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24
“막리지 연개소문이란 자는 과연 어떤 인물이오?”
여주가 묻자 춘추가 나서서 대답했다.
“신이 마침 연개소문을 잘 압니다.”
“오호, 그래?”
여주는 물론이고 중신들조차 눈이 휘둥그레져서 일제히 춘추의 입을 주시했다.
“연개소문은 신이 옛날 장안에 숙위할 때 바로 이웃에 살며 조석으로 면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연개소문뿐 아니라 그때는 지금 백제의 상좌평인 성충도 한동네에 살았는데,
두 사람이 모두 신의 연배라 고향을 잊고 벗 삼아 어울리며 객수(客愁)를 달랠 때가 많았나이다.
연개소문은 서부 욕살 연태조의 아들로 성품이 활달하고 용맹스러우며,
심신이 강철처럼 단단하여 한번 마음을 먹은 일은 반드시 행하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는 양광의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을 존경하고 담덕(광개토 대왕)과 거련(장수왕)의 시대를
그리워하였는데, 언젠가 당주의 집에서 술에 만취하여 나왔을 때는 신의 어깨를 붙잡고
을지문덕이 있을 때 중국을 정벌하지 못한 것을 눈물까지 흘려가며 한탄하였습니다.
또한 당주가 보위에 오르기 전, 진왕으로 있을 때까지는 그 역시 당주와 가깝게 지냈으나,
현무문에서 당주가 형제를 살해할 때 사이가 틀어져 그 뒤론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는데,
소문에는 그가 당주의 아우인 원길(元吉)과도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개소문은 당주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이미 그때부터 당주가 보위에 오르는 것을 내심 불안하게 여겼던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성 남쪽에 도부수들을 은밀히 감춰놓고 1백 명도 넘는 조정 중신들을
무참히 살해한 수법은 그때 당주의 방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욕을 하면서 배운다더니 연개소문의 정변이 바로 그런 경웁니다.”
“하면 그가 당주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 공과도 그러했는가?”
대강 설명을 듣고 난 여주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과는 마지막 인사만 나누지 못했을 뿐 사이가 줄곧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입니다.
춘추공을 고구려로 보내어 연개소문과 공수 동맹을 의논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상신 사진이 말했으나 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상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필이면 이때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것은 분명히 예사로운 일이 아니올시다.”
이찬 염종도 거들었다.
염종은 본래 비담과 함께 불충한 마음을 품었으나 겉으로는 칠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이 있었고,
또한 여주가 왕실의 화목을 내세워 비담을 감싸주었기 때문에 이때는 예부령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염종의 재청에도 여주는 역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하지만 춘추와 연개소문의 친분이 알려진 뒤로 대세는 고구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신을 보내주십시오,
전하. 반드시 연개소문을 설득시켜 군사를 얻어오겠나이다.”
춘추가 직접 나서서 아뢰자 여주는 사뭇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사정이 다급하긴 하나 며칠만 더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소.”
여주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몸을 일으켰지만 중신들은 대부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제 조정의 공론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자는 데로 모아졌으나 임금의 윤허가 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저녁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찾았다.
이 무렵 춘추의 집에서는 한 가지 작은 소동이 생겨 춘추 내외가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바로 지소 때문이었다.
고타소가 품석에게 시집을 간 뒤 지소에게도 산지사방에서 매작(媒?)이 들어왔다.
인물도 언니보다 낫고, 빈틈없는 처신이며 야무질 데 야무지고 다소곳할 데
다소곳한 품성으로도 양첫감으론 언니보다 윗길이라 보는 사람마다 탐을 냈으나 어쩐 일인지
지소는 그 숱하디숱한 명문 세도가의 군침 도는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매작이 들어올 때마다
코방귀만 뀌었다.
이찬, 잡찬 대감집 며느리라고 해도 고개를 젓고, 신랑 벼슬이 아찬, 파진찬이래도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하루는 어머니 문희가 수상히 여기고,
“얘야, 너는 도대체 어디로 시집을 가려고 그처럼 도도하고 태평스럽니?
성인의 아들이나 신의 자손을 찾니?
아니면 너도 혹시 네 언니처럼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게니?”
하고 물었더니 지소가 묻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큰외숙께서는 왜 아직도 성혼하지 않으시나요?”
하고 난데없이 되물었다.
하긴 김유신이 나이 마흔이 넘도록 장가를 안 든 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바였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김유신은 경사에서 상수살이를 할 때 천관(天官)이라는 가야 출신 여인과 정분이 났다.
천관은 전날 백석이 흉측한 마음을 품고 유신을 꾀었을 때 골화천 객관에서 도움을 준 여인이었는데,
그 뒤 경사의 색주가에서 재회한 뒤로 갈수록 정이 깊어졌다.
천관은 본래 금관국에서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던 이학(伊鶴)의 증손녀였다.
구해 대왕이 금관국을 들어 신라에 왔을 때 이학이 18대나 되는 수레에 금관국 5백 년의 예기(禮記)와
경서를 싣고 오니 진흥 대왕이 친히 옥좌에서 내려와 두 손으로 인수하고 말하기를,
“금관은 다만 시운이 불리하고 병세(兵勢)가 약해 망하였을 뿐
그 정신의 고귀함은 오히려 우리 계림을 가르칠 만하다.
이제 금관의 찬란한 비기(秘記)가 계림에 전해졌으니
이 나라에 문물이 창성하고 학문과 예절이 번영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구나.”
하고서 이학에게 진골 품계와 이찬 벼슬을 내려 왕사(王師)로 삼았다.
그러나 이학이 죽은 뒤 자식들은 이렇다 할 벼슬을 얻지 못해 금관 땅으로 낙향해 살았고,
천관의 아버지 역시 평생 가야국 망민들과 어울려 울분이나 토로하다가 나이 마흔에 병사하니,
그 어머니가 아들 둘은 국원 사는 백부 집에 양자로 보내고,
딸 천관은 칠불암(七佛庵:수로왕의 7왕자가 성불했다는 절)에 시주한 뒤
자신은 신라인을 만나 재가하였다.
국사 원광과 도반이던 칠불암 주지 경선(庚善)은 낭지 선사 밑에서 신통을 배우고
무예를 익힌 기승(奇僧)이었는데, 불목하니로 들어온 천관을 특히 예뻐하여
어려서부터 공부도 가르치고 남자처럼 옷을 입혀 말 타고 창칼 쓰는 법을 가르치니
배우는 여자아이도 여자아이 같지 않아 남자아이보다 오히려 체득이 빨랐다.
이에 재미가 난 경선이 자꾸만 더 가르쳐서 천관이 스무 살 안쪽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마상무예를 펼치면 아무도 여자인 줄을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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