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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원한 25

오늘의 쉼터 2014. 10. 26. 09:19

제24장 원한 25

 

 

 

경선이 천관을 마치 제 딸처럼 끼고 돌며 한방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는데,

그러던 어느 날 자다가 낌새가 수상해 눈을 떠보니 잠결에 자신이 천관의 앞가슴을 풀어헤치고

어수선한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꿈에서야 명백히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처녀 젖가슴을 주무르다 깨어났으니 고승 소리를 듣던 경선이 하도 무참하여,

“언제 젖통이 그처럼 커졌느냐? 내가 너하고 더 있다가는 큰일내겠다.”

하고는 당장 그 이튿날부터 주변에 혼처를 알아보았다.

그때 절과 인연이 깊은 사람 가운데 금관 출신의 제사장이가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었는데, 사람이 제법 신통해서 보지 않고도 눈앞의 것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 날 궂어 비 내릴 것과 악인, 선인 구별하는 것,

 배부른 아낙네 산일 짚어주고 병든 노인 죽을 날 알아 맞추는 것 따위,

눈 달린 사람이 못 보는 것까지 보고 살았다.

그 제사장이 처를 먼저 보내고 외동아들마저 군역에 나간 뒤로 침식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고생하다가 하루는 칠불암을 찾아와 천관을 민며느리로 달라고 청하였다.

어떻든 좋은 혼처를 구해 천관을 시집보내려던 경선은 봉사 제사장이의 부탁이 하도 시뻐서,

“이 사람아, 자네 집 민며느리로 줄 바에야 내가 파계를 하겠네.”

하고 고개를 절절 흔들었지만 당사자인 천관은 오히려 그 제사장이 불쌍하다며,

“스님은 불도를 닦는다는 분이 남의 젖가슴을 만지더니 이제는 신분 귀천까지 논하십니까?

정말 되잖은 중이올시다.”

하고 흉을 보면서,

“그분이 비록 앞은 보지 못하지만 마음은 올바른 분이고 또 저와 같은 금관국 출신이니

풍습도 맞고 마음도 맞습니다.

지금 세상은 신라인, 가야인이 두 패로 나뉘어 서로 욕질이나 하는 판인데

저와 같은 몸으로 어떻게 떵떵거리고 사는 신라인한테 시집을 갈 수 있겠으며,

설혹 그런 자리가 있어 시집을 가도 뒤가 편하겠소? 게다가 저는 스님이 이상한 것들을

하도 많이 가르쳐서 그런지 다른 여염의 처자들처럼 밥하고 빨래하며 살 자신이 없습니다.

차라리 제사장이 어른의 민며느리가 되어 자유롭게 사는 편이 훨씬 좋겠소.”

하고 고집을 부려 하는 수 없이 제사장이의 민며느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군역 나간 아들이 이듬해 주재성(主在城)에서 백제군의 손에 죽어 천관은

신랑 얼굴도 모른 채로 과부가 되었다.

제사장이 가 천관에게 말하기를,

“첫날밤도 못 치르고 과부가 되었으니 말이 과부지 처녀나 다름없다.

나만 입을 다물면 세상에 알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다른 혼처를 구해 시집을 가거라.

미안하다, 아가. 내가 노욕이 과해 네 앞길을 망칠 뻔했구나.”

하며 재가를 권하였으나 천관이 늙고 눈먼 노인을 혼자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전과 다름없이 침식을 돌봐주고 같이 지냈다.

유신을 만났을 때 천관은 처녀의 몸이었다. 제사장이 시부가 죽은 뒤로 천관은

천경림에 집을 구해 유신과 같이 살았는데, 두 사람이 주로 은밀한 방에서 사랑도 나누지만

때로는 밖에 나가 말도 타고, 그러다가는 심심찮게 창칼을 들고 무예 시합도 벌였다.

하루는 유신의 상수살이 궐번 날을 택해 점심밥을 싸들고 가지산에 사냥을 나갔는데,

산에 당도하니 갑자기 뇌성이 울고 번개가 쳤다.

그런데 남장한 천관이 말에 우뚝 올라 기암괴석이 양쪽으로 늘어선 고원의 평지를 내달리며

붉은 빛을 머금은 먹구름 아래서 화려한 마상무예를 펼치니 유신이 혀를 내두르며,

“마치 하늘에서 옥황제를 보필하는 신장이 내려온 듯 귀기마저 감도는구려!”

하고 탄복을 금치 못했다.

또 하루는 고승 원광이 가실사에서 김유신을 초청했을 때 천관이 따라가서

원광이 지은 시문에 답시를 지으니 원광이 깜짝 놀라며,

“경선이 대저 아들을 키운 것이냐, 딸을 키운 것이냐?”

하였고, 낭지 법사도 취산에 놀러온 천관을 만나보고는,

“칠불암에 사는 중놈이 솜씨가 제법이다. 용화의 배필감으로 부족함이 없구나.”

하며 경선과 천관을 두루 칭찬하였다.

후에 유신이 천관으로부터 국원 백부 집에 양자로 들어간 두 남동생 얘기를 전해 듣고

이름을 물으니,

“큰 아우는 이름이 천존이고 작은 아우는 천품입니다.”

하여 이미 두 형제와 가깝게 지내던 유신이 더욱 반가워하였다.

두 사람의 가까운 관계가 점차 입소문이 나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으나

오로지 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만은 그 사실을 몰랐다.

칠중성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을 때도 김유신은 천관과 함께 며칠간

거로현에 나들이를 가서 금성에 없었다.

그가 돌아와 집에를 들어가니 마침 서현이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쓸고 있다가,

“너희 어머니가 골이 단단히 나셨다. 어서 안채로 들어가 봐라.”

하고는,

“나는 그 처자가 마음에 든다만 너희 어머니 생각은 또 다른 모양이다.

네가 어머니를 설득시키든지, 어머니 뜻을 따르든지 어쨌든 이런 일로

모자간에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하고 당부하였다.

그는 천관이 금관국 석학이었던 이학의 증손녀라는 소문을 듣고 흡족해하였지만

만명의 뜻은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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