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원한 23
그러고도 다시 한참이 더 지나갔다.
드디어 당나루 해역으로부터 기다리던 전갈이 당도한 것은 부쩍 짧아진 9월 해가
서편마루를 향해 빠른 속도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그래, 어떻게 됐느냐?”
의자왕이 다그쳐 묻자
기미진의 전갈을 들고 온 군사는 땅에 머리를 박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바다에 심한 풍랑이 일어나 부득불 적선을 놓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군사는 더욱 작은 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또한 우리 추격선 가운데 다섯 척이나 풍랑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나이다.”
초조해하던 의자왕은 그 소리를 듣자 맥없이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춘추를 놓쳤다면 다 글렀도다.
당항성은 이번에 얻지 못하겠구나.”
임금을 따라온 장군 의직이 말했다.
“기왕 예까지 온 군사들입니다.
우선 당항성을 치고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의자왕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항성은 신라의 명줄이나 마찬가지라 저들은 사생결단으로 이를 지키려 할 것이다.
미후성이나 대야성과는 그 격이 다르다.
따라서 군사를 내면 적어도 두어 달 싸움은 족히 갈 것이다.
그사이 당나라 사신이 와서 간섭을 한다면 우리는 힘들여 빼앗은 땅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라는 오직 당항성을 통해서만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므로 그런 곳을 쳐서 뺏는 것은
자칫 당조의 원한을 사는 불경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이 알기 전에 쳐야지 이미 안 뒤에는 군사를 내기 어려운 곳이 바로 당항성이다.”
이때만 해도 의자는 부왕이 남긴 유지를 충실히 받들어 당조에 거역하려는 뜻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도 애석했던 그는 금방 회군하지 못하고 며칠간 더 머물다가 10월 초순에서야
모든 것을 체념하고 환궁하였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번엔 다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다.”
의자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당나라에 급보를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러 갔던 김춘추가 금성으로 돌아온 것은 10월 중순이었다.
춘추가 돌아오자 임금은 반가움을 금치 못했다.
“원로에 노고가 많았소. 무사히 다녀오셨소?”
춘추가 당나라에 다녀오는 사이 여주 덕만(선덕왕)은 자신의 직권으로 춘추에게
품주의 전대등(오늘날의 차관) 직을 맡겨놓고 있었다.
품주대신은 이찬 수품이 맡고 있었으므로 춘추는 수품 밑에서 나라의 기밀을 다루게 된 것이었다.
이는 춘추에게 조정의 공론이 없이도 자신과 의논해 뜻한 바를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여주의 배려였다.
그래 놓고 여주는 나라의 대신을 대하는 예우로 조카인 춘추에게 공대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당주께선 안강하십디까?”
“당주는 곧 재상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백제에 파견하기로 신과 굳게 약조했습니다.
그는 백제를 거쳐 우리나라로 와서 전하께 시말을 낱낱이 고할 것입니다.”
춘추의 대답을 들은 여주는 크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춘추가 당나루 해역을 순시하듯 돌고 갔다는 진춘의 보고를 받자
만조의 중신들과 더불어 박수를 치며 통쾌해했었다.
“이번에 목숨을 건 공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서적이 어찌 저절로 물러갔겠소?
10만 대군의 수고로움을 이미 공이 혼자 대신했는데,
이제 당에서 또 재상까지 파견하도록 만들고 왔으니
과연 공은 나라의 간성(干城)이오. 실로 듬직하오.”
임금은 춘추를 한껏 칭찬하고 나더니 돌연 신하들을 둘러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남의 나라에 들어가 원조를 구걸하고 적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비통하기 그지없소.
계림에 법흥 대왕과 진흥 대왕 시절이 있었다는 게 마치 환상과 같구려.
혹시 과인이 여자의 몸이라 구적들에게 더욱 만만하게 보이는 것은 아닌지,
갈수록 자곡지심(自曲之心)만 깊어갈 따름이오.”
여주의 자책하는 말에 중신들은 어쩔 줄 모르고 머리를 조아렸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만릿길을 다녀와서 간신히 발등에 떨어진 불을 껐다고는
하지만 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는지……”
여주의 계속되는 탄식에 신하들은 한결같이 말문이 막혔다.
한동안의 침묵 끝에 상대등 사진(思眞)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전에 논의하다 중단한 공수 동맹의 상대를 시급히 결정하여
근본적으로 서적의 발호를 제압해야 할 줄 압니다.”
사진의 제안으로 공론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당항성 침공이 있고 난 직후여서 중신들은 저번처럼
자신들의 주장만을 막무가내로 고집하지는 않았다.
당과 연합하자는 측도, 고구려와 동맹하자는 측에서도 어느 쪽이 됐건
결정을 서두르자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런데 논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고구려에서 일어난 정변 소식이 전해졌다.
관심은 자연히 정변의 주역인 연개소문에게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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