋소. 만일 이 도옥에게 기회가 있다면 당신의 머리를 박살내고 말겠소!]
하고 입술을 깨물자 백독옹 역시 눈을 부라렸다.
[좋아! 그러나 자네가 이 늙은이에게 접근만 한다면 극독(極毒)으로 너부터 죽여주지!]
차차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도옥의 팔에 안긴 주약란을? 생각하면 이대로 험악한 형세를 방관할 수? 었는 일이었다.
만일 도옥이 분통을 터뜨리게 되면 그의? 손에 든 주약란의 생명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옥소선자는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떤 조건이라도 그가 요구하는대로 들어주고? 주약란을 구
해야 하는 것이 급한 일임을 깨달은 옥소선자는 음성을 낮추어 도옥을 불렀다. 그래야만 백독옹과의 충돌도
피할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도옥, 주소저를 돌려주면 이곳을 벗어나게 하겠소.]
그러자 도옥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필요없소. 이 도옥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해 환장한 줄 아시오?]
[그럼, 돌려주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아니, 돌려주긴 하겠소.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아니오.]
하고는 더 말하기 싫다는 듯이 지광대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사, 이 대청 안에 몇명의 부하가 있소?]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대청을 휘둘러본 지광대사는 간단히 대답했다.
[약 이십명!]
[그럼 그 중에서 제일 날렵한 부하 여덟 명만 고르시오. 나머지는 자기들 마음대로 가게 하고.]
[그렇게는 안되오. 다 데리고 가야 하오.]
[그럼 대사도 여기 남으시오. 죽든 살든 이 도옥은 모르오.]
하고는 오른 손에 장검을, 왼 손으로는 주약란을 옆구리에 끼고 슬금슬금 대청문을 향해 뒷걸음질치는 것이
었다.
그제야 도옥이 혼자 도망가려는 것을 깨달은 지광대사는 황망히 따라갔다.
[어디를 가는 거요?]
[목적지는 없소. 그러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오.]
[그럼 우리 함께 갑시다. 남은 부하를 데리고 말이오. 여덟 명이나 이십 명이나 마찬가지 아니오?]
[여러말 하지 마시오. 지금 말할 시간이 없소. 오겠으면 여덟 명만 데리고 오시오.]
주약란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이상 이창란이나 옥소선자가? 함부로 달려들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한 도옥
은 추호도 두려운 빛 없이 문을 향해 뒷걸음질치는 것이었고 이 기회에 도옥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경혼대
진의 승려들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지광대사는 황망히 여덟 명의 부하를 골랐다.
그렇게 여덟 명을 고른 지광대사가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부하들이 따라 나갔다. 그리고 맨? 뒤에 역시 장검
의 날카로운 칼끝을 주약란의 가슴에 겨눈 도옥이 뒷걸음으로 마악 문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그때까지 주약란의 생명을 염려해서 달려들지? 못하던 여러 무리가운데 옥소선자의? 날씬한 몸매가 바람을
가르며 도옥을 막아섰다.
[도옥! 주소저를 내놓지 않으면 내가 용서치 않을 거요.]
하고 외치는 바로 그때 뒤미처 쫓아온 백독옹이 옥소선자를 엄호하며 싯누런 이를 히! 하고 드러냈다.
[주소저를 놓으시지. 아니면 자네의 모가지도 끝이네!]
은근히 위협했다.
그러자 백독옹의 극독이 얼마나 악랄하며 또 무공 실력이 얼마나 센지를 아는 도옥은 정말 언제 어떻게 독
을 뿌려올지 몰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엉겁결에 물러선 도옥은 장검을 쥔 손을 주약란의 가슴에 댔다.
[뒤로 물러서시오. 아니면 찌르겠소.]
그러자 백독옹은 뒤로 물러서면서도 큰 소릴 쳤다.
[오냐, 하지만 네가 아무리 떨어져도 내 독은 피하지 못해.]
하고 눈을 부라리는 동안, 양몽환과 곤륜삼자 그리고? 천홍대사와 정현도장도, 옥소선자와 백독옹의 좌우로
갈라서며 눈을 부라렸다.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 격으로 포위된? 도옥은 살기를 띄운 그들의 눈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자
절로 한숨과 탄식만 나올 뿐이었다.
날카로운 비수를 든 채 문을? 지키고 있는 검북사의도 두렵지만 그래도? 방주인 자기를 구하겠다고 달려온
왕한상이 팽수위와 시녀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구석에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는 꼴을 보고는 순간 도옥은
비감한 생각이 들어 자신의 위치가 처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살벌한 위험 속을 뚫고 주약란과 함께 빠져나간다는 것은? 목숨이 수 십개 있다 해도 어려운 일
이라는 것을 아울러 생각했다.
<......우선 목숨부터 건지자. 중상을 입은 주소저는 다음 기회에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만 돌려주고 이곳을
빠져나가자......>
하고 결심을 하자 조금 마음이 가벼워지고 두려움도 사라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지금 주소저를 놓치면? 언제 다시 사로잡는단? 말인가? 위험 속을? 뚫고라도 주소저를 놓치지? 말아야
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 잠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속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를? 더 망설이던 도
옥은 겹겹이 에워싼 군중들을 휘둘러 보고는 도저히 주약란과 함께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는 처음의 결심대로 마음을 굳히며 옥소선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만일 이 도옥을 여기서 무사히 돌아가게 하겠다면 주소저를 돌려주겠소.]
하고 조건을 걸고 말았다. 그러자 응당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옥소선자는 여유를? 두지 않고 즉시
응낙했다.
[좋아요. 책임지겠소.]
[그럼 언약을 지키시오.]
하고 주약란을 내려놓은 도옥은 여러 사람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뒷걸음질치다가 막는 기색이 없자 걸
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쳐서 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창란과 곤륜삼자들은 달아나는 도옥을 쫓고 왕한상과? 그 부하들을 지키고 있던 팽수위도 도옥을
쫓아가는 것을 보고는 옥소선자가 황망히 그들을 제지했다.
[그냥 둬요!]
그 바람에 왕한상과 그의 부하들마저 도옥의 뒤를 따르게 하고만? 옥소선자를 보며 팽수위는 눈을 크게 뜨
며 돌아섰다.
[그럼 그대로 보내요?]
[할 수 없어요. 우선 주소저를 구하는 것이 급해요.]
이와같이 해서 도옥을 보내고 그 댓가로 주약란을 구하게 된 여러 사람들은 누워 있는 주약란을 비잉 둘러
섰다.
그런데 유독 조소접만 벽에 등을 기댄 채 처량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상처의 고통이 극심한지 파아란 핏줄이 내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희고 이마와 목덜미
에는 수없는 땀방울이 솟아 있는 것이 한눈에도 심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한 조소접을 먼 빛으로 보고 있던 양몽환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조소저, 얼굴빛이 창백한데 고통이 더 심하오?]
그러자 조소접은 간신히 눈을 뜨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네, 조금......]
하는 조소접을 번쩍 안은 양몽환은 만일을 염려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주약란이 누워 있는 곳 옆
에다 가만히 앉혔다.
그렇게 조소접을 주약란 옆에 앉힌 양몽환은 둘러선 여러 사람중에서 이창란을 발견하고는 주먹을 쥐었다.
[장인어른, 속히 지광대사를 잡아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이창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옥소소저가 돌려보낸 것을 어찌 잡아오겠나?]
[아닙니다.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기? 주소저와 조소저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지광대사외에는 누구도
구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게 사실인가?]
펄쩍 놀란 이창란이 용두지팡이를 거머쥐고 돌아서려는 순간,
이창란보다 먼저 장검을 꼬나쥔 곤륜삼자가 대청 마룻바닥을 박차며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곤륜삼자가 가는데 내 어찌 빠질소냐 하고? 마룻바닥을 구른 이창란은 정현도장과 천홍대사에게 주
약란과 조소접을 잘 보호해 달라고 당부한 다음 검북사의를 향해 소리를 쳤다.
[가자! 우리도!]
하고는 비호같이 대청 문을 나서고 그 뒤를 검북사의가 바람을 갈랐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양몽환과 옥소선자, 그리고 팽수위와 백독옹이 질풍같이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이와같이 해서 천축국의 대국사를 잡아 주약란과 조소접의?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총출동하고 대청 안에는
주약란과 조소접을 지키기 위해 천홍대사와 정현도장 그리고 조소접의 시녀 이십여 명만이 남고 말았다.
한편, 주약란을 돌려줌으로써 대청을 무사히 빠져나온 도옥은 앞서 달려가는 지광대사? 일행과 뒤에 쫓아오
는 왕한상 일행을 쉽게 합류시킬 수 있었다.
지광대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던 도옥은 약간 속도를 늦추며 지광대사를 불렀다.
[대사! 대사와 이 도옥은 어쩔 수 없이 같은 운명이 되고 말았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소. 그래서 한가지 말할 것이 있는데 숨김없이 대답해 주시오.]
그러자 지광대사 역시 속도를 늦추며 길게 한춤을 쉬었다. 천축국에서 중원 땅에 올 때는 주약란을 안고 당
당히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주약란은 고사하고 지금 목숨을? 부지해 도망가기에 숨을 헐떡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절로 한숨과 탄식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미? 엎어진 물, 도옥이 하자는 대로 할 수
밖에 별도리 없는 지광대사의 초라한 신세였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대로 말하겠소.]
하고 맥빠지게 대답하자 도옥은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했다.
[그동안 주소저가 깨어난 일은 없소?]
[두어번 있소.]
[그래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별로, 아니 전연 없었소.]
[음......깨어났을 때 이 도옥에게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걸...]
그러나 지광대사는 더 묻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지광대사는 지광대사대로 주약란을 뺏긴 것이? 분하고 도
옥은 도옥대로 원통해서 둘이 붙잡고 한바탕 통곡이라도 했으면 시원할 것같았다. 그러나 주약란 한 사람을
서로 차지하려는 그들의 심정은 각기 그 분노가 같으면서도 판이하게 달랐다.
이때 뒤에서 들려오는 어지러운 발소리에 얼핏 돌아본 도옥은 뒤에서 곤륜삼자와 이창란 그리고 수십 명의
고수들이 질풍같이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늦추었던 속도를 빨리했다.
근 이십여장(二十餘丈)의 거리를 두고 쫓고 좇기는 무리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자욱히 먼지에 묻히기
그 얼마, 드디어 어느 이름모를 높은 산 계곡 입구까지 달려온 도옥은 급히 왕한상을 불렀다.
그것은 더 이상 도망만 갈 수도 없다는 생각에 이 계곡으로 적을 유인해서 협공하면 승산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왕형! 먼저 나의 사령화신(四靈化身)을 데리고 이 계곡으로 들어가 대적할 준비를 하시오.]
하고 왕한상을 먼저 보낸 도옥은 지광대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사는 여기서 이 도옥과 대적하도록 하시오!]
하고 명령하듯 하는 말에 벌컥 화통이 터진 지광대사는 쫓기는 것만도 원통한데 명령까지 해? 하는 생각이
들어 잠잠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래봬도 나는 천축국의 대국사라는 신분이오. 당신이 나에게 말할 때에는 예의를 지키시오.]
그러자 도옥은 밸이 뒤틀렸으나 당분간은? 지광대사를 이용해야만 되겠기에 울컥거리는? 비위를 꾹 누르며
음성을 부드럽게 했다.
[대사, 지금 사태가 위중한만큼 널리 양해하시오. 적을 물리치면 정식으로 사죄하겠소.]
하고 달래듯 하자 그제야 화통을 가라앉히며 대적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때, 지척지간까지 쫓아오는 곤륜삼자 일행을 노려보던 도옥은 그중에서 백독옹을 찾아내고 손가락으로 가
리키며 지광대사를 불렀다.
[대사, 저기 회색 가사를 입은 늙은이가 바로 백독옹이오. 무공은 별 것 아니지만 극독의 명수요. 우선 저놈
부터 해치웁시다.]
지광대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눈? 앞에까지 따라온 곤륜삼자는 옆으로 쫙? 흩어지고 그 중에서 장검을
꼬나쥔 옥영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장검을 치켜 올렸다.
[도옥! 순순히 나와서 이 장검을 받겠소?]
하고 소리를 치고 도옥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바로 그때, 뒤미처 달려온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옥영자의
앞으로 나서며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세 분 사존(師尊)께서는 검을 거두시오.]
양몽환이었다. 순간, 의아하게 생각한 옥영자는 치켜 올렸던 장검을 내려놓았다.
[왜 그러느냐?]
하고 묻는 옥영자는 과히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실 옥영자는 곤륜파에서 양봉환을 축출하는데 앞
장을 섰고 다시 사문으로 돌아오려고? 애결하는 양몽환을 완강히 거절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곤륜파에서
축출당한 양몽환이 홀로 지내기 어언 오년! 그동안 양몽환은 세 분? 사존(師尊)에게서 입은 은혜를 잊지 않
고 늘 그 은혜를 보답하려 했다. 그뿐 아니라 피치 못해? 곤륜파를 떠나긴 했지만 늘 곤륜파에 누(累)를 끼
칠 일은 추호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음(陰)으로 양(陽)으로 곤륜파를 위해 헌신(獻身)해서 그의 칭찬이? 점
차 흘러 옥영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일양자와 혜진자가 양몽환을 변호한 보람도? 보람이려니와 차차 양몽환에 대한 옛정이 되살아나
던 때, 양몽환이 천축국 승려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듣고 지난 과거를 생각해서 그를? 구하려고 달려온 옥
영자였다.
그러한 옥영자 앞에 지금 나타난 양몽환의 태도가 도리어 자기의? 뜻을 몰라주는 것같아 잠시 불쾌한 생각
이 들었지만 양몽환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지광대사와 대적해 보지 않은 사존께서는 그의? 특이한 독수(毒手)에 경계하셔야 합니다. 주소저와 조소저
도 그의 특이한 독수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 만큼 저 지광대사는 이 제자에게 맡겨주십시오. 제자를 두
고 어찌 사존께서 대적하시겠다고 하십니까?]
그제야 옥영자는 양몽환의 뜻을 알아 듣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옥영자 대신 나선? 양몽환을 또 가로막
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 물러나시오. 이 늙은이가 겨루겠소!]
하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다름아닌 백독옹이었다.
지금 이 백독옹으로 말하면 천축국 승려들이 그렇게? 위세있게 자랑하던 경혼대진을 극독으로 깨끗이 쓸어
버린 장본인이었다. 그러한 백독옹이 나서자? 이창란 이하 여러 사람들은 경혼대진의? 승려들을 쓸어버리던
그의 독수를 생각하며 일말의 두려움까지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백독옹이 마음만 악하게 쓴다면 도옥보다 더 무섭고 악랄한 자로 둔갑해서 강호를 뒤흔들지 모른다
는 의구심까지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옥소선자의 부하가 되어 도옥과 맞서는 것에 우선 마음이 놓였다.
한편, 백독옹을 위시해서 여러 군웅과 맞선 도옥은 이를 부드득 갈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느때고 이러한
결전장이 닥칠 줄은 알았지만 이렇듯 빨리 닥칠줄은 몰랐다. 그러나 이왕 닥친 결전을? 그대로 피할 마음은
추호도 없는 도옥이었다.
왼 손으로 장컴을 움켜쥔 도옥은 오른 손을 허리춤에 대면서 지그시 눈을 감는 듯하며 실눈을 떴다. 그리고
는 눈 앞에 버티고 서있는 군웅들을 하나하나 훑어갔다. 그러한 도옥의 얼굴에는 싸늘한? 웃음이 가시지 않
았다.
그러는 반면, 지광대사는 지광대사대로 두 눈을 이리저리 부라리며 그 중에서도 백독옹의 아래 위를 면밀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결전을 앞둔 계곡은 잠시 살벌하면서도 스산한 침묵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냉랭한 침묵이 흐르던 바로 그때 백독옹의 굵직한 음성이 적막을 깨뜨리고 말았다.
[도방주!]
하는 순간!
갑자기 아랫배에 통증을 느끼며 허리를 굽히는 백독옹! 그리고 쏟아지는 검붉은 피!
[앗! 지광대사가 또 암수(暗手)를!]
절규하듯 고함을 친 양몽환은 질풍같이 지광대사를 덮치고 말았다.
그러자 덤벼드는 양몽환을 향해 일장을 가한 지광대사는 비호같이 몸을 날려 양몽환을 쫓는 척하다가 별안
간 급회전하며 허리를 굽히고 고통을 참는 백독옹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뒤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재차 맹공을 당한 백독옹은 그만한 일격에도 끄덕없다는 듯이 서서 눈을 부
라리는 바로 그때.
응당 쓰러지리라는 군웅들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비웃기나 하는 듯 끄덕없이 서 있는 백독옹의 몸에서 돌연
안개같은 가루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삽시간에 가루 속에 묻히는 백독옹!
그러나 다음 순간! 드디어 썩은 기둥처럼 힘없이 그자리에 쓰러지는 백독옹이었다.
고통을 참고 진기를 돋우어 굽히? 운기하려다 기어이 상처가 중해 운기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임을 알았을
때는 이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백독옹에게로 달려가는 옥소선자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렇게 썩은 기둥처럼 쓰러졌던 백독옹이 벌떡 일어나며 다급히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안돼! 오지 마시오!]
하는 외침 소리에 멈칫 멈추어 선 옥소선자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불의의 일격으로 아랫배에 상처를 받고 피를 토한 백독옹은 즉시? 운기하는 한편 재차 일격을 가하고 피하
는 지광대사에게 안개같은 독가루를 뿌렸던 것이다. 이 독가루는 극히 악랄한 극독으로서 외부로 무슨 상처
가 나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쉴 때 코로 들어가 호흡기관을? 모두 막아버려 결국 숨통을 끊어 놓는 극독이었
다.
그래서 접근해 오는 옥소선자를 못오게 한 것이었고 그러한 백독옹의 뜻을 즉시 알아챈 옥소선자였다.
더 접근하지 못한 옥소선자는 먼 거리에서 외쳐 물었다.
[상처가 어떠세요?]
그러나 백독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소!]
하며 재차 검붉은 피를 토해낸 백독옹은 이윽고 다시 힘없이 쓰러지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숨이 끊어진 것
이었다.
백독옹의 죽음을 지켜보던 양몽환은 그만 가슴을 치며 원통해 했다. 그러나 이미 숨을? 거둔 백독응을 지켜
볼 필요가 없었다. 즉시 정신을 수습하고 장검에 힘을 준 양몽환이 지광대사를 노려보며? 마악 땅을 박차려
는 순간!
두 눈을 똑바로 뜨며 괴상한 고함을 지른 지광대사는 오른?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쓰윽 내리면서 다섯손
가락을 쫙 펴는 것이었다.
그리고 쫙 편 다섯손가락을 자신의 가슴에 겨누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푹!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가슴깊이 틀어박히는 다섯개의 손가락! 자기 스스로 가슴을 찌르는 이 돌변
하고도 놀라운 사태에 양몽환은 질겁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때 이창란의 우렁찬 음성이 터졌다.
[여러분! 뒤로 물러서시오. 지금 그가? 백독옹을 죽이긴 했지만 그 역시? 백독옹의 극독을 들이마셔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이오. 그런 만큼 이미 그와 싸울 필요가 없어졌소!]
사실이었다. 숨통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 그것을 뚫으려고 스스로 가슴을 찔렀지만 숨통이? 끊어지기는 마
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 접근한다면 아직 남아 있는 극독에 상하게? 되기 때문에 뒤로 물러서라는 것이었고 또
군웅들은 뒤로 물러섰다.
무술계의 오랜 경험과 경혼대진을 격파할 때 백독옹의 솜씨로 보아 그것이 어떠한 극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이창란의 말을 누구도 의심할리 없었다.
그러나 지광대사의 목숨을 끊으면 안되었다. 그러면 주약란과 조소접도 죽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당황한 양몽환은 급히 소리를 높여 지광대사를 불렀다.
[대사! 중독되었소?]
그러자 지광대사는 숨통이 막히는지 답답한 가슴을 꽝꽝 치며 몸을 뒤척이다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
덕였다.
[백독옹이 혹시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오. 속히 찾으시오!]
중독될까 염려해서 양몽환은 백독옹에게 가지 못하고 지광대사가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가슴에 찔
렀던 다섯손가락을 뽑아내는 지광대사의 가슴에서는 순식간에 샘솟듯 쏟아져나오는 피로 뒤범벅이 되고 말
았다.
그러나 죽기는 싫은지 백독옹이 쓰러져 있는 곳을? 더듬어 휘청휘청 걸음을 옮기는 순간! 느닷없이? 달려든
도옥의 장검에 허리부터 끊어져 두 동강이 나는 지광대사의 최후였다.
결국, 도옥의 간계에 빠져 이역 만리 천축국에서부터 헐레벌떡 달려와 많은 부하를 잃고 나중에는 계곡까지
쫓기는 신세였다가 역시 도옥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마친 지광대사 아니 대국사.
순간, 다시 한번 놀라운 사태에 아연해진 군웅들 틈에서 그래도 양몽환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악독한 놈, 주소저와 조소저를 끝내 살리지 못하게 하겠단 말인가!>
그리고 한 걸음 나서며 도옥을 불렀다.
[도형 이제는 누구를 죽일 차례요?]
하고 장검을 고쳐 들었다.
이때 검북사의는 지광대사가 데리고 온 여덟 명의 부하를 가로막았고 곤륜삼자는 도옥의 퇴로(退路)를 그리
고 옥소선자와 팽수위는 왕한상과 대치하고 여차하면 일시에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언제 미리 의논하거나 약속한 바도 없었지만 정해진 일처럼 일사불란으로 태세를 갖추는 것을 이윽히 바라
보는 도옥은 여전히 실눈을 뜨고 싸늘한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도옥은 두 눈을 천천히 뜨며 사방을 돌아보았다. 만만치 않은 태세로 둘러선 이창란, 곤륜삼자, 검북
사의, 옥소선자, 팽수위를 차례로 돌아본 다음 도옥의 두 눈은 양몽환의 얼굴에서? 멈추어졌다. 그리고 냉랭
한 어조로 양몽환을 불렀다. 도저히 승부가 없는 지금 간계를 써야 했다.
[양형! 주소저와 조소저의 내상을 치료할 지광대사는 이미? 죽었소. 그러면 주소저와 조소저의 내상을 치료
할 사람은 이 천하 무술계에서 오직 이 도옥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흥! 이건 엄포다. 이놈이 또 흉계를 쓰려고?......>
[천만에! 그런 간계에 속을 이 양모인은 아니오!]
[믿지 못한다 그거요?]
[물론!]
[그렇다면 좋소. 주소저와 조소저는 지금 중태요. 그중에서 한사람만 살려 이 도옥의 허실(虛實)을 증명해서
믿게 하겠소!]
<뭣이? 치료한다고 간계를 부려 주소저나 조소저를 인질로 잡으려고! 이 음흉한 놈......>
하며 양몽환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냉랭히 계속해서 말하는 도옥이었다.
[기금 조소저는 내상도 중태이려니와 천축국의 중독약까지 먹었소. 만일 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평생 중독
된 상태로서 지내지 않으면 안되오.]
[.........]
도옥의 말이 옳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옥의 간계를 이미 안 이상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양형! 망설이지 마시오. 우선 중독된 조소저부터 치료하겠소. 그러면 이 도옥의 말을 믿을 것이오. 만일 안
심이 되지 않는다면 양형이 이 도옥 옆에 지켜 있으시오.]
그러자 양몽환은 잡시 생각한 후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만일 계략을 쓴다면? ......]
하는 말을 도옥이 즉시 이었다.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소.]
<......또 한번 속아보자......그러나 그렇게 쉽게 속지는 않으리라......>
굳게 결심한 양몽환은 우선 조소저라도 살려야 했다.
그래서 양몽환은 치밀한 계획을 짠 다음 옥소선자에게 다가갔다.
[수고스럽지만 조소저를 데려다 주시오.]
그러자 옥소선자는
<......또 속이려고?......그러나 계획이 있는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하고는 아무 말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달려갔던 옥소선자는 조소접을 품에 안고 나는 듯이 되돌아왔다.
이때, 양몽환이 곤륜삼자에게로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하자 그? 말에 따라 삼방위(三方位)로 갈라서는 곤륜
삼자의 비장한 모습이오, 굳건한 태세였다.
일단 계획을 짜고 곤륜삼자에게 계획을 말한 양몽환은 천천히 도옥에게로 다가갔다.
[도형! 치료하시오!]
그러자 들고 있던 장검을 집어던지고 성큼성큼 조소접에게로 다가온 도옥은 무릎을 꿇고 앉아 운기한 다음
조소접의 세 곳 요혈을 짖는 것이었다.
그러는 한편, 곤륜삼자와 이창란 그리고 양몽환은 각기 태세를 갖추고 언제 어느때나 도옥에게 덮칠 기세로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때 조소접의 세곳 요혈을 짚은 도옥은 다시 한곳 요혈을 짚은 다음 까딱도 하지 않고 조소접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숨을 길게 내쉬며 벌떡 일어나 앉는 조소접을 보고서야 긴장되었던 숨막히는 순간이 드디어 끝나게
되었다.
벌떡 일어나 앉는 조소접에게 급히 다가간 양몽환은 황망히 소리쳤다.
[조소저, 속히 운기해 보시오. 상처가 어떤가!]
그러자 천천히 일어난 조소접은 잠시 운기한 다음 대답했다.
[많이 나아진 것같아요.]
그제서야 도옥은 씨익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양형! 이젠 믿겠소?]
일이 이렇게 되고서야 믿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 양몽환은 슬쩍 말을 돌려 되물었다.
[지광대사에게 배웠소?]
[아니오.]
[그럼?]
[말할 수 없소!]
[좋소. 주소저의 상처도 치료해 주시오.]
그러자 도옥은 씨익 웃었다.
[주소저? 그녀의 생명을 조건으로 이 도옥은 어떻게 하겠소?]
[도형의 생명도 아깝지 않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그러나 도옥은 곧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이때, 지광대사를 따라온 여덟 명의 승려들은 그의 시체 앞에 꿇어앉아 합장하곤 염불만 외우고 있었다. 그
러나 도옥에게 달려들 의사는 없는 표정이었다.
얼마 동안 주위를 둘러본 도옥은 냉랭히 말했다.
[주소저를 살리기 싫다면 이 도옥을 죽여도 좋소! 이 도옥을 죽인다면 바로 주소저를? 죽이는 것과 같은 것
이오.]
하는 도옥의 오만한 태도를 양몽환은 무시했다.
[큰 소리치지 마시오. 천축국의 승려들이 여기 있소.? 그들에게 물으면 치료약이나 치료법을 알 수 있을? 거
요.]
[핫......하......그런 요행을 바란단 말이오? 천만에 말이오. 천하에 주소저를? 살려낼 사람은 오직 이 도옥뿐이
오. 이 도옥의 조건만 들어준다면 치료하겠소.]
[그럼, 조건은?]
[조건은 간단하오. 주소저를 살려주는 대신 앞으로 삼개월간 서로 싸우지 말자는 거요.]
[삼개월 동안?]
[그렇소. 삼개월이 지난 후에 정정당당히 겨루자는 것이오.]
[좋소. 그대신 이 양모인도 한가지 조건이 있소.]
[어떤 조건이오?]
[삼개월이 끝나는 날, 어느 장소를 정해서 승부를 겨루되 꼭 나타난다고 말이오.]
[그야 물론이오. 이 도옥은 염려말고 양형이나 틀림없이 오시오.]
[맹세코 나오겠소.]
[그럼 삼개월이 끝나는 날 남악(南嶽) 땅 형산(衡山)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좋소.]
한면, 도옥 앞에 눕혀 놓은 주약란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시체나 다름없이 쓰러져 있었다.
그러한 주약란을 얼마 동안 내려다 보던 도옥은 몇곳 요혈을 짚은 다음 천천히 고개를 들고 옥소선자를 불
렀다.
[내상이 너무 심중하여 시간이 걸려야겠소.]
[몇 시간이면 되겠어요?]
옥소선자는 암담한 표정으로 주약란을 내려보며 한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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